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63
165화. 브레멘 음악대(5)
툭.
“……엉?”
민구가 이질감에 뺨을 만지자 물기가 묻어 나왔다.
그러더니.
투둑.
투두둑, 툭.
하늘에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57분.
해가 지려면 아직 두세 시간 남았지만 어느새 몰려든 먹구름 탓에 벌써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 물.
민구와 나란히 걷던 냄새가 하늘을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빗물을 삼킨다.
지금 둘은 성역을 떠나 구리 시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시청에 잔뜩 쌓인 물자를 지키기 위해서다.
저녁 즈음해서 구리시 각지로 파견나간 각성자들이 시청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으니까.
또한 다음 수색 작전을 위해서라도 놈들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러면 놈들이 예정보다 더 빨리 돌아올지도 모르겠는데.”
민구는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민구 자신의 정수 총량이 190만 개, 냄새도 150만 개를 가진 상태였기에 근방에 적수가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은 금물이지 않은가.
“서두르자. 물은 가면서 마셔.”
민구가 냄새의 허리를 툭 치며 앞질러 가자 냄새가 몸을 거하게 털더니 그를 잽싸게 따랐다.
철퍽, 철퍽.
푹, 푹.
바닥이 금세 진창으로 변한 바람에 민구는 물론 냄새조차 발소리를 쉽게 숨길 수 없었다.
‘아, 이미 와 있군.’
한동안 걷는 데 집중하던 민구의 시선이 발치로 옮겨 갔다.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서서히 기울더니 저 앞에 보이는 구리 시청을 정확히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때쯤 냄새도 수염을 실룩거리며 시청 방향으로 커다란 머리를 돌렸다.
그러곤.
* 먹어.
이렇게 물어 왔다.
“……뭐?”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냄새를 바라보게 된 민구.
다음엔 주변을 휙 둘러봤다.
당연히 근처에 음식 같은 게 떨어져 있을 리 만무했고, 그는 비로소 냄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됐다.
시청으로 복귀한 녀석들을 먹을 거라고 이야기한 거다.
“벌써 배가 고프냐?”
민구의 물음에 냄새는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 빗방울을 뿜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먹어야지. 대신…….”
민구의 표정이 구겨진다.
“반드시 먹기 전에 허락을 받아. 절대 말없이 식사부터 하면 안 돼. 지금은 회복이 필요한 상태니까 봐주는 거다.”
그가 경고하듯 냄새의 눈을 노려보자 녀석이 눈을 껌뻑이다 낮게 그르렁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자 민구가 다짜고짜 냄새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팍!
“대답해, 인마! 이게 장난 같으냐?”
이에 냄새가 전에 없는 흉포한 소리를 내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캬오오!
* 너……!
그러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뒤편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데, 이 순간만큼은 민구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냄새의 그 거대한 몸이 사라지더니 푸른 안광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방금 녀석이 한 짓은 후퇴가 아니라 공격 준비였다.
“…….”
확실히 맹수는 맹수.
하지만 자신이 여기에서 물러서면 냄새는 앞으로 사람을 식량으로만 보게 될 거란 걸, 민구는 잘 알았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성역의 사람들까지 먹이로 간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지금이야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끝나게 된다면…… 성역의 사람들이 인육을 섭취해 온 호랑이를 가만히 두려 할까?
무서워서라도 어떻게든 처리하려 들 거다.
“뭐 이 새끼야, 나도 먹어 보려고?”
민구가 작정하고 눈을 파랗게 빛내자 어둠 속의 냄새가 묵직한 울음을 흘렸다.
크르릉…….
그러다 끝내는.
텁.
두툼한 앞발을 그늘 바깥으로 내밀었다. 항복까진 아니지만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 가.
이번엔 냄새가 시청을 향해 앞장섰다.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민구는 냄새의 발자국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만약 정말 녀석과 사투를 벌인다면 이길 수 있을까?
정수야 이쪽이 40만 개 정도 더 많긴 하지만 상대는 호랑이다.
“…….”
민구는 조금 전 본 그 ‘전투태세’를 상기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냄새가 갑자기 뒤를 돌더니 입을 쩍 벌렸다.
크릉.
제법 위협적인 표정.
다만 녀석이 정수를 통해 번역한 대사는 의문문이었다.
* 먹어?
* * *
같은 시각.
창원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우는 일찍이 보호막을 널찍하게 펼쳐 두고 있었기에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내려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했다.
덕분에 가시로 꿰뚫어 죽인 자들이 흘린 피가 씻겨 나가게 됐으니 말이다.
쏴아아아…….
시야를 세로로 잘게 쪼개는 빗줄기.
7위 구원자 정미령은 정우의 손짓 하나에 사라져 버렸고, 이제 창원 광장에 남아 있는 건 수백의 민간인뿐이었다.
그것도 보호막 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해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방수 천막이 아니군요. 우리 것도 마찬가지일 텐데.”
먹먹한 마음으로 창원 시민들을 보던 용헌이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성역에도 방수 천막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곳에 전처 조선희가 있기에 하게 된 생각이었다. 용헌은 항상 선희와 그녀의 아기를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아, 천막도 방수 천막이 따로 있습니까?”
용헌에 비해 동훈의 목소리엔 감정이 거의 실려 있지 않았다.
대신 벌써부터 새까맣게 젖어들고 있는 창원 광장의 천막들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몇몇은 중앙 받침을 세우지도 않은 상태라 비가 고이고 있었는데, 저대로 두면 조만간 쓰러질 터였다.
“저…… 어떡할까요? 저번처럼 기술자들을 걸러 내면 되겠습니까?”
거창 지청 검사 김동호가 광장을 둘러보며 정우에게 물었고, 이에 창원 공장에서 근무하던 선임급 실무자도 한 명씩 살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비교적 공업 시설이 많이 보존된 지역이라 언젠간 여길 다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다.
“예, 알겠습니다.”
동호가 잽싸게 명을 받들었고, 곧 거창에서 가져온 확성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자, 다들 주목해 주십시오……! 우선, 직전 거주지가 창원이었던 분들부터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한때 3위 구원자의 참모였던 사내답게 그는 겁에 질린 민간인들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양 떼처럼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동호의 안내에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동안 정우는 패스파인더를 다시 살폈다.
그러자 정수 표식이 여전히 창원을 가리키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
혹시나 해서 아직 바닥에 있는 미령의 정수를 흡수하자 비로소 표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전히 정수 자체만 추적하는 거구나.’
이렇게 또 한 가지를 배운다.
스슷.
300만 개짜리 정수가 사라지자 패스파인더는 다음 목적지로 동쪽을 가리켰다.
김해 또는 부산 방향이었다.
“다 됐습니까?”
정우가 동분서주 중인 동호에게 묻자 그가 확성기를 끄고서 바삐 달려왔다.
“공장 실무자가 둘, 금속 가공 일을 하던 사람과 소아과 의사 하나가 있습니다.”
“소아과 의사……?”
의외라는 듯한 정우의 반응에 동호가 민간인 무리에서 조금 떨어뜨려 놓은 사람들을 슬쩍 가리켰다.
그리고 정말 그들 사이에 흰 가운을 입은 40대 여성이 하나 끼어 있었다.
굳이 가운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이 공동체에서도 의사 역할을 해 왔던 듯.
“소득이 있군요. 그럼 나머지는 정리하고 빠르게 떠납시다.”
“예. 예……?”
정우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탓에 동호는 별생각 없이 대사를 받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이미 정우의 팔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고, 곧바로 시퍼런 빛이 장내를 휩쓸었다.
파아아아앗!
“헉.”
이번 공격은 오랜 기간 정우를 보좌해 온 용헌과 동훈마저도 처음 보는 수준이었다.
한 번의 정수 방출만으로 지름 200미터짜리 광장을 남김없이 뒤덮었으니 말이다.
“맙소사.”
대성 그룹의 부산 본부장이었던 정겸도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손으로 포격을 해 대는 수준이 아닌가.
“산 사람들은 바로 헬기에 올라타십시오. 여길 떠날 거니까.”
정우의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백 개의 정수 구체가 일제히 튀어 올랐다.
팟, 파파팟.
이걸 장관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은 걸까? 나머지 일행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우가 ‘정수 밭’을 가로지르는 걸 지켜봤다.
“땅이 무슨 운석이 떨어졌던 자리처럼 파여 버렸네요. 경고를 위해 일부러 저러신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동훈의 대사.
이쪽이 여길 떠나 있는 동안 누가 창원에 함부로 자리 잡지 못하게 하려고 ‘영역 표시’를 한 게 아니겠냐는 말이었다.
“그,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셨을까요……?”
어느새 헬기 앞쪽까지 다가온 동호가 질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고, 용헌은 말없이 조종석에 올라탔다.
* * *
오후 5시 11분.
빗줄기가 한층 더 굵어졌다.
이제 정우 일행의 백색 헬기는 창원을 벗어나 김해시 외곽을 비행 중이었고, 여전히 소를 매단 채였다.
사위가 어둑해져서 헬기와 그 밑에 달린 ‘상두’의 실루엣도 뭉그러졌는데, 덕분에 멀리서 보면 무슨 외계 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두두두…….
빗소리 사이로 프로펠러의 회전음이 어지럽게 섞여 들려온다.
출입문마저 열어 둔 상태라 소음이 엄청났지만 다들 바깥을 내다보느라 귀가 아픈 줄도 몰랐다.
“이쪽도 진입로가 남아 있질 않군요.”
밖으로 고개를 길게 내민 동훈은 이렇게 말하면서 저 아래 보이는 김해시 전경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외곽지임에도 도시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마치 폭격이라도 당했던 것처럼 도시 군데군데 ‘빈 공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상당 수준의 정수 파동이 뿜어져 나간 흔적이었다.
게다가 조금 더 가자 수 킬로에 이르는 공터까지 나타났다.
진입로가 생성됐다가 폐쇄된 흔적이었다.
폐쇄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순위권 구원자가 여기에 머물렀던 것이다.
“창원보다 김해의 상태가 훨씬 안 좋군요.”
정우의 말에 묵묵히 바깥을 바라보던 권정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그렇습니다. 남부의 고단위 각성자들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당장 생각하기에 사람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지역으로 향한 거죠. 그러다 보니까…….”
“김해에서 마주쳤겠군요.”
“그렇습니다.”
정겸의 설명을 들은 정우는 어느 정도 당시 정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1일 차에 행운동을 정리하고 난 자신도 정수 수집을 결심하자마자 번화가부터 찾아 움직이지 않았던가. 이를테면 강남이라든지.
반면 상대적으로 인구수가 적은 타 지방의 각성자들은 더 많은 정수를 얻기 위해 근처 대도시를 타깃으로 삼게 됐던 거다.
‘그리고 남부의 대표적인 대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부산이었겠지.’
정우는 팔짱을 끼면서 생각에 잠겼다.
“부산 본부가 무너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입니까?”
이에 정겸이 착잡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2일 차 새벽부터입니다.”
“예.”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충 알겠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서울을 시작점으로 삼았던 정우가 대성의 서울 본부를 함락한 게 3일 차 아침이지 않은가. 부산 본부도 비슷한 시기에 도전자들과 싸우게 된 거다.
“정우 씨, 앞쪽을 보시죠.”
이윽고 용헌이 특이 사항을 알려왔다.
그리고 정우가 조종석의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번쩍!
푸른빛이 저 아래에서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또 팟, 하면서 정수 특유의 빛깔이 터져 올라왔다.
마치 땅바닥에서 번개가 치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뭐, 뭡니까?”
거창 검사 김동호가 기겁하며 헬기 안쪽으로 몸을 물렸고, 때맞춰 발판 밑에서부터 상두가 다급한 울음을 내질렀다.
* 많아!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