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71
173화. 귀빈(7)
* * *
1위가 부산에 있다……!
무려 1위 본인이 밝힌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물론 예전처럼 최상위 구원자를 잡기 위해 연합이 생길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만한 야망을 가진 자들은 일찍이 다 죽었고, 지금은 엉겁결에 순위가 올라 버린 기존 하위권자 또는 2번 채널에서 승격한 자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반응 또한 지난 세대에 비해 형편없었다.
[15] 청하 : 1위? [37] 초우 : 1위 닉네임이 인간이에요? [28] 오이도 : 헉? [41] 모래알 : 누구한테 멀었냐고 묻는 거죠? [33] 태호 : ……2위겠죠.그나마 이 채널에 비교적 오래 있던 자들은 현실적인 고민부터 했다.
누가 됐든 저 만남에서 살아남은 자가 자신이 머무는 지역으로 올까 봐 미리 연막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21] 기사도 : 이러면 부산은 피해야겠는데요. 그나저나 지금 진입로가 어디 어디 남았죠? 일단 전북 쪽엔 없습니다. [11] 빛 : 충남도……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6] 검 : 대구를 지날 때 진입로 표식이 기우는 걸 본 것 같은데.6위, 검이 은근슬쩍 진입로의 위치를 흘린다. 누가 봐도 녀석의 현재 위치는 대구 근처였다.
심지어 대구는 부산과 그리 멀지도 않은 도시.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검’은 전력을 다해 대구를 벗어나고 있을 거다.
“…….”
그리고 대구, 부산과 인접한 또 다른 도시의 누군가도 이 북새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울산을 초토화하고 잠시 휴식 중이던 2위 구원자.
정경호, 39세 남성. 채널 닉네임은 ‘폭우’.
“러브콜이네.”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달리 경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1위가 부산에 와 있다는 건, 명백히 이쪽을 쫓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러브콜이라니요?”
그의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젊은 사내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어 왔다.
이 사내의 이름은 김상철. 경호의 처남이었다.
현재 위치는 울산 대학 병원.
두 사람은 잠시 담배를 위해 1층 로비로 나온 상태였고, 조만간 5층의 회복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 갓 출산을 마친 경호의 아내가 있었으니까.
“1위. 지금 부산에 있다고 하네. 좀 보자는데.”
경호가 담배를 길게 빨며 여전히 궂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자 상철이 눈을 크게 떴다.
“예? 부산이면…….”
바로 이 뒤편 아닙니까, 라는 뒷말이 더 붙어야 했으나 상철은 입을 다물었다.
“이만 됐다. 올라가자.”
이윽고 경호가 로비 바깥으로 담배꽁초를 튕겨 내며 처남의 어깨를 툭 쳤다.
* * *
출산.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생명을 이 세상에 내어놓는 일.
그러나 그 일을 위해 수천, 수만의 생명을 해치게 될 줄은 경호도 몰랐다.
약 4일 전.
지구 폐쇄가 시작됐을 당시의 일이다.
티잉!
안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경호는 마루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가 보니 알루미늄 재질의 물컵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아내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고 있던 때였기에 경호는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결혼 4년 만에 찾아온 첫 아이.
하지만 그 시작은 평소의 상상과 달리 전혀 설레지 않았다. 오히려 두렵고 무서운 마음부터 들었다. 창밖의 밝은 햇살마저 기묘하게 느껴진다.
경호는 곧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연차를 내고 근처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아내는 뒷좌석에 머무는 내내 경호로선 가늠할 수 없는 형태의 통증에 시달렸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실전’은 상상과 전혀 다르다.
경호는 여태 해 온 시뮬레이션이 하등 쓸모없었음을 절절히 느끼며 차가 신호에 걸릴 때마다 그새 축축해진 운전대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러다 마침내 도착한 경기도 모처의 산부인과.
로비에 차를 들이박을 듯 급하게 정차한 그는 곧바로 뒤를 돌아 아내를 살폈다.
그리고 이때 그의 시야가 가려졌다.
「주민 여러분,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우주에 의해, 제 수명이 다 되었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지금부터 42일에 걸쳐 행성 폐쇄 절차가…….」
뭐, 이 씨발.
문구를 보자마자 경호가 속으로 뱉은 첫 대사.
그는 괴상한 문구로 시야가 가려진 와중에도 용케 뒷좌석 문을 열고 아내를 부축했다.
이때 아내 역시 지구의 성명문을 보고 있어 극도로 놀란 상태였는데, 그래서인지 하체의 경직 수준이 겁이 날 정도였다.
달달달…….
경호는 목덜미와 턱을 거칠게 떨어 가며 아내를 병원 안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난데없이 그의 삶에 개입한 문구, 아니 지구는 아내를 돕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삐이……!
설문의 시작을 알리는 위협적인 경고음.
탓.
경호는 끝내 아내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을 느꼈다.
두두두두!
겁에 질린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원 로비를 가로질러 나오고 있던 것이다.
“……?”
경호는 이들의 머리맡에 붙은 숫자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크게 외쳤다.
“잠깐! 다들 어딜 가는 거야? 여기 환자가……!”
* * *
오후 7시 24분, 울산 대학 병원 5층.
알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가운 차림의 사내가 경호를 맞이했다.
“경과 보고를 드릴까요? 큰 특이 사항까지는 없습니다만…….”
처진 눈초리가 특징인 42세 남성, 박규영.
경호가 수도권에서부터 남단까지 가로질러 오며 겨우 찾아낸 산과 전문의였다.
아내의 진통이 시작된 그날부터 경호가 강박적으로 ‘출산 준비’를 해 온 결과 중 하나기도 했다.
길바닥에서 아이를 낳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아주 독하게 만들었으니,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살생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됐습니다. 곧 떠나야 할지도 몰라서 잠깐 얼굴만 볼 생각이니까.”
“떠나신다고요?”
규영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경호의 뒤를 따르고 있던 ‘처남’ 상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더 묻지 말라는 소리다.
이에 규영은 입을 굳게 다물면서도 혼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까지 단 한시도 아내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남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딜 간다는 이야기인가?
“이쪽입니다.”
규영이 회복실 문을 열며 허리를 숙이자 경직된 얼굴의 경호가 문 앞에 섰다.
다음엔 신발과 습기 찬 셔츠마저 벗은 뒤 내의만 걸친 채 회복실에 들어섰다.
무슨 감염 따위를 우려해서가 아니다. 그저 고생한 아내에게 불쾌한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저벅.
경호의 발이 바닥의 회색 타일과 맞닿자 회복실 안쪽에서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내가 남편의 기척을 알아채고서 상체를 일으킨 것이다.
“여보?”
“……어.”
상대를 애지중지하는 마음과 달리 경호의 음성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성대가 조여질 정도로 긴장한 것이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대?”
흰 커튼 너머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린다.
그녀가 말하는 ‘문제’란 아기를 뜻했다.
산모와 산아 회복실이 벽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어 당장은 아기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산과의 규영과 간호사들이 산아 회복실에 상주하고 있어 웬만해선 변고가 없을 터였다.
“아니야. 그건 아니고.”
경호는 여기까지 말한 뒤 천천히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흰 침대보 위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출산을 마치고 후처리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피곤함에 절어 있었고, 이 때문에 경호는 차마 뒷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얼마나 강할는지 모르는 1위가 지척까지 쫓아왔으며 이제 더는 시간을 벌기 어렵겠다는 이야기 말이다.
독하게 마음먹고 달려왔지만 여전히 2위다. 놈과의 정수 차이가 얼마나 날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차이일 수도, 어쩌면 수백만 개 이상 뒤처졌을 수도 있다.
“좀 쉬어. 난 주변 좀 둘러보고 다시 올게.”
경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커튼을 도로 치려 하자 아내가 커튼 자락을 붙들어 막았다.
“왜? 뭐야?”
남편이 뒤로 숨긴 문제가 아기에 관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경호는 반쯤 거짓말을 했다.
“근처에 누가 있어. 패스파인더가 자꾸 기울어. 좀 살펴봐야 할 것 같네.”
“…….”
아니나 다를까, 금세 어두워지는 아내의 얼굴.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각성자’로서 움직일 때 얼마나 악독한지 잘 알았다.
다른 그룹을 약탈하는 건 일상에 가까웠고, 물물 교환을 하기로 약속한 다른 구원자를 배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덕에 아이를 무사히 낳았고, 삶이 지속되고 있다. 이 정도면 이 시국에 제법 윤택하기까지 하다.
이게 옳지 않은 방식이라는 걸 알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더라도 남편의 선택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알았어.”
근처를 돌아봐야겠다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살인을 묵인한 것이다.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나 평소와 달리 남편은 곧장 현장으로 나가지 않았다.
침대 곁에 우두커니 서서, 그저 시커멓게만 보이는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바깥보다 실내가 한참 밝아서 뭐가 제대로 보일 리 없는데도.
“……?”
대체 오늘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는 아내.
그러다 한참이 더 지나서야 깨달았다.
남편이 보고 있던 건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유리창에 반사된 회복실 전경이었다.
* * *
비슷한 시각.
정우 일행은 부산 본부장 권정겸의 안내에 따라 대성 그룹의 임원진 대피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때 각성자들의 전쟁터였던 도시답게 멀쩡해 보이는 건물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고, 종종 아주 널찍한 공터가 나타나기도 했다.
“저건 진입로가 폐쇄된 곳이지요?”
거창 검사 김동호의 질문에 정겸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본래 부산에 순위권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우 씨께서 찾고 계신 그…… 자가 찾아와서는 먹어 치운 거지요. 지금 보고 계신 건 한참 전에 정리된 지역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놈이 부산에 있던 게 언제입니까?”
이건 정우의 질문.
그러자 정겸이 허공으로 눈을 들어 올렸다.
“어제 해가 질 무렵까지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럼…… 멀리 가진 못했겠군요. 헬기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떤?”
정우가 되묻자 정겸이 헬기 바깥의 시커먼 부산 시내를 훑어봤다.
“도시 안쪽이야 난장판이지만 의외로 고속 도로는 한산한 편입니다. 도시 외곽에서 멀쩡한 차만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지요.”
“아, 그렇습니까.”
정우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정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상대가 정말 2위라면 이 귀한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낼 리 없을 테니까.
어떻게든 정수를 더 모으기 위해 최대한 가까운 도시로 향했을 거다.
‘울산, 포항, 아니면 대구. 셋 중 하나다.’
정우는 최초의 채널을 다시 들여다봤다.
꽤 도발적인 멘트를 날렸음에도 2위에게서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진 않고 있었다.
아직은 몸을 사릴 때라고 판단한 걸까?
정말 급하다면 전시안과 강림을 이용해 즉시 저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정우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썼다.
이건 언젠가 남하할 북의 1위에게 쓰려고 아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이미 내려와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남한의 어딘가에서 정수를 빨아들이고 있을는지도.
“…….”
정우는 새삼 조바심이 났다.
“저 앞쪽입니다. 여기선 안 보일 텐데, 조명을 저리로 쏘면 3미터짜리 동상 하나가 보일 겁니다.”
이윽고 정겸이 대피소의 입구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곧 동호가 그의 지시를 따라 지상을 향해 조명탄을 쐈고, 환한 빛이 폐허가 된 도심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어…… 여긴.”
착륙 지점을 찾아 눈을 굴리던 용헌이 침음을 흘린다.
임원진 대피소라는 곳이 부산 본부의 바로 뒤편이었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죠.”
정겸이 낮은 웃음을 흘리는 순간.
탁!
갑자기 정우가 헬기의 출입문 쪽으로 몸을 내밀며 짧게 경고했다.
“누가 먼저 와 있는데요, 그때 말씀하신 임원진들입니까?”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고개를 쉼 없이 까닥이고 있었던 거다.
이에 정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예, 아마 보디가드도 좀 데리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