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78
180화. 적자(適者)(2)
“…….”
정우는 잠잠해진 ‘최초의 채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광명’, 장석표는 두 번 다시 채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적이 흐른다.
채널의 그 누구도 함부로 이 정적을 깨지 못했고, 이내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짤막하지만 더없이 강렬했던 1위와 3위의 대화 내용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 온 구원자를 마주친 3위와 그런 그에게 상대의 정수량을 묻는 1위.
두 존재가 공개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이벤트였지만 그보다 3위가 북에서 온 침입자를 막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순위권 밖에만 있던 자들에게 5위 안쪽의 존재들이란 초월자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자국의 최상위 구원자에게 죽으면 모를까, 타지에서 찾아온 구원자에게 당하리라곤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채널을 응시하고 있는 구원자들은 알게 모르게 두 순위권자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무리 서로 경쟁 관계에 있다 해도 이왕이면 ‘같은 국민이었던’ 자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채널의 그 누구도 북에서 온 녀석이 활개 치고 다니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엔.
| 50위 구원자가 채널에 접속했습니다.
2번 채널에서 승격자가 발생했다는 알림이 출력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에 없는 이변이 벌어졌다.
[27] 오이도 : 으음. [10] 빛 : 아……. [7] 검 : 가셨구나. [36] 초우 : 애도 드립니다.구원자들이 경쟁자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한 것이다.
‘……정신들 나갔군.’
다만 정우만큼은 이들이 이 특수한 상황에 경도되어 이성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쪽은 북의 1위를 막아 내야 할 당사자다 보니 감성에 젖을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
‘석표 씨가 마지막으로 몇 개를 들고 있었는지 물어보질 못했어. 상당한 변수다.’
[3] 광명 : 7천만 개! 그리고 이제 곧……!석표가 남긴 말에 따르면 북의 1위는 이미 7천만 개를 확보한 상태에서 충남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즉, 석표의 정수를 흡수한 지금은 이쪽보다 무조건 강할 거란 뜻이다.
현재 정우의 정수 총량은 71,793,391개.
폭우를 해치운 뒤 겨우 두 개가 늘었을 뿐이었다.
다름 아닌 폭우의 아내, 현선이 가지고 있던 정수였다.
‘기존 3위가 500만 개 수준이었으니까 비슷한 양을 가지고 있다고 치면.’
그렇다면 상대의 예상 정수 총량은 최소 7,500만 개.
‘가만히 두면 오히려 격차가 더 커질 거야. 이쪽에 흩어져 있던 정수는 이미 폭우가 다 가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반면 석표의 사망 지역인 충남과 그 근처 지역의 상황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예상컨대 이 나라 서부에 남아 있는 정수가 꽤 될 것이다.
그곳으론 정우 자신도, 미친 듯이 정수를 모으던 폭우도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근처에 북의 1위가 있다.
‘…….’
결론을 내린 정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목깃을 매만졌다.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행동이다. 문득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우는 날숨을 크게 들이쉬며 광대를 찡그렸다.
그러곤 뒤편에서부터 나기 시작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헉, 헉……!”
문자 그대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어느 중년 사내.
정우의 전속 조종사 용헌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정우가 병원 안에서 쏘아 보낸 정수 창을 보고서 급히 헬기를 띄워 온 차다.
그러면서도 숙달된 조종사답게 장내에서 민간인으로 보이는 자들의 숫자를 얼른 셌다.
보나 마나 산과의일 의사 하나와 간호사 둘, 그리고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어느 사내.
“예, 한 사람 더 있으니 데려가세요. 이 의사분이 설명해 줄 겁니다.”
정우가 이 말을 하며 산아 회복실을 가리켰고, 이에 용헌이 그리로 고개를 들이밀다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회복실 한쪽에 정수 파동으로 지워진 누군가의 몸뚱어리 일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용헌은 저게 누구냐고 묻는 대신 정우가 말한 ‘한 사람’을 쳐다봤다.
정영수, 0세. ‘폭우’ 정경호와 이현선의 아들.
인큐베이터에 든 아이의 모습을 본 용헌은 잠시 침묵한 뒤 다시 업무 모드로 돌입했다.
“아이를 빼내야 할 것 같은데, 바깥에서 몇 시간 정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용헌의 물음에 산과의 규영이 턱에 고였던 식은땀을 훔쳐 내며 대답했다.
“단 1분도 내보내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별수 있을까요……? 도박이지요.”
이동하는 도중에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전력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이 부산에 있습니다. 서둘러 가면 20분 안쪽입니다.”
용헌의 대사엔 정우와 다르게 감정이 실려 있었고, 이 점이 잔뜩 경직돼 있던 규영의 얼굴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 새로운 그룹이 아주 잔혹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예, 아무쪼록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규영은 끝까지 해 볼 만하다, 라는 식의 이야길 하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소견은 정황과 관계없이 정확하게 밝히는 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인큐베이터 쪽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용헌이 다시 정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로 은신처로 이동하면 될까요?”
그러자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전 안 갑니다. 이 사람들만 데리고 가세요.”
“예……?”
용헌으로선 당연히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정우가 빠진다면 부산으로 복귀하는 동안 보안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저 의사나 간호사들은 얌전히 있는다 해도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던 저 사내는…….
“으음. 그렇군요.”
용헌은 복도에 등을 대고서 맥없이 늘어져 있는 상철을 흘깃 본 뒤 일단 지시를 받아들였다.
정우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실로 그랬다.
“만약 비행 중에 손목의 표식이 사라지거든, 부산의 나머지 일행을 태우고 바로 성역으로 가십시오.”
“……?”
정우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황망해 보이던 용헌의 표정이 더욱 볼품없게 일그러졌다.
“표식이 사라진다는 말씀은…….”
“만약 제가 죽으면 성역이 통째로 증발할 겁니다. 진입로가 거의 닫혀 가니 괴물에게 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환경인 건 마찬가지죠.”
또한 당장 몇 시간 뒤면 5일 차가 시작된다.
진입로를 모두 닫은 게 아닌 이상 5일 차 침입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아무래 그래도 주,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다니요.”
끝내 용헌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여태 이 구원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이에 정우가 짤막한 말로 쐐기를 박았다.
“현재 승률은 3할 정도로 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밑으로 떨어질 겁니다. 이제 가야 하는데, 아까 제가 한 말 중 이해 가지 않는 게 있습니까?”
정우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묻자 용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말 만약에 사달이 벌어진다면 누구에게 권한을 주실 겁니까?”
“무슨 권한을 말씀하시는 거죠?”
“어……. 통치권이라고 해야 할까요? 후임자를 정해 주셔야…….”
그러자 정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다 된 겁니까, 라고 되묻는 정우.
“…….”
용헌으로선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결코 알 수 없었다.
하필 이 중대한 기로에 혼자 서게 되다니…… 동훈이라도 함께 있었다면 의지가 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질문이 있어 얼른 내뱉었다.
“그럼 언제 어디로 모시러…… 가면 될까요?”
좋은 질문이라고, 용헌은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자 정우가 허공에 시선을 걸어 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후 10시까지도 표식이 지워지지 않으면 충청남도청으로 오십시오. 그때면 주변 정리는 다 되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오후 10시, 충청남도청, 표식.
용헌이 키워드를 곱씹는 사이 정우가 드디어 전시안을 발동했다.
슷.
시야에 박혀 있던 눈동자 모양의 표식이 사라지더니 눈앞에 자그마한 문구가 나타났다.
| 찾고자 하는 대상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비뇨기과의 동훈을 찾아낼 때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문답을 통해 범위를 좁혀 가는 방식이었다.
정우는 상대의 이름은커녕 채널 내 닉네임도 알지 못했기에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구가 바뀌었다.
|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어느 거리까지 탐색하겠습니까?
‘무제한.’
확신 없이 던진 대답이었으나 별문제 없이 통과됐다.
슷.
| 원하는 조건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십시오.
전시안을 처음 사용했을 당시에 가장 당혹스러워 했던 질문.
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한 답을 알고 있었다.
‘북의 1위 구원자. 현재 이 나라에 들어와 있고, 수 분 전 장석표를 죽인 자. 정수 보유량 7천만 개 이상.’
오류가 있을 수 없도록 아는 정보를 모두 쏟아부었다.
그러나 놈의 외형만큼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어서 정작 머릿속은 새까만 상태였다.
슷.
이번에도 전시안이 정우의 답을 통과시켰다.
| 조건 접수가 완료됐습니다. 대상을 검색합니다.
고오오오…….
커다란 환풍구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차더니, 갑자기 낭떠러지로 훅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뇌리로 콱 들이박혔다.
그건 다름 아닌 검색 대상의 위치였는데…….
‘뭐하는 놈이지?’
예상과 달리 놈은 석표가 최초로 보고했던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녀석의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했다.
머릿속에 놈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느껴졌고, 시야에 나타난 전시안 표식 역시 충남 방향을 가리켰으니까.
“…….”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적어도 정수 총량이 더 불어나진 않았을 거다.
정우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용헌과 눈을 잠시 맞춘 뒤 바로 ‘강림’을 사용했다.
그러자 순간 샛노란 빛이 정우의 시야를 채웠고, 이건 병원에 남게 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엇……!”
지나칠 정도로 밝은 빛에 사람들이 뒷걸음을 쳤고, 곧 이 빛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땐.
“…….”
정우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 * *
프아아앗!
모종의 기운이 온몸을 투과하는 느낌.
정우는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사실 지금 육체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유체 이탈을 한 것처럼 감각이라는 것이 아주 모호했기 때문이다.
시간의 개념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제법 오랜 시간 이 느낌을 지속하고 있던 듯한데 다시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모호한 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다 마침내.
삐이……!
지구의 설문이 진행되기 직전에 들었던 그 기분 나쁜 경고음이 들려왔다.
이에 정우가 이를 악물었고.
‘아.’
이때부터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언젠가부터 시야가 노랗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이때였고 말이다.
파아아앗!
수천, 수만 갈래의 빛줄기가 눈앞에서 서서히 흩어진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면서 그 뒤에 가려져 있던 풍경을 그에게 보여 줬다.
외벽이 유리로 된 큼지막한 건물, 어둑한 하늘, 그리고 희멀건 달.
어딘가의 도시.
정확히는 충청남도청 진입부였다.
“헉.”
머릿속의 태엽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듯하다.
자신이 조금 전 무얼 했는지, 무엇을 하려고 이곳에 강림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기억이 되감기 됐고, 마침내 그가 막연한 두려움마저 되찾았을 때쯤.
사아아아…….
귓불과 고막을 통해 공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촉감과 청각까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정우는 한 가지를 더 느꼈다.
방금 자신에 대한 ‘보호 조치’가 해제됐다는 걸.
그러고 나서는.
“아, 아아아……!”
기묘한 고함을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불과 10여 미터 거리였기에 이들의 표정을 제법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
하나같이 흰 의사 가운 또는 군청색의 작업복 따위를 걸치고 있었고, 손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양팔을 좌우로 허우적대며 달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급기야는 정우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외, 외과의입니다!”
“내과 전공의입니다……!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기계 설비사입니다!”
저마다 자신들이 의사거나 공업 전문가라고 밝혀 오는 사람들.
정우는 이자들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늠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놈’을 찾았다.
머리맡의 숫자가 지나칠 정도로 길쭉할 그놈 말이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머리맡의 숫자가 두 자리를 넘는 자가 없었고, 그사이 지척까지 달려온 한 사내가 정우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아주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정확히 이때, 파공음이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