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69
171화. 귀빈(5)
오후 6시 42분.
김해 상공의 헬기 안.
용헌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앞으로 1시간 정도 비행할 수 있습니다.”
“김해에서 1시간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남은 연료가 그것뿐이라는 뜻인가요?”
정우가 되묻자 용헌이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1시간 치 연료밖에 안 남았습니다. 부산까지 가려면 슬슬 준비해야 합니다.”
김해에 더 머무르다간 부산까지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물론 진짜 문제는 연료를 못 구하면 헬기를 버려둔 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그렇군요. 어차피 웬만큼 정리한 것 같으니 저기만 처리하고 부산으로 갑시다.”
정우는 이렇게 말하며 전방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새 날이 한밤중처럼 어두워져서 시내 전경이 까만 도화지처럼 보였는데, 이 와중에도 정수 방출 특유의 푸른빛은 눈에 잘 띄었다.
팟!
빛이 번쩍일 때마다 주변 건물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보아하니 제법 큰 빌딩 하나를 사이에 낀 채 교전 중인 것 같았다.
“…….”
용헌은 입술에 힘을 꽉 주며 조심스럽게 교전지로 비행했다.
사실 그의 조종 실력으론 이런 악천후에서 시가지 착륙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것도 헬기 밑에 소를 한 마리 매단 채로 말이다.
그러나 정우에겐 굳이 헬기가 착륙하지 않아도 교전 지역에 난입할 능력이 있었고, 덕분에 용헌은 고층 빌딩에 헬기를 들이박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됐다.
능력 있는 상사를 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용헌은 난이도 극악의 착륙지들을 눈으로 훑으며 모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바로 밑일 겁니다. 좀 더 내려갈까요?”
용헌이 교전지 근처에서 헬기를 활공시키자 정우가 바깥을 슬쩍 내다보며 짧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신호하면 내려와요.”
신호라는 건 정우가 정수 창 세 개를 연달아 상공으로 던지는 행위를 말한다.
김해를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다 보니 이착륙을 너무 자주하게 돼서 아예 신호를 정한 것이다.
또한 헬기가 못해도 상공 50미터에서 대기한다는 걸 고려하면 웬만한 각성자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짓이라 거짓 신호에 착륙할 걱정도 없었다.
현재 정우의 정수 총량은 40,182,360개.
부산으로 향하는 길목답게 각성자가 많아서 소기 목적인 4천만 개를 달성했지만 헬기 연료 효율을 따져 보니 썩 유쾌한 거래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부산에서 연료를 구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
헬기 관리 의무가 있는 용헌이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는 사이, 정우가 기체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팍!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출격 장면.
기내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잡종견, 올빼미는 물론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한우 ‘상두’도 정우가 자신의 곁을 스쳐 가는 걸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있는 건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아아아앗!
어마어마한 파공음이 귓가를 스치고 있음에도 육안으론 지상과의 거리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위가 한밤처럼 깜깜해진 데다 빗줄기마저 거세게 내리치고 있어서였다.
‘……꼴사나워지겠네.’
그래도 이전에 수차례 강하를 해 본 적이 있는 정우였기에 체감상 ‘착륙’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파앗.
그는 재빨리 정수의 반을 보호막에 붓고, 나머지 반으론 신체 강화를 했다.
그러자 곧바로.
콰자자작!
귀가 뜨끔할 정도의 굉음과 함께 정우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교전지 근처의 어느 건물 모서리를 몸으로 들이받은 거였다.
제법 소란스러운 착륙이었기에 그가 등장하자마자 근방의 정수 방출이 멎었다.
그러곤 한동안 빗소리와 저 위에서부터 아련하게 들려오는 프로펠러 회전음만이 장내를 채웠다.
투드득.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정우.
“으…….”
우스꽝스럽게 구겨진 몸을 일으키자 그를 깔아뭉개고 있던 건물 잔해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또 한번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장 시퍼런 정수 파동이 날아들었다.
발원지를 봤다 싶을 때쯤 온 시야가 파랗게 변했으니 아마도 정면 어딘가에서 날아온 것이리라.
츠츠츠츳!
보호막을 두른 전신에 정수 마찰로 인한 희끗한 균열이 생겼지만 정우는 그걸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저리 좀 비켜 달라는 듯 손을 슬쩍 휘둘렀다.
슥.
그러자 전방 20미터를 부채꼴로 덮어 버릴 수 있는 초대형 파동이 위치 불명의 상대를 찾아 뿜어져 나갔다.
화아아아악!
범위가 범위인 만큼 상대에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죽거나, 위치를 드러내며 회피 기동을 하거나.
결국 상대는 후자를 택했다. 몸을 파랗게 빛내면서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팟!
그리고 이건 정우가 기다리던 선택지이기도 했다.
‘몸으로 막아 낼 배짱까진 없는 걸 보니…… 잡어군.’
스윽.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큰 동작.
오른팔을 뒤로 크게 뺀 뒤 전방으로 튕기듯 휘두르자 아마도 김해의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일 수준의 정수 창이 쏘아져 나갔다.
쐐애애액!
고밀도로 물체화된 정수인 만큼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발했고, 덕분에 잠시나마 주변이 환해지면서 모든 걸 드러냈다.
모든 광경을 세로로 갈라내고 있는 빗줄기.
정우가 착륙하면서 박살 낸 4층짜리 상가 건물.
도로변에 드문드문 보이는 누군가의 손발 일부까지.
그러다 마지막에 한 가지를 더 보여 줬는데, 그건 다름 아닌 또 다른 각성자였다.
정우를 공격한 자와 조금 전까지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녀석 말이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웬 놈이 떨어지기에 뭔가 싶어 와 본 걸 거다.
그런데 이 불청객이 무지막지한 퍼포먼스를 뽐내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
실제로 녀석은 더없이 당황한 얼굴로 시퍼런 살인 현장을 보고 있었고, 그사이 정우의 정수 창이 허공으로 도약한 각성자를 꿰뚫었다.
푸아아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쇄골 위쪽이 깔끔히 지워진 시체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죽은 사내의 체중은 96킬로나 됐지만 정우와 또 다른 각성자는 그가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여전히 빗소리가 거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빗줄기들은 자비롭게도 마지막 각성자의 발소리마저 숨겨 줬다.
정수 창이 저 멀리 사라지자 사위가 다시 어두워졌고, 놈은 이때를 틈타 미친 듯이 달렸다.
그에겐 이게 사태 발발 이후 두 번째 도주였다.
첫 도주는 천 단위 각성자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동생과 함께 산속을 헤매다 개 떼와 마주쳤고, 놈들의 눈이 하나같이 푸른 걸 봤다.
그래서 달렸다.
그러곤 끝내 뒤처진 동생을 잃었다.
그러나 이번엔…… 뒤에 남길 그 누구도 없다.
촤아아악!
“…….”
이윽고 육중한 정수 창이 자신의 곁을 지나가며 환한 빛을 뿌렸을 때, 사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이쪽과 호각으로 다투던 상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던 그 순간 이미 정해진 일이기도 했다.
불가항력.
사내는 뒤편에서부터 엄청난 기척이 느껴지기에 아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쉬아아아앗!
시퍼런 궤적이 시야를 사선으로 비껴갔고, 곧이어 몸의 왼편이 통째로 찌그러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커헉!”
아까 그 사람처럼 단숨에 지워질 줄 알았던 사내는 예기치 못한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그런데 몸의 균형이 이상했다.
“……?”
왼팔의 감각이 없어 그쪽을 바라보니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하다 이내 사라졌다.
그러더니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기묘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잘려 나간 왼팔이었다.
“어……!”
사내가 울먹이는 소리를 내자 여전히 칼날을 빼 든 채인 정우가 싸늘한 목소리로 통보했다.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면 바로 죽여 주마. 아직 세 곳 정도는 더 자를 시간이 있어. 많이 해 봤으니 장담하지.”
* * *
오후 6시 50분.
평소 같았으면 성역으로의 복귀를 준비할 시점이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일과가 아직 한창이었다.
김해를 떠나 부산에 도착한다고 해서 모든 임무가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제 50분 정도 더 날 수 있는 거지요?”
거창 검사 김동호가 조종석에 얼굴을 들이밀며 아주 은밀히 물었으나 헤드셋을 찬 채였기에 짐승을 제외한 모두가 이 소릴 들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용헌은 특별히 해 줄 말이 없어서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 헬기는 목장 주인 정택과 대성의 부산 본부장 정겸, 그리고 동물 각성자인 봉남과 상두의 것까지 해서 총 네 겹의 보호막을 두른 채 활공 중이었다.
따라서 지금 헬기의 보안엔 큰 문제가 없었다. 연료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 외에는 말이다.
“부산 본부…… 아직 남아 있긴 하지요? 혹시 거기 말고 연료를 구할 데가 더 있겠습니까?”
용헌이 뒤를 돌아보며 묻자 정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까운 곳은 김해 공항이겠지만 거긴 가장 먼저 살인이 벌어진 곳이라 뭐가 남아 있지 않을 거요. 부산 본부도 마찬가지고.”
“……?”
한때 부산 본부를 총괄하던 남자의 답변에 용헌이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립니까? 본부에도 연료가 없다니?”
“요원들끼리 전쟁을 치렀던 곳인데 어떻게 건물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만약 부산에서 연료를 구하지 못하면…….”
용헌은 뒷말을 삼켰다. 만에 하나 정말 그렇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였다.
일단 헬기는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곳에 숨겨야 할 것이다. 사실상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그다음은 사람, 아니 엄밀히 따지면 정우를 제외한 모든 일행이 문제다.
정우야 천만 단위 각성자라 직접 달려서라도 남부와 그 외 지역을 훑어볼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특히 민간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정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지 않은가.
‘정말 헬기가 멈춰 버리면 정우 씨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용헌은 무거운 침을 간신히 삼켰다.
결코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몰랐다.
“…….”
용헌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조종석 유리창을 멍하니 보고 있자 정겸이 헛기침을 하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알겠소? 내 가치를.”
이에 용헌이 조금 화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아, 너무 낙담하지 마시라고.”
정겸은 이렇게 말하고선 부산이 있는 동쪽을 지그시 바라봤다.
“약아 빠진 놈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보험을 들어 두거든.”
“……?”
용헌이 똑바로 좀 말해 달라는 표정으로 쏘아보자 그제야 정겸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부산 어딘가에 임원진들을 위한 비밀 대피소가 있소. 그리고 그 위치는 여기서 나만 알고 있지.”
“비밀 대피소요?”
대성에서의 직급이 부장에 불과했던 용헌으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벙커에 준한다고 봐야 할 거요. 헬기는 이미 누가 몰고 갔거나 불탔을 것 같지만 연료는 지하에 보관해 놨으니 그대로 남아 있겠지.”
“맙소사.”
용헌은 정겸의 말에 모종의 희열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꼈다.
“오……. 정말 벙커 수준이라면 거길 임시 숙소로 써도 되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동호가 슬쩍 껴들며 간만에 밝은 얼굴을 해 보였다.
본래대로라면 정우가 시간을 아껴야 하니 부산 길바닥에서 밤을 보내자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겸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실룩였다.
“소까지 들어갈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뭐 꼭 침대가 필요하진 않을 테니 충분할 거요.”
“오오.”
긍정적인 답에 동호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마주쳤으나 이내 정겸이 뒷말을 붙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물론 이 그룹에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지만.”
“그게 뭡니까?”
그새 다시 울적해진 동호의 얼굴.
정겸은 그런 그를 우습다는 듯 바라본 뒤 입술을 움직였다.
“임원진을 위한 대피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누가 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요.”
그리고 이때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봉남이 짧게 짖었다.
왈!
이에 모두의 시선이 봉남을 따라 헬기 측면으로 옮겨 갔고, 곧 연달아 솟구치는 세 발의 정수 창을 보게 됐다.
김해를 떠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