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61
163화. 브레멘 음악대(3)
* * *
당장 헬기를 둘러싼 사람들의 수만 해도 무려 16명.
이에 반해 정우 측은 짐승들까지 모두 합해도 머릿수가 여덟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태반은 표정만 봐도 비전투 인원이었다.
이러니 정우의 엄포에 겁을 먹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동물적인 직감을 가진 일부를 제외하고 말이다.
스슥.
놀랍게도 16명 중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걸 본 나머지 14명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두 배신자를 쏘아봤다.
“무슨 미친 짓이야……?”
그러자 두 ‘앞잡이 후보’ 중 하나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저 사람들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는지. 소를 매달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무나 못할 짓이지. 저게 우습게만 보이나? 난 아닌데.”
이 시국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는 이 사내는 흰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신발은 적갈색 로퍼. 짙은 남색의 정장 바지를 입었고, 위엔 흰 셔츠에 타이를 맸다. 셔츠에 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은 게 아주 인상 깊다.
정수 보유량은 55만 개.
반면 또 다른 후보는 전형적인 생존형 복장이었다.
보유한 정수는 49만 개.
주머니가 잔뜩 달린 바지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군용 조끼까지 걸치고 있었는데, 등에는 큰 배낭도 메고 있었다.
언제라도 공동체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이는 뿔테가 30대 초반, 생존가는 50대 중반 정도로 차이가 꽤 났다.
말수도 생존가 쪽이 훨씬 적었고.
“그럼 우리 둘뿐입니까?”
생존가는 이렇게 묻기만 했고, 이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꾸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정우의 다면체 보호막이 심하게 요동쳤다.
이다음 이어진 장면은 일반적인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는데, 두 후보 모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꿋꿋이 서 있었다.
퓨수우우웃!
수백 개의 가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동료들을 꿰뚫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정우의 이런 방식은 살해가 끝난 뒤가 더욱 가관이었다.
퓨릅!
대상자를 뚫고 지나간 가시들이 도로 회수되자 찰기 가득한 소리가 수십 개씩 겹쳐서 발생했고, 곧 사방에서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제길, 베팅 성공이네.”
팟.
뿔테가 보호막을 한층 두껍게 두르며 핏물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린다.
녀석의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지만 입꼬리는 마치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위로 올라간 채였다.
모종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생존가는 별다른 표정 없이 시체의 구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방출은 아니고, 물체화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고……. 설마 위쪽은 이미 다 정리된 겁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요?”
제법 많은 고민과 추론을 해 온 흔적이 엿보이는 대사였다.
정우는 여전히 침착해 보이는 생존가의 눈을 보면서 덤덤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 나라에 흩어진 정수를 전부 모으는 중이다. 그런데 너희는 4일이나 지나는 동안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 다른 녀석들과는 종자가 좀 다른 것 같던데.”
보아하니 나름 강단도 있고 학살에 최적화된 인물들 같은데 왜 이런 무리에 섞여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것도 고작 50만 개 수준의 정수만 가진 채로.
그러자 뿔테가 어림도 없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글쎄요,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닙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합디다.”
안전한 잠자리, 식량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홀로 살인을 해나갈 경우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고독도 큰 문제였다.
“이제 어지간히 살아남을 만한 사람들만 남은 거 아닙니까? 굳이 우리끼리 피를 봐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뿔테가 다른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으나 정우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가 살아남을 만한 사람들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다. 이제 둘 중 누가 길 안내를 할지 정해. 다른 하나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뭐요……? 여기서 또 거른다고?”
뿔테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험악하게 구기다 얼른 태도를 바꿨다.
“이 동네 정수를 최대한 빠르게 모으는 게 목적이신 거 아닙니까? 전 여기서 외근자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깥에 나가 있는 근무자들을 전부 불러 모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녀석이 허리춤에서 까만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저건 도심 송신 거리가 2킬로도 채 안 됩니다. 외근자들이 고속 도로까지도 나가 있는데 저걸로 불러 모으겠다는 건 엄연한 사기지요.”
생존가가 칼같이 견제를 시작한다. 그러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깍듯한 말투로 제안했다.
“12분 뒤 창원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도청으로 복귀합니다. 그러니 바로 도청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낫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
“…….”
생존가의 말에 정우가 흥미를 보이자 드디어 뿔테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예. 이 사람들이 여기에 모이게 된 이유기도 하고, 조만간 제가 여길 떠나려던 이유기도 합니다.”
생존가는 이 말과 함께 본인이 멘 배낭을 툭 건드렸다.
‘아아.’
정우는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가가 말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진 걸 한꺼번에 쏟아 내지 않고 적당히 잘라 보여 주면서 본인과 계속 대화하도록 만들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정우가 건넬 생존권 역시 이 사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길 왜 떠난다는 거지? 그 가장 강하다는 자가 당신들을 지켜 주고 있는 거 아닌가.”
정우가 이렇게 묻자 생존가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조만간 그 사람 때문에 전부 죽게 될 겁니다.”
“……?”
“곧 부산으로 진입한다더군요. 전쟁을 하겠다는 거죠. 이해는 가지만…….”
“아니, 난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정우가 부연을 요청했고, 생존가의 입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열렸다.
“여기에 한때 순위권자였던 구원자가 있습니다. 지금쯤은 6위나 7위 사이겠지요.”
“……뭐?”
이건 행간을 좀 건너뛴 수준이 아니라 수십 페이지를 넘겨 버린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같은 공동체 소속에 전투력도 비슷한 수준인 ‘뿔테’ 역시 이건 처음 듣는 소리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 이 사실을 생존가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고작 49만 개짜리 각성자가 구원자에 대해 이리 잘 알고 있을까? 그것도 ‘지금쯤은 6위나 7위 사이’라는 사족을 붙일 정도로 말이다.
다들 넋 나간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못하고 있자 갑자기 용헌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잠깐……!”
그러곤 생존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
정우는 용헌이 이러는 걸 처음 봤기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잠자코 길을 내줬고, 곧 용헌과 생존가의 거리가 5미터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설마요.”
용헌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분명히 생존가의 얼굴을 보고서 그러는 거였다.
“뭐죠. 아는 사람입니까?”
정우가 두 사내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감지했을 즈음.
스윽.
용헌이 생존가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권정겸 님…… 아니십니까? 부산 본부장.”
“아.”
이에 50대 중반의 생존가가 단음을 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반응. 하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지금 눈앞에 대성 그룹의 부산 본부장 권정겸이 나타난 것이다.
* * *
오후 4시 24분, 창원의 올림픽 공원.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우의 물음에 생존가, 아니 권정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 제어에 실패했을 뿐, 별 사연 없소.”
담백한 대사였지만 별 사연이 없을 리 없었다.
다른 자도 아닌 한때 대성 그룹의 본부장을 맡고 있던 자가 49만 개짜리 각성자가 되어 숨어 지내고 있지 않은가.
앞서 지나온 서울 본부의 위상을 떠올려 봤을 때 이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산도 ‘긴급 대응’을 전개 중이지 않았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요?”
이번 일에 정우보다도 더 놀란 건 다름 아닌 용헌이었다.
지금이야 정우의 전속 조종사지만 한때는 용헌 역시 대성 그룹의 일원이었으니까.
“특수 전단은 각지에서 격파되거나 와해됐고 일부는 독립했소. 외지에서 들어온 자들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더군. 애초에 힘을 분배해서 관리한다는 게 멍청한 짓이었던 거지.”
정겸은 이 말을 하면서 정우를 흘깃 봤다.
그는 애초에 대성 마크가 찍힌 백색 헬기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곳에 누가 왔는지 알고 있었다. ‘블루 리스트’는 서울 본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쪽이 부산 길잡이도 겸할 수 있겠군.”
“물론이오.”
정우의 말에 정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만치 옆에 서 있는 뿔테를 바라봤다.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 같은 동작.
“아니, 잠깐. 나는……!”
최후를 직감한 뿔테가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으나 정우의 손이 반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슥.
파아앗!
거침없이 뿜어져 나간 푸른 파동이 뿔테가 있던 자리를 휩쓸었고, 잠시 뒤 그곳엔 파란 정수 구체만 남게 됐다.
끝내 열여섯 각성자 중 정겸 하나만이 살아남게 된 거다.
“…….”
정겸은 정우가 수십 개의 구체를 흡수하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
티틱, 틱, 틱, 스아아…….
정수라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살생을 해야 획득할 수 있는 자원.
즉, 정우는 온갖 형태의 죽음들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읍.”
제법 묵직한 흡수감에 정우가 심호흡을 한 번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정수 총량 앞자리가 또 한 번 바뀌었다.
「33,287,050」
3,300만 개.
정수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 가고 있어서 이젠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만한 정수로 또 어떤 짓까지 벌일 수 있을지 말이다.
“……지금 몇 개나 들고 있는 겁니까?”
정우가 일을 다 마치자 정겸이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정우는 대답 대신 시계를 봤다.
오후 4시 27분.
“창원에서 가장 강한 자가 곧 복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3분 남았습니다. 아마 도청에서 간단한 정비를 한 뒤에 다시 떠날 겁니다.”
“어디로?”
“김해로요. 지금 거긴 아수라장입니다.”
“정수가 많다는 말이군요.”
“…….”
정우는 정겸에게 헬기에 타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정겸이 걸음을 옮기려다 용헌과 눈을 마주치곤 멈칫했다.
“괜찮습니까?”
정겸의 짤막한 대사.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첫째는 당신이 모는 헬기에 자신이 몸을 의탁해도 괜찮겠냐는 의미.
둘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한때 대성 소속이었던 사람으로서 서울 본부를 박살 낸 괴물을 모시고 있는데 정말 괜찮은 거냐고.
이에 용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 걱정은 됐으니 목숨값부터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