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76
178화. 비 내리는 밤(5)
“괜찮을 거야.”
상철이 이렇게 말했지만 현선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편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던 경호의 마지막 대사 때문이었다.
「죽어어어!」
악다구니를 쓰고 있건만 왜인지 애처롭게 들리던 그 목소리.
냉철함 그 자체이던 평소의 경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곤 다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정말 죽어 버린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이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려워했다.
현선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는 경호가 자신의 곁을 떠난 그 순간부터 이 상황을 예견했었다.
그녀는 일찍이 지독한 두려움 안에 있었고, 지금은 현실 감각조차 흐려지고 있었다.
“죽었어. 우린 도망가야 해.”
현선이 꿈꾸는 듯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하자 도리어 상철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저걸 봐.”
슥.
넋 나간 현선이 가리킨 곳은 불과 수분 전 경호가 푸른빛을 뿜어내며 달려 나간 자리였다.
“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그리로 시선을 돌린 사람들이 흠칫 놀랐고, 곧 상철도 창가에 이마를 들이밀며 눈을 크게 떴다.
“형님인가……?”
상철 역시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희망 사항에 불과했으니까.
그러자 현선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젠 멀건 느낌마저 있는 그녀의 동공이 창밖의 누군가를 바라본다.
푸른빛을 휘감은 채 병원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
“아니야…….”
현선은 고개를 한 번 더 가로저었다.
경호라면 저럴 리 없었다. 절대로.
본인의 아내가 정수의 푸른빛을 두려워 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게다가 어슬렁거리듯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대체 어떤 가장이 전쟁을 마치고 가족들에게 돌아오는데 저런 모습을 한단 말인가.
적어도 창밖의 저자는 병원 안의 사람들에게 애틋한 마음이 없는 게 분명했다.
“흡!”
현선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산아 회복실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가자, 지금이라도!”
“억! 누, 누나!”
깜짝 놀란 상철이 현선을 쫓았고, 산과의 규영도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다.
“현선 씨! 아직 안 됩니다!”
아기를 지금 옮기기엔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영수는 출산 과정에서 태변을 흡입한 탓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 아기를 꺼내 바깥으로 나가면 온갖 감염은 물론이고 생존율도 급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까지 내리는 지금 아기를 데리고 이동하겠다는 건 의사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현선 씨!”
화가 난 규영이 언성을 높인다.
그사이 상철이 아기를 꺼내려던 현선을 억지로 붙들었고, 곧 그녀의 목에서부터 날카로운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안 돼애애! 그놈이 온다고!”
현선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악몽 같은 현실을 집도한 존재와 말이다.
남편의 원수, 그리고 어쩌면 아기의 원수마저 될지 모를 그 누군가.
차라리 놈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나을 것 같았다. 그저 상상으로만 놈을 그려 본다면 언젠가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자의 얼굴을 보고 만다면…….
“놈이, 놈이 온다고…….”
현선은 상철에게 꼼짝없이 붙들린 채로 구슬프게 울었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씨발.”
상철도 눈시울을 붉혔지만 누나를 붙잡은 팔에서 힘을 빼진 않았다.
그래도 아직 최악은 아니었으니까.
어찌 됐든 상대도 구원자가 아니던가. 경호가 그랬듯 필요한 사람은 살려 둘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라도 정신 차려야 해.’
의사와 간호사들은 결국 타인이다. 대들보가 무너진 이 그룹에 끝까지 충성할 리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누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인 거라고, 상철은 스스로를 일깨웠다.
경호의 죽음이 슬프긴 하지만 누나만큼 감정에 매몰될 사이까진 아니었고, 영수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친아들까진 아니었기에 상철의 감성과 이성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조만간 이리로 올라올 괴물과 교섭할 정신이 있다는 거다.
‘일단 살아야지. 일단은.’
끄득.
상철이 입술을 꽉 깨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수라장이 된 장내에 전혀 다른 공기가 스며들었다.
저 멀리 복도 맞은편의 층계가 파랗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헉!”
온몸으로 인큐베이터를 막고 있던 규영이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봤고, 눈치가 빠른 간호사들은 잽싸게 그런 규영의 곁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곳의 간호사들을 굳이 정의하자면 ‘생사의 기로 경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위권 구원자의 간택 순간을 거쳐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서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의사일 거란 걸 경험적으로 알았고, 그래서 규영을 방패 삼기로 한 거다.
“…….”
상철도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았기에 간호사들이 약삭빠르게 자리 잡는 걸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살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각자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살아남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상철 역시 자신과 누나가 살 수만 있다면 지금 올라오고 있는 녀석의 신발이라도 핥을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대체 누구냐. 이렇게 된 마당에 얼굴이나 보자.’
나름의 각오를 끝마친 상철은 여전히 누나를 꽉 붙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이젠 복도의 중간 지점까지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고, 곧 층계에서부터 어떤 남자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수리와 이마까지의 형태만 봐도 확실히 경호는 아니었고, 상철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모습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오히려 더 무서울 정도의 인상, 그리고 흔한 회사원의 복장.
31세, 인간 남성, 박정우.
현시점 국내 1위 구원자가 울산 대학 병원 5층 복도에 발을 디뎠다.
탁.
흰 셔츠에 정장 바지, 밑창이 고무로 된 운동화. 배낭조차 메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이 간소한 복장이다.
“…….”
전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에 장내의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겉모습만으로 따지면 경호 쪽이 훨씬 악독한 느낌이었으니까.
“의사는 어디 있지?”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정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 소릴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바깥에서부터 아련하게 들려오는 빗소리, 인큐베이터와 연결된 전력부의 미세한 소리를 제외하면 장내에 소음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규영이 여전히 인큐베이터를 감싼 채로 소리를 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산과 전문의 박규영이라고 합니다. 송구스럽게도 지금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규영도 간호사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자 앞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산과……?”
정우의 미묘한 반응.
이를 들은 규영과 간호사들의 표정이 싹 굳었다.
구원자마다 선호하는 의사의 종류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탓이었다.
경호야 삶의 목표가 아내의 출산 준비였지만 저 사내의 목표도 같을 리는 없지 않은가.
“…….”
규영이 잠자코 상대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고 있자 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의사나 기술자는 없나?”
네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지,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건지 의도가 모호한 질문이었다.
“으음.”
규영은 침을 힘겹게 삼킨 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의사는 저뿐이고…….”
다음엔 자신의 등 뒤에 숨은 두 간호사를 쳐다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일을 도와 온 간호사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이건 규영이 자비를 베푼 게 아니었다.
일상을 송두리째 잃은 규영에게 남은 건 ‘의사’라는 직업적 정체성뿐이었고, 이것이나마 지켜 내기 위해선 간호사들이 필요했다.
산과의 시술 대부분은 보조가 필수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신생아도 있고요.”
사실 이것이야말로 규영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이에 정우가 앞서 들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 폭우의 자식인가.”
‘그놈’이라거나 ‘그 녀석’이라는 표현 대신 폭우라는 이명을 써 준 것은 정우로서 상당한 예우였다.
이미 사라진 자에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그인데 경이로운 의지를 보여 준 폭우에게 만큼은 ‘캐릭터’를 부여해서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폭우의 유족에겐 그런 것 따위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아아악!”
정우의 입에서 남편의 이명이 발음되자 현선이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고, 이때 상철이 믿기지 않는 행동을 했다.
“제발……!”
현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것이다.
그러면서 정우를 향해 경직된 말투로 이야기했다.
“얻어야 할 건 다 얻지 않으셨습니까? 살려만 주십시오. 원하시는 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구원자들의 상식선에서, 희생자의 유족을 살려 둔다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이 나라 2위를 잡아먹고 온 상태.
그러니 이제 정말 배가 부르지 않을까? 자비를 베풀 마음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제발…… 우릴 그냥 버리고 가!’
실로 얄팍하기 짝이 없는 희망이었으나 이내 기적이 벌어졌다.
“아기는 살려서 데려가겠다. 원칙적으론 저 여자도 데려가야 하지만…… 본인이 원할지 모르겠군.”
“……!”
정우의 말에 너무 놀란 상철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고, 목에 핏줄을 세우던 현선도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데려…… 가신다고요?”
상철은 방금 들은 문장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우가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성역으로 보낼 거다.”
성역. 이 단어에 모두가 움찔거렸다.
이 나라에 최초의 성역이 세워질 때 나타난 문구는 다들 본 터였으니까.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성역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2위 구원자였던 경호마저도.
당시 경호는 저게 아마 1위에 올라야 하는 이유일 거라고 말했었다.
그러곤 이렇게도 말했다. 영수를 위해서라도 꼭 성역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아니면 빼앗아 오거나.
물론 그의 야망은 산산이 조각났지만 부분적으론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1위 구원자가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영수를 성역으로 데려가겠다고.
아버지의 목숨으로 성역행 티켓을 산 셈인 거다.
“이, 이 사람도 데려가셔야 합니다!”
상철이 현선을 ‘이 사람’이라고 칭하며 거리를 둔다.
조금 전 1위 구원자가 말한 ‘원칙’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직감한 탓이었다.
아기는 살려서 데려가겠다. 원칙적으론 여자도 데려가야 한다……. 이 문장에 상철 자신을 엮을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정우는 현선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상철을 계속 쳐다봤다.
“그러는 넌 누구지?”
이 질문에 상철이 아랫입술을 벌벌 떨었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해서였다.
“저, 저, 전…….”
그러자 보다 못한 산과의 규영이 그를 도왔다.
“산모의 동생입니다. 밖에서 만나셨던 남자의 처남이지요. 그리고 요리사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완벽에 가까운 소개에 상철이 넋 나간 얼굴로 규영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를 들은 정우가 곧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누나 대신 당신이 애를 맡는 건 어떤가?”
“……?”
상철의 눈이 더 커졌지만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난 저 아기가 테러리스트로 자라는 걸 원하지 않거든. 성역의 문젯거리는 지금도 충분히 넘쳐. 그래도 당신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수를 맡아서 키우되, 아버지의 사인을 일러 주지 말란 이야기였다.
단, 경호의 아내였던 현선이 이 조건을 지킬 수 있을 리 없으니 상철더러 하라는 거다.
“제가 만약 거부한다면…….”
“그래도 아기는 살겠지만 너희 둘은 여기에서 죽는다.”
“…….”
실은 차세대 할당제를 곧이곧대로 적용할 경우 상철은 물론 현선도 살릴 필요가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현선은 이제 임산부가 아니었으니까.
「차세대 할당제」
1. 방주의 전체 좌석 중 30%를 ‘차세대 할당 좌석’으로 지정한다.
2. 차세대 할당 좌석에는 아래에 해당하는 인원만이 탑승할 수 있다.
가) 임산부 또는 임산부와 그의 배우자.
나) 10세 이하의 아동.
다) 출산 및 육아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인원.
현시점 신생아인 ‘영수’는 2조 나항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거다.
하지만 할당제의 취지와 문맥상 임산부를 살리는 이유는 단순히 아이를 낳는 행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출산을 위한 도구로서 임산부를 살리는 거라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엔 산모를 처형해야 맞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차세대 할당제의 여러 조항은 성역의 사람들이 생각한 ‘마지노선’이었다.
생명 탄생의 영역에서만큼은 기존의 가치관을 최대한 보존하겠다는 거다.
굳이 임산부의 배우자를 살려 주는 것도 같은 이치.
실리적으로 따져 보면 차세대 할당제 대상자만큼 파격적인 혜택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정해. 곧 여길 정리할 거니까.”
정우는 이 말과 함께 자신의 정수 총량을 점검했다.
「71,793,389」
7,100만 개.
2위까지 흡수한 지금, 오늘 중으로 이보다 더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는 없을 거다.
따라서 이제 결정해야 할 때였다.
전시안과 강림으로 북의 1위를 저격할지, 아니면 하루를 더 기다릴지.
“…….”
그러나 정우의 정수는 이미 팔팔 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