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65
167화. 귀빈(1)
* * *
‘어머니……?’
민구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사이, 청년이 조심스럽게 조명이 켜진 창고 출입문을 살폈다.
그런데 이때마저도 청년의 보호막은 돔형으로 펼쳐져 있었다. 수레에 탄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함일 터.
하지만 보호막은 면적이 좁을수록 내구도가 높아진다.
즉, 지금 청년은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안전을 크게 손해 보고 있는 셈이었다.
‘대단한 놈이군. 하기야 이런 세상에 부모마저 잃으면 더 살아갈 이유가 없겠지…….’
민구는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왜인지 슬픈 마음이 들어 표정을 굳혔다.
“…….”
우산을 든 채 그림자처럼 서 있는 민구와 청년의 거리는 10미터 안팎이었다.
따라서 민구는 상대의 정수량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154만 개.
‘허.’
이곳에 와서 본 각성자 중 가히 최고였다.
이런 녀석이 시청의 물물 교환 시스템에 순응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
아니, 어쩌면 순응이라기보다는 애써 봐주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시청에 놔두지 않고 직접 모실 정도의 효자인데 어떻게 시청의 민간인들을 해칠 수 있었겠는가. 그들도 모두 누군가의 부모고 자식인데 말이다.
‘물론 시청 사람들과 어머니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겠지.’
결국 이 세상에서 온전한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정우의 논리를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었다.
꾸득.
가슴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잿빛 감정들을 턱에 힘을 주는 것으로 내리누른다.
‘죽여야 해. 다른 방법이 없다. 154만 개면 이놈의 업보도 보통이 아냐.’
민구는 성역에서 중히 다루던 월권이니 뭐니 하는 것엔 사실 관심이 없었다.
대신 이 청년을 죽이지 않고 놔두면 이것이 그대로 후환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상대가 복수하러 돌아온다는 게 아니다. 정수 154만 개가 모자라서 죽을 상황이 언젠가 닥쳐올 거라는 거다.
슥.
고개를 슬쩍 돌리니 정수 180만 개짜리 호랑이가 어느새 일어나 있는 게 보였다.
이쪽이 공격할 생각을 않고 있어 잠시 대기하고만 있을 뿐인 거다.
‘난 230만 개. 이러면 질 리는 없겠고.’
민구는 전력을 확인한 뒤 창고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첩!
질퍽해진 바닥이 푹 꺼지면서 차진 소리가 났지만 빗소리가 이를 덮어 줬다.
그러나 창고 안쪽에서부터 뻗어 나온 불빛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
이때 청년은 마침 창고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민구가 움직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대뜸 정수를 뿜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민구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 봤다. 시청과 거래하던 사람인가 싶어 살피는 것이다.
구리시에서 자신보다 더 강한 자를 만난 적이 없기에 보일 수 있는 행동이기도 했다.
“누구십니까? 아무래도 처음 뵙는 거 같은데.”
청년은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수레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투를 대비해 보호막 면접을 좁히기 위해서였다.
이에 도리어 민구가 놀랐다. 너무 태연한 대응이었으니까.
‘뭐지? 지금쯤 냄새도 발견했을…….’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어나 있던 냄새가 온데간데없었다.
‘아.’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민구는 착잡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20대 후반 정도 될 것 같다. 몸이 제법 다부졌고 인상도 우직한 편이었다.
세계가 이렇게 되기 전만 해도 성실하고 평범한 녀석이었을 터.
“무슨 일이니?”
이윽고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수레 속의 여자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끼릭.
수레바퀴가 흔들리는 걸 보니 바깥으로 나오려는 듯.
“아, 아뇨! 잠시……!”
이걸 본 청년이 황급히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수레의 가림막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첩!
끝내 운동화가 신겨진 여자의 발이 진흙탕에 닿았고, 곧이어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호한 소리가 쏘아져 나왔다.
“헉……?”
그리고 이 소릴 들은 민구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을 웅크린 채 마차 뒤로 접근하던 냄새를 보고 만 거다.
“겨, 경준아……!”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고, 같은 순간에 민구의 팔도 허공을 갈랐다.
홰액!
‘……거지 같군.’
그는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하며 정수 실이 청년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걸 봤다.
츠츳!
아주 날카로운 마찰음이 나며 돔형 보호막과 수레가 가로로 잘려 나갔으나 정작 사상자는 없었다.
민구가 청년을 단숨에 죽이려고 한 탓이었다. 목을 노리고 실을 휘둘렀기에 절단 지점이 너무 높았던 거다.
여자는 청년보다 키가 한참 작았기에 애초에 공격 범위 바깥이었고, 청년도 어머니를 살피기 위해 상체를 옆으로 수그리던 순간이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엉겁결에 민구가 살의를 가졌다는 걸 확인하게 된 청년은 대번에 악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이 모든 각성자, 아니 모든 생존자의 본래 얼굴.
정성껏 개조했을 수레는 볼품없이 망가졌고, 청년의 어머니도 극도의 패닉 상태가 되어 제자리에 뻣뻣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냄새의 푸른 안광이 나타났다.
민구는 씁쓸한 마음으로 실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이번엔 무조건 유효타를 낼 생각으로 사선을 그렸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청년이 민구의 팔 동작을 보고서 실의 궤적을 꿰뚫은 것이다.
타앗!
실이 생성되기 직전 녀석의 몸이 허공을 향해 튀어 올랐으므로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놈.’
어머니를 지키려는 의지가 극한의 잠재력을 끌어낸 걸까? 아니면 본래부터 대인전의 명수?
어찌 됐든 청년은 두 번째 공격을 완벽히 피해 냈고, 이미 상당량의 정수를 소모한 민구는 곧장 수세에 몰리게 됐다.
‘아, 이건 좀 아닌데.’
지금이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청년은 물체화를 이용한 근접전이 특기인 것 같았다.
정수를 뿜는 대신 시퍼런 칼날을 뽑아 든 채 민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차 쪽에서 끔찍한 소리가 나지만 않았더라도 민구의 목이 먼저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까드득!
마치 호두를 통째로 짓뭉개는 것 같은 소리.
문제는 거친 빗발을 뚫고 고막을 울릴 정도로 큰 울림이었다는 거고, 근방에서 이런 소리를 낼만 한 건…….
“아……!”
굳이 보지 않아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던 민구가 먼저 탄식을 흘렸고, 이에 청년도 흰자위를 번득이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보게 됐다.
커다란 호랑이의 입 바깥으로 삐져나온 어떤 여자의 하체 말이다.
“아아!”
실성한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청년은 여전히 민구 앞에서 뒤를 돌아본 채였다.
그래서 지금 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는 건 냄새가 유일했다.
크릉.
마침내 냄새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여자의 상체를 뱉어 냈다.
“아…….”
민구는 그 장면을 보면서 시야가 빨갛다고 생각했다.
시체에서부터 흘러나온 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친 빗줄기 덕에 핏물은 빠르게 희석됐다. 그럼에도 분명히 시야가 붉었다.
민구는 한동안, 아니 어쩌면 평생 이 장면을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으아아아!”
청년은 민구를 놔둔 채 냄새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냄새의 정수 총량은 180만 개. 청년보다 30만 개 정도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
민구는 찰나의 고민 끝에 팔을 다시 휘둘렀다. 얼마 남지 않은 정수를 짜낸 공격이었다.
그러나 충분한 공격이기도 했다. 지금 청년의 몸엔 한 올의 보호막도 감겨 있지 않았으니까.
코앞에서 날아든 정수 실을 피해 내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팟.
결국 청년은 세 번째 공격에 몸을 내주고 말았다.
왼쪽 허벅지의 중간 지점에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가 사선으로 잘렸고, 곧 상하체가 분리되며 기묘한 형태로 무너져 내렸다.
“끄아……!”
분한 듯한 신음.
하지만 냄새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청년의 머리를 앞발로 찍어 눌렀다.
콰작!
운반 사고가 난 수박 같다.
민구는 청년의 머리통 또한 빗물에 밀려 흩어지는 걸 보며 입술에 힘을 꽉 줬다.
그러곤 냄새를 향해 무의미한 말을 쐈다.
“허락부터 받으랬잖아.”
이번은 맞지 않는 경우임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었다.
엄밀히 말해 방금 냄새는 여자와 청년을 식량으로 삼은 게 아니라 공격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냄새는 민구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신 행간을 건너뛰었다.
* 그럼. 넌. 죽어.
* * *
오후 5시 30분.
성역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1시간 가까이 비가 계속 내리면서 온 사방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거주 지역으로 쓰고 있는 구역의 평탄화 작업이 가장 급했고, 그다음은 성역 구석에 만들어 둔 ‘최초의 변소’에 대한 확장 작업을 해야만 했다.
“시불, 하필 이런 때에.”
성역의 시설 관리자이자 변소의 설계자이기도 한 주영재가 해초처럼 변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걱정스러운 빛을 담은 그의 두 눈은 멀찍이 보이는 변소에 닿아 있었다.
수로를 다 만들기도 전에 장마가 시작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변소의 지대가 거주 지역보다 낮아서 웬만해선 구정물이 역류하지 않을 거라는 점일까.
정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만에 하나 변소에서 사달이 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덕분에 일대 토지가 비옥해져서 훗날 농사를 짓기 좋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차피 변소에 모인 것들을 비료로 쓸 계획 아니었는가.
“…….”
영재는 여기까지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다들 손이 보이지 않게 일하시오. 오늘 밤 똥물 근처에서 자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건 전직 농촌 정책 국장인 박태휘의 목소리.
그는 잘 발달된 팔뚝으로 삽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다른 작업자들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아주 간만에 울린 굉음이 모두의 동작을 멈추게 만들었다.
쿵!
대포를 연상케 하는 경고음.
외부인이 성역에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이에 셔츠 차림으로 삽질을 하던 선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중성도 그의 옆에서 작업 중이었는데, 경고음이 난 방향이 북쪽인 걸 확인하고선 명일을 호출했다.
“명일 씨! 선웅 씨 좀 도와주십시오.”
현장에 같이 가서 상대의 정수량 확인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아직 구원자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이에 명일이 기다렸다는 듯 삽을 내려 두고서 바쁘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때 선웅은 이미 셔츠 단추를 다시 바로 채우면서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곧 이상한 걸 보게 됐다.
경고음이 났던 방향의 보호막이 일렁이고 있던 것이다.
이건 성역에 들어왔던 자가 도로 밖으로 나갔음을 의미했다.
그러더니.
쿵!
또 침입 경고음이 울렸다.
‘뭐지? 경계면에서 들락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건 대개 한 가지 경우였다. 외부자가 상당량의 정수를 가진 각성자인 거다.
정확히는 성역에 자리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오로지 정수를 노리고 온 약탈자인 경우.
“뭐지요? 한 사람이 저러고 있는 거죠?”
잽싸게 선웅의 뒤로 따라붙은 명일이 북쪽 경계면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선웅이라고 해서 눈으로 보지 않고 알 방법이 있겠는가. 그는 그저 정수 청구량을 얼마로 설정해야 할지 고민 중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경계면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고음의 빈도로 짐작했듯 이번 외부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황금빛 보호막을 몸 중앙에 둔 채로 안쪽에 발을 들였다 빼길 반복하고 있었는데, 선웅과 명일이 다가오는 걸 보고서 얼른 몸을 물렸다.
상대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꽤 고된 삶을 살아왔는지 피부가 매우 검고 거칠었고, 뺨과 목 근처엔 심각해 보이는 흉터까지 있었다.
빵빵해 보이는 배낭을 메고 있었으나 이게 사내의 유일한 짐이었기에 가진 게 많진 않은 편이었다. 지금까지 만나 본 다른 외부자들에 비해서 말이다.
“뭔가 좀 언밸런스하네요.”
선웅이 왜인지 모를 위화감에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사이, 그의 눈이 되어 주고 있던 명일이 슬그머니 뒷걸음질했다.
“서, 선웅 씨.”
“……?”
몹시 경직된 명일의 음성에 선웅이 고개를 갸웃하자 보호막 바깥의 사내가 방긋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여긴 웬 피라미들이 보초를 서나? 그나저나 그 새끼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