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66
168화. 귀빈(2)
‘그 새끼……?’
선웅은 직감적으로 이 사내가 말하는 사람이 정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 외부자와 정우가 무슨 관계냐는 것일 터.
그러나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옆에 바짝 선 명일의 반응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유, 유, 육……!”
명일은 한 음절조차 제대로 뱉어 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명일 씨! 진정해요! 우리가 저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선웅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슬그머니 금빛 보호막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 이 보호막이 완벽한 안전을 보장할까? 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선웅 역시 눈앞의 사내에게 은연중 겁을 먹은 탓이었다.
‘제기랄.’
이 나라에서 유일한 성역의 관리자이자 최상위 구원자의 대리자.
선웅은 자신의 역할에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방금 느낀 감정에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이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존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정수량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학살자의 자질이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박정우에게서만 엿볼 수 있던 어떤 기운이, 이 사내에게서도 여실히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북의 1위구나. 벌써 여기까지…….’
비로소 결론을 내린 선웅은 무거운 침을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외부인’이 여유 가득한 얼굴로 선웅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의 머리 위에 붙은 ‘대리자’라는 문구로 시선을 옮겼다.
“놈이 여기 없나 보군. 아니면 아직 한참 약하거나.”
“…….”
최상급 구원자들은 왜 하나같이 통찰력이 좋은 걸까.
선웅은 사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명일의 상태를 살폈다.
“명일 씨, 뒤로 더 물러서요. 만약 이 안으로 들어오면 제가 바로 처리할 테니까.”
이렇게 말하는 선웅의 목소리엔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남한 최강자의 정수를 빌려 쓸 수 있다지만, 본질적으론 ‘대리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숱한 전투와 극한 상황을 직접 거쳐 온 박정우를 완전히 카피할 순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 육천만 개입니다. 육천만요…….”
명일이 힘겹게 쏟아 낸 대사가 선웅의 막연한 희망마저 으깨 버렸다.
“뭐라고요……?”
황급히 허공의 어딘가로 향하는 선웅의 시선.
그는 대리자이기에 볼 수 있는 정우의 정수 총량을 읽고 있었다.
[0/37,911,580] [00:00]3,790만 개.
이것만 해도 정말 무시무시한데, 눈앞의 사내가 6,000만 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건 단지 유례없는 강자가 찾아왔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박정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성역에,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서.
‘정말 육천만 개면…….’
북한의 인구수는 대략 2,500만 명.
그러니 이 사내의 몸 안에 북의 정수 대부분이 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헙!”
뒤늦게 상대의 ‘부피’를 체감한 선웅이 눈을 크게 떴고, 때맞춰 그의 횡경막이 경직됐다.
다음엔 숨이 콱 막히면서 딸꾹질이 나올까 말까 하는 것 같은 현상이 이어졌다.
“끕, 끕!”
선웅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뒷걸음을 치자, 명일이 잽싸게 허리춤에서 붉은색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타앙!
하늘을 향해 조명탄을 쐈다.
의료진을 부르는 긴급 신호였다.
비가 궂게 내리고 있어 불빛이 금방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확인했을 터였다.
“오.”
제법 체계가 있어 보였는지, 보호막 바깥의 사내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심지어 격발로부터 몇 초 만에 의사들이 출동을 시작했고, 이 모든 과정을 관람한 사내는 조용히 정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억!”
이를 본 명일이 기겁하며 그만두라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상대가 멈출 리 없었다.
취아아아앗!
금빛 보호막을 횡으로 가르는 청색 궤적.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성역을 감싼 보호막엔 자그마한 균열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래 봬도 지구가 보증한 안전지대 아니던가.
“하기는.”
사내는 짤막한 감상을 내뱉은 뒤 거대한 돔을 이루고 있는 보호막을 천천히 둘러봤다.
무슨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말이다.
“어딥니까?”
그사이 중성과 의료진이 숨을 헐떡이며 현장에 도착했고,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인 선웅과 정체불명의 외부자를 보게 됐다.
“……?”
선웅이 그랬던 것처럼 불청객에게서 섬뜩함을 느끼는 중성.
반면 의료진은 바깥에 누가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일시적인 쇼크 증세라 사실 대단한 처치가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른 자도 아닌 북의 1위 구원자 앞에서 성역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지 않았는가.
이곳이 어떤 곳이고 어떤 자원들이 모여 있는지. 그리고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까지.
“생각보다 훨씬 감상적인 놈이었군.”
이윽고 사내가 또 한 차례 방긋 웃으며 비장미 넘치는 의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정작 사내가 말한 ‘감상적인 놈’은 의사들이 아니라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우를 의미했다.
이에 명일은 속으로 경악했다.
‘우리에겐 아예 관심이 없구나.’
정확히는 사고(思考)를 할애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봐야 할 거다.
방금 성역의 운영 방식을 봤으면서도 문장의 주체로 박정우를 끌어오지 않았는가.
보통의 구원자 같았으면 이런 인재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에 큰 흥미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성도 명일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사내를 극도로 경계했다.
“……성역에 볼일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들어와서 말씀 나누시죠.”
중성이 이렇게 말했으나 사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중인 대리자, 선웅을 바라봤다.
“놈이 이곳에 자주 오진 않을 테고. 지금쯤 어디에 있으려나.”
“…….”
이 말을 들은 선웅은 찰나에 수십 번도 더 고민했지만 결론은 한 가지뿐이었다.
‘정우 씨를 이놈과 만나게 해선 안 돼.’
긴급 상황의 경우 44개 청구.
북의 1위가 나타나면 11개 청구.
따라서 선웅은 당장이라도 정우를 불러낼 수 있었으나, 끝내 단 하나의 정수도 청구하지 않았다.
‘정우 씨가 남부에서 엄청난 소득을 얻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이대론…… 다 끝이다.’
그가 우직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자 놈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자신의 발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패스파인더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 성역의 인물들이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모든 주민이 성역 안쪽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 아버님.’
선웅과 중성, 명일의 표정까지 연달아 굳자 뭔가를 느낀 사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누가 있지? 이 근처에.”
“…….”
당연히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내는 이미 직감한 것 같았다.
스윽.
이윽고 놈이 무작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북으로 다시 올라갈 리는 없으니 이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이라곤 동, 서, 남까지 세 가지뿐.
대략 33% 확률로 민구와 냄새를 찾아낼 수 있는 셈인 거다.
“흐흠.”
중성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무언의 경고를 했다.
이놈이 하는 행동에 절대 동요하지 말라는.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만 해도 일곱 명이나 됐고, 끝내 한 사람이 실수를 하고 말았다.
휙.
사내가 갑자기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반사적으로 날숨을 팩, 하고 뱉고 만 거다.
“아아.”
결국 사내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남양주의 서쪽…… 구리시.
‘낭패다. 지금은 아버님에게 경고할 방법도 없는데.’
당황한 선웅은 보호막의 경계면에 몸을 바짝 붙였으나, 차마 바깥으로 몸을 내밀진 못했다.
대번에 서쪽으로 걸음을 뗀 사내를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 * *
한편 민구는 그 나름대로 모종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청으로 찾아오는 각성자들을 해치울 때마다 북한 내 순위가 급격하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현재 민구의 정수 총량은 3,190,221개.
그런데 그의 순위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민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문구를 몇 번씩 다시 읽었다.
| 인간, 박민구 님의 지역 내 순위는 ‘5’입니다.
5위.
제자리에서 방문자만 몇 해치웠을 뿐인데 북의 순위권자가 되어 있었다.
어째서일까? 북의 순위권 허들이 남한보다 훨씬 높다는 건 일찍이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300만 개로 5위라니.
‘설마.’
민구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현실’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기존 순위권자들이 죄다 도륙 당했다는 의미밖에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순위권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야 하단에 또 다른 문구가 번쩍거렸으니까.
「소속 지역의 모든 진입로가 폐쇄되었습니다. 전이를 결정하십시오.」
‘뭐……?’
민구는 멍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6시.
그러니까 4일 차의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북한의 모든 진입로가 닫힌 것이다.
그리고 민구는 북한 소속의 구원자였기에 정우조차 아직 갖지 못한 전이 기회를 얻게 됐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거다.
크릉.
* 왜. 그래.
민구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허공을 계속 응시하고 있자 냄새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민구는 처음 보는 상위 차원의 시스템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이 – 잔류와 파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십시오.」
| 잔류
소속 지역에 잔류합니다. 잔류 기간 동안 지역 내 모든 정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 전이 재선택이 가능합니다.
| 파견
진입로가 남은 타 지역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파견된 지역의 진입로가 모두 폐쇄되기 전까지는 전이 재선택이 불가능합니다.
“맙소사.”
민구의 입에서 혼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안내 문구를 계속 읽고 있을 순 없었다.
한동안 얌전하다 싶던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핑그르르 돌더니 동쪽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
동쪽은 다른 곳도 아닌 성역의 방향이었고, 민구가 알기로 저쪽에서 표식이 가리킬 만한 각성자가 올 수는 없었다.
같은 성역 소속의 인물이라면 애초에 패스파인더가 인지할 리 없고, 외부자라면 성역 선에서 어떻게든 처리를 했을 테니까.
예측 범위 밖의 일이 자꾸 일어난다.
민구는 짙은 불안감에 휩싸인 채로 동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잠시 뒤 냄새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를 드러내며 자세를 낮췄다.
사나운 빗속에서도 용케 누군가 접근 중이라는 걸 감지한 거다.
“이번 녀석까지만 처리하고 일단 복귀해야겠다. 감이 안 좋아.”
민구는 이렇게 말하며 가림막이 박살 난 수레를 흘깃 쳐다봤다.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던 어느 청년 각성자의 유산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
저 멀리 빗줄기 사이로 거뭇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큼지막한 배낭을 멘 어떤 사내.
여느 강자가 그렇듯 혼자였고, 민구는 이 사실에 몹시 긴장했다.
하지만 상대가 바로 북의 1위일 거란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놈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엉뚱한 놈이군. 넌 누구냐?」
세찬 빗소리를 뚫고서 고막, 아니, 머릿속에 바로 들이박히는 듯한 기묘한 음성.
목소리에 정수를 실어 보낼 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민구로선 난생 처음 들어 보는 것이기에 이게 정확히 어떤 경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꿰뚫어 봤다.
“……냄새야, 우리 적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