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72
174화. 비 내리는 밤(1)
“보디가드……?”
정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대성은 물론 부산마저 초토화된 이 마당에 어느 멍청한 녀석이 충신 흉내를 내고 있느냔 말이다.
“임원진이라고 해 봐야 이젠 쓸모없지 않나.”
정우가 혼잣말을 읊조리자 이를 듣고 있던 정겸이 부연했다.
“당장이야 그렇습니다만…… 피신처에서 쭉 지낼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요.”
피신처 출입도 그렇고 온갖 비밀 공간을 개방하려면 임원의 고유 코드와 지문이 필요하다는 게 정겸의 설명이었다.
“……그렇습니까.”
정우는 마지못해 수긍하듯 대답하고서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입구가 정확히 어딥니까? 입구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그러자 정겸이 도로변에 세워진 동상을 가리켰다.
“저 동상 뒤편으로 입구가 생깁니다. 임원이 지문 인식을 해야 하고요.”
“그럼 당신 지문으로도 가능합니까?”
“예. 물론입…… 헉!”
정우는 정겸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의 멱살을 쥐고서 헬기 아래로 뛰어내렸다.
화아아악!
난생처음 해 보는 맨몸 강하에 정겸의 얼굴은 사색이 됐고, 정우는 그런 그를 정확히 동상 정면에 안착시켰다.
콰아아앙!
정우의 강하는 순전히 고밀도의 보호막으로 충격을 버티는, 다소 무식한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정겸은 무사히 땅에 발을 딛고 나서도 한동안 손발이 떨리는 걸 어쩌지 못했다.
“다, 다음부터는 언질이라도 주시지요.”
“예, 생각해 보죠.”
정우가 어서 할 일을 하라는 듯 동상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에 정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상 하단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띠릭.
어디선가 기계음이 나더니 이어서는 자그마한 자판이 밀려 나왔다.
등록자의 지문을 인식시키고 비밀 번호까지 입력해야 하는 방식.
확실히 임원을 직접 데려오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은신이고 뭐고 필요 없어서 출입구를 박살 낼 게 아니라면 말이다.
따각, 따가각.
정겸이 한참을 뭔가 입력하자 비로소 동상 밑쪽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덜컥, 드그그극.
정확히는 동상 뒤편의 바닥이 갈라지고 있는 거였다.
“허.”
이때만큼은 정우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형물이었을 뿐이다.
심지어 위치도 허름해 보이는 두 건물 사이여서, 그 누구도 이 밑에 벙커가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을 터였다.
‘양쪽 건물을 일종의 가림막으로 쓰고 있던 건가? 이런 게 어떻게 시공 승인을 받았지?’
얼마나 놀랐으면 정우가 인간 상식선의 의문을 품었겠는가.
그리고 천천히 착륙 중인 헬기 안의 일행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미친…… 이 밑에 벙커가 있었다고? 불법 아닌가?”
거창 검사 김동호가 넋 나간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 기내의 나머지가 어색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어찌 됐든 정겸에 의해 대성 그룹의 임원용 은신처가 개방됐고, 정우는 막 착지한 헬기를 향해 급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곳을 정리하는 대로 용헌만 데리고 다시 비행하겠다는 거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내일 일찍 움직이는 것이…….”
주치의 동훈이 간만에 정우를 걱정한다.
아무리 정우가 국내 최강자라지만 그래 봐야 알맹이는 인간이다. 그래서 동훈은 정우가 좀 쉬어야 한다고 봤다. 육체는 물론 정신적인 회복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 구원자가 아무리 많은 것을 벗어던졌다고 한들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살육의 일과가 정신을 좀먹고 있지 않을 리 없었다.
“…….”
그러나 정우는 오늘 추가 근무를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2위에게 답신이 와서 가 봐야 합니다.”
“예……?”
눈을 휘둥그레 뜨는 동훈.
정우는 그런 그를 뒤로 한 채 조금 전 채널에 올라온 2위의 대사를 읽었다.
[2] 폭우 : 아직 부산에 있습니까? 그럼 장안 휴게소에서 봅시다. 오후 9시 30분.폭우. 언젠가 제법 악독한 느낌이 있어 일부러 기억을 해 뒀던 녀석이다.
시간과 장소까지 공개적으로 내건 걸 보면 정말 승부를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오후 9시 30분이면 대략 2시간 뒤. 고속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온다고 봐야겠군.’
정우는 여기까지 생각한 뒤 용헌에게 물었다.
“장안 휴게소가 정확히 어딥니까?”
그러자 용헌이 품속에서 큼지막한 지도를 꺼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음엔 부산과 연결된 고속 도로를 눈으로 훑다가 북동쪽 끝자락에 붙어 있는 ‘장안 휴게소’란 글자를 발견했다.
“동해 고속 도로군요. 부산과 울산의 경계면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울산.”
예상대로였다. 놈은 부산에서 그리 멀리 떠나진 않았던 거다.
현재 시각, 오후 7시 32분.
정우는 은근히 안달이 났다.
“여길 빠르게 정리하면 8시까지 울산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8시……. 정각에 도착하는 건 좀 어렵겠지만 8시 10분쯤이면 가능할 겁니다.”
“좋습니다.”
조종사의 답변을 들은 정우는 지체 없이 동상 뒤편의 은신처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계속 울산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쪽이 굳이 놈의 장단에 맞춰 줄 필요가 있는가? 헬기를 타고 일찌감치 울산에 진입하면 놈을 찾을 수 있지 않냐는 말이다.
녀석이 정말 울산에 있다면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놈의 위치를 계속 가리킬 테니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다. 운이 좋다면 놈의 본거지까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우가 2위를 서둘러 만나려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녀석이 약속 장소를 따로 잡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자신이 싸우기에 유리한 장소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고서야 이런 경우는 한 가지뿐.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거다.’
아마도 ‘유사 성역’일 거라고, 정우는 생각했다.
앞서 만나 온 순위권자들도 대부분 자신만의 공동체를 꾸리지 않았는가.
다만 폭우는 2위나 되는 자인 만큼 고문을 한다고 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 테고, 그러니 가장 확실한 방법은 놈의 출발 위치를 미리 찾아내는 것이었다.
따닥, 따닥.
그사이 정우는 대성 그룹 은신처의 로비 층에 도달해 있었는데, 바닥에 값비싼 대리석이 깔려 있는 탓에 발소리가 요란하게 나기 시작했다.
“…….”
이에 정우가 눈썹을 꿈틀대자 정겸이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몸에 보호막을 둘렀다.
“이미 출입구가 열릴 때 내부에 경고가 갔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희가 로비에 있다는 것까지 알아챘겠지요.”
상대가 침입자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잘 지켜 달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정겸을 안심시키는 대신 발치의 정수 표식을 내려다봤다.
“역시 이상한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디가드면 지금쯤 마중을 나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출입구가 열렸을 때 경고가 갔다면 더욱…….”
정우는 대충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 것 같아서 말을 그만두고 마저 걸었다.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은 로비 맞은편의 두꺼워 보이는 철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즉, 보디가드란 자가 은신처 안쪽 깊숙한 곳에 숨어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철컥.
예상대로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곧 정겸이 잽싸게 다가와 지문 인식을 했다.
그러자 마침내 은신처 본관으로 이어지는 출입문이 입을 쩍 벌렸다.
두드드득.
두꺼운 경첩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때맞춰 정우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벌써 입구 근처부터 붉었기 때문이다.
은신처 내부가 온통 피바다였다.
“이 씹……!”
깜짝 놀란 정겸이 본능적으로 눈을 파랗게 태우며 칼날을 빼 들었으나, 정우는 여전히 시야에 보디가드가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툭.
발에 뭔가 걸려 튕겨 나가기에 쳐다보니 누군가의 손이었다.
팔꿈치 밑이 깔끔하게 잘린, 사람의 손.
이 와중에 검지의 금빛 반지가 유난히 반짝였는데, 정겸이 이걸 알아보고서 침음을 흘렸다.
“임동주 전무 이사입니다.”
“이제 의미 없는 직책이죠.”
정우는 대수롭지 않게 정겸의 말을 받아넘겼다.
이 정도야 일찍이 예상한 바였다.
최소 수십만 단위의 각성자일 ‘보디가드’가 무엇이 아쉬워서 임원들의 수발을 계속 들었겠는가. 아마도 은신처에 입장하자마자 정리를 시작했을 거다.
‘그래도 손가락을 따로 모아 두거나 하진 않았네. 지문은 계속 필요하지 않나.’
정우는 여기저기 흩어진 시체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저 베어 죽이는 과정에서 신체를 훼손했을 뿐 일부러 팔을 잘라 내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흐음.”
그럼 이 난장판을 만든 녀석은 어디서 대체 뭘 하고 있을까?
정우는 정수 표식의 안내를 따라 계속해서 은신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그마한 문과 소형 창고가 두어 개 더 나타났고, 가장 중요한 연료 저장고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긴 뭡니까?”
은신처의 가장 안쪽.
정우가 문이 반쯤 열린 방을 가리키며 묻자 코를 막은 채 그의 뒤를 따르던 정겸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침실일 겁니다.”
“침실이면.”
슥.
정우의 시선이 다시 발치로 향한다.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은 정겸이 침실이라고 말한 방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자빠져 자는군.’
파아앗.
이윽고 정우의 손에서도 시퍼런 칼날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곤 큰 걸음으로 나아가 침실의 문을 마저 젖혔다.
홰액!
그러자 지금까지 지나온 공간과 달리 백색 톤을 유지하고 있는 실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겸의 말대로 여긴 2인용 침대 4개가 배치된 침실이었고, 그중 하나에 넥타이조차 풀지 않은 정장 차림의 사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침대맡의 작은 테이블엔 술병이 쌓여 있었고 말이다.
“…….”
진한 피비린내에도 꿈쩍하지 않던 정우였지만 이번엔 코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독한 술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였다.
이것이 ‘보디가드’가 선택한 세기말을 맞이하는 방식이었을까?
여태 모셔 온 주인을 싹 다 도륙하고 술에 취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거.
‘한심하군.’
정우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런 케이스가 또 있다면?
산속이든 벙커든, 제법 많은 정수를 쥔 채 숨어 버린 놈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당장은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이 나라의 진입로가 모두 닫혀서 순위권자들이 타 지역으로 파견을 가게 된다면 그땐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
정우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사내의 머리맡을 바라봤다.
이 보디가드가 가진 정수량은 110만 개.
이 정도면 충분히 성역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리자인 선웅을 죽이진 못하겠으나 자원 수집을 위해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을 노릴 수준은 됐다.
‘평가관님, 계십니까?’
정우가 의식 속에서 평가관을 부르자 ‘다467’이 기척을 드러냈다.
‘이 나라의 진입로가 모두 닫히게 되면 순위권자 외의 각성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수를 가진 채로 계속 이곳에 남습니까?’
그러자 평가관이 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단, ‘잔류’를 선택한 순위권자가 발생할 경우 모든 정수의 위치가 잔류자에게 노출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 누구도 잔류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이 땅에 상당량의 정수가 고스란히 남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각성자’로서 활동할 테고 말이다.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정수를 사용하는 각성자로.
‘……골치 아픈데.’
이러면 국내 진입로를 모두 닫을 경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셈이었다.
잔류를 선택해서 남은 정수를 흡수하는 데 하루를 투자하거나, 아니면 이곳의 문제를 성역과 대리자에게 일임하고 바로 타 지역으로 떠나거나.
전자의 경우 타 지역으로의 이동이 하루 늦게 되지만 이 나라의 정수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후자는 타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나 이 나라에 남은 정수를 전부 폐기하는 셈이 된다. 설령 대리자가 국내의 잔여 정수를 전부 모은다고 한들 정우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완료 시점의 잔여량이 문제겠네.’
해야 할 일이 까마득하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얼마나 큰 과업일지 아직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
이제 정우의 시선은 다시 침대 위의 사내에게 닿아 있었다.
당장은 파견이니 잔류니 하는 것보다 여기에 일행을 박아 놓고 2위와 결판을 짓는 게 더 급했으니까.
이대로 목을 가르면 출혈이 상당할 테니 침실 밖으로 끌고 가야 할 거다.
파앗.
정우가 사내를 붙들기 위해 신체 강화를 하자 조명보다 몇 배는 더 밝은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우…….”
정겸이 질린다는 반응을 보이며 뒤로 물러섰고, 여태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 있던 보디가드도 눈을 번쩍 떴다.
“헉?”
그 독한 술기운이 단번에 가시는 느낌.
확!
사내가 기겁하며 상체를 급히 일으켰으나, 이내 정우의 손아귀에 붙들려 바닥에 메다꽂히고 말았다.
“얌전히 있어. 여기선 안 죽일 거니까.”
“누, 누구……?”
사내는 경황이 없는 얼굴로 발버둥 치다가 문간에 서 있는 정겸을 발견하고서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아!”
임원진의 보디가드가 대성의 부산 본부장이었던 자를 못 알아볼 리 있겠는가.
“본부장님!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자신이 본부장에 의해 ‘징계’를 받는 줄로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겸도 사실상 정우에게 예속된 입장.
그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사내의 요청을 무시했고, 곧이어 정우가 실력 행사를 했다.
콰과곽!
정수 110만 개짜리 사내를 마치 짐짝 끌듯 침실 밖으로 빼낸 것이다.
그러곤 천만 단위의 정수가 압착된 칼날로 상대의 목을 쑤시려는 찰나.
“……?”
정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에 정겸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고, 사내의 얼굴에도 일순 희망의 빛이 어렸으나…….
콰앗!
이내 칼날이 사내의 목을 직선으로 꿰뚫었다.
애초에 정우의 주의를 잠시 끌었던 게 이곳의 일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방금은 뭐였습니까?”
정겸도 이미 죽고 없는 보디가드보다 방금 정우의 반응에 더 흥미가 생겼는지 침실 바깥으로 나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정우가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채널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서였다.
[5] 냄새 : 중국! 중국! 도망! 도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