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79
181화. 적자(適者)(3)
* * *
쐐애애애액!
파공음과 함께 들려온 미안하단 이야기. 정우는 혼란에 빠졌다.
“뭐……?”
그리고 그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들이닥쳤다.
슥.
살려달라며 달려오던 사람들이 일제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정우에게 던진 것이다.
팟, 파팟!
다름 아닌 밀가루가 든 종이 봉투였다.
물론 보호막을 감고 있는 정우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었지만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
쐐애액!
“……!”
한층 가까워진 소리에 정우가 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허공에 뿌려진 밀가루 때문에 사위가 온통 뿌옇기만 했다.
‘미친, 이걸 노렸군.’
지금 정우가 볼 수…… 아니, 느낄 수 있는 건 민간인들이 자신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뭔가 이상…….’
그가 본능적으로 보호막 밀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순간, 뿌연 시야 바깥에서부터 날아 들어온 정수 창이 보호막 표면을 강타했다.
키이이잉!
“……!”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마찰음.
그러더니 곧 보호막 표면이 계란 껍데기 깨지듯 안쪽을 향해 구겨졌다.
‘……설마.’
다면체 보호막이 뚫린 것이다.
콰앗!
끝내 짤막한 파열음이 나며 푸른 막이 산산이 조각났고, 이와 동시에 정수 창이 정우의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아……!’
죽음의 예감.
모든 정수를 보호막에 쏟아둔 상태였기에 그의 신체는 온전한 ‘순정품’이었다.
따라서 고속으로 날아오는 정수 창에 반응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피잇!
정말 아무것도 못한 채, 창을 받아내고 말았다.
“학!”
너무 놀란 정우의 입에서 외마디가 쏘아져 나온다.
그런데 천운이 따라준 걸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머리가 날아가지도, 가슴에 구멍이 뚫리지도 않았으며, 혹시나 해서 급히 손으로 짚은 복부도 마찬가지로 멀쩡했다.
휙.
황망히 뒤를 돌아보자 땅바닥에 꽂힌 시퍼런 정수 창이 눈에 들어왔다.
나선형의 홈이 파여 있는 처음 보는 형태의 정수 창.
목적지에 도달한 그것은 정우가 보는 앞에서 허공에 녹아 사라졌고, 다음엔 뜨겁고 따가운 감각이 정우의 귓가를 옥좼다.
투둑, 투두둑.
충남 일대엔 비가 내린 적도, 앞으로 내릴 예정도 없었으나 정우는 분명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에 그가 화끈거리는 오른쪽 귀를 손으로 더듬자,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악!”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이라는 감각.
황급히 시야에 집어넣은 오른손 끝엔 검붉은 피가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묻어 있었다.
방금 본 정수 창이 오른쪽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아…….”
비로소 상대를 찾기 위해 발치의 패스파인더로 시선을 돌리는 정우.
그러나 한참 늦었음을 그도 잘 알았다.
현재 보유한 정수량은 정확히 ‘0’이었고 사위는 여전히 흐렸으며, 심지어 가운과 작업복 차림의 민간인들이 제법 날카로운 살기를 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식도나 망치 등을 꺼내든 채로 말이다.
“…….”
이 와중에 정우는 북의 1위에게 감탄을 했다. 너무나도 기발하고 효율적인 함정이었으니까.
놈은 전력을 다한 투창으로 이쪽의 보호막만 깨뜨린 뒤, ‘막타’를 민간인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던 거다.
그렇다고 수천만 개나 되는 정수를 저들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다.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정수를 전부 집어먹는다 해도 어마어마한 후유증을 버텨내느라 반격은커녕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사이 정수 회복 시간을 무사히 보낸 놈이 여유롭게 다가와 마무리.
‘……씨발.’
정우는 희멀건 시야 저편에서부터 거뭇한 실루엣이 빠르게 다가오는 걸 보며 이를 꽉 물었다.
뇌가 이 끔찍한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실 다 악몽일지도 모른다.’라는 카피를 내보냈으나 소용없었다.
정면, 후면, 측면 할 것 없이 온 사방에서 위협적인 기척이 몰려들었고, 이게 설령 악몽이라 하더라도 겁에 질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정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광선검이 뽑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의 손에 잡힌 건.
탁.
아버지가 승진 선물로 줬던 만년필 한 자루였다.
“…….”
그리고 곧장 거친 호흡의 어떤 사내가 그를 덮쳐왔다.
“주, 죽엇!”
첫 상대.
정우보다 체격이 훨씬 큰 이 사내는 커터칼을 들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커터칼을 본 정우는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고, 찰나 후엔 그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콰악, 콱, 콱!
막상 커터칼이 뱃가죽을 쑤시기 시작하자 상상이상의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어억, 억, 억!”
정우는 상대의 팔 동작에 맞춰 비명을 지르면서도 본능적으로 반격을 했다.
콰앗!
오른손의 만년필로 사내의 목을 깊숙이 찌른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등허리 쪽에 시큰한 느낌이 찾아왔다.
“익……!”
볼썽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가운 차림의 또 다른 사내가 송곳을 들고 있었다. 그 끝은 이미 이쪽의 몸통에 박혀 있었고 말이다.
“이 개새끼!”
정우가 쇳소리를 내며 커터칼 든 사내의 목에서 만년필을 뽑자, 갑자기 묵직한 기척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헉……!”
깜짝 놀란 정우가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잃는 사이, 그가 있던 자리로 세 번째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놈은 이미 손에 든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정작 타격하게 된 대상은 정우가 아니라…….
콰득!
송곳을 들고 있던 사내였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시야가 흐려진 건 매한가지라 정우의 목소리만 듣고서 냅다 망치를 휘둘렀던 거다.
‘아!’
이 장면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정우는 곧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네발로 기어서라도 일단 여길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야 말로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화아아아악!
정우가 바닥에 엎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시퍼런 궤적이 현장을 가로지른 것이다.
타격 위치는 대략 성인 남성의 골반 높이.
다음엔 사방에서 큰 물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푸욱, 푹, 퍼벅!
물론 정우로선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가로로 양분된 시체가 무너질 때 나는 소리.
그리고 이 말인즉슨.
‘놈이 정수를 되찾았군.’
그새 정수 회복 시간이 한참 지나서, 북의 1위가 ‘뒷정리’를 시도했었던 거다.
그렇다는 건 이쪽도 힘이 돌아왔다는 소리이리라.
정우의 눈이 파랗게 타오른다.
「71,793,391」
그가 머릿속의 천만 단위 숫자를 보고 있자 저편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놈이다.’
그러나 정우가 살아 있는 줄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망자들이 뿌려준 밀가루가 아직까진 시야를 가려주고 있는 덕분이었고, 양측의 거리 또한 20미터 이상이라 정수량이 표기되고 있지 않다는 점도 한몫했다.
“…….”
정우는 바닥에 엎드린 채, 잠자코 놈을 기다렸다. 상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다만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을 통해 놈이 오는 방향만큼은 알 수 있었다.
츠즉.
이윽고 잘 걸어오던 상대가 걸음을 멈췄다.
놈도 패스파인더의 표식 방향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이런.”
뿌연 시야 너머에서 들려오는 번역된 음성.
정우는 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급히 보호막 밀도를 끌어 올렸고, 거의 같은 순간에 시퍼렇다 못해 까맣게까지 보이는 정수 칼날이 현장을 사선으로 갈랐다.
콰아아아앗!
무지막지한 크기의 초대형 칼날.
형태도 일반적인 것과 달리 두 줄기의 넝쿨이 서로 얽힌 것처럼 보였다.
칼이라기보다는 나무뿌리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물체화에 특화된 놈이구나.’
아까 날아온 창도 그렇고,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천만 단위 각성자들의 정수 구현은 여느 상대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상대가 무슨 재주를 보여줄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정우 자신만 해도 보호막을 이용해 공방을 동시에 해버릴 수 있었으니까.
스아앗!
다행히 놈의 칼날이 허공만 휩쓸고 말았지만, 덕분에 연막 역할을 하고 있던 밀가루가 싹 걷혀 버렸다.
‘……낭패다.’
정우는 휑해진 시야 가운데에 검게 탄 피부를 가진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봤다.
오른손엔 아까 그 괴이한 칼날을 붙이고 있었는데, 놈도 정우의 위치를 확인하고선 손을 깔끔하게 비웠다.
언제든 보호막을 두껍게 두를 수 있도록 정수를 아끼는 것이다.
그러곤 천천히 정우를 향해 걸어왔다.
저벅, 저벅.
‘보통 조심스러운 놈이 아니구나.’
정우는 자신과의 거리에 반비례해 점점 두꺼워지는 상대의 보호막을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속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
이에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벌겋게 물든 쇳조각이 보였다.
커터칼에서 부러져 나온 날의 일부.
“아.”
이제야 자신의 몸이 넝마가 된 상태였다는 걸 기억해낸 정우는 난감하단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러곤 곧 표정을 더욱 일그러뜨리게 됐다.
그사이 정수 가시거리 안쪽으로 진입한 상대의 정수량이 무려…….
「78,245,083」
7800만 개. 단순히 굳은 각오로 넘어서기엔 상당히 높은 벽이었기 때문이다.
정수 차이는 대략 700만 개.
“…….”
정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높은 확률로 이 생각이 현실화될 터였다.
“겁이 나나?”
사내가 정우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 같은 말을 한다.
이에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억울하진 않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걸었다.
남양주에서 보고 온 성역을 떠올린 거다.
“아닌 것 같던데.”
그러더니 오른팔로 서서히 칼날을 빚어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남조선 사람이 두 배는 많지 않았나? 넌 그냥 등신이었던 거야.”
조금의 악의도, 비꼼도 없는 말투.
사내는 정말 자신의 기준에 따라 정우를 무능력한 구원자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물론 정우도 사내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이자가 자신보다 뛰어난 구원자인 건 맞는 것 같았으니까.
결과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정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북에서 저만한 힘을 키워온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아.”
슥.
사내가 갑자기 대화를 끊더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다음엔 다시 정우를 바라보며 시원스레 웃었다.
“이제 가자. 시간 다 됐다.”
남한의 1위 구원자를 위해 1분 정도를 할애했던 듯.
“…….”
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보유한 모든 정수를 보호막에 몰아넣었다.
트드득.
여느 때처럼 그의 보호막이 다면체 형태로 바뀌자 이를 본 사내가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수 차이는 웬만한 재주론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이내 사내가 칼날을 뽑아내며 정우를 향해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헉!”
문자 그대로 번개 같은 속도. 만약 놈과 똑같이 칼날을 빚어 상대하려고 했다면 진즉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정우는 사내처럼 신체 강화까지 병행할 여유는 없었기에, 보호막의 전방에 정수를 집중시키는 걸로 대응했다. 사실상 가드만 올리고 있는 셈.
퀴이이이익!
사내의 칼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보호막 표면을 긁었고, 이 순간 보호막 밀도가 50% 밑으로 내려갔다.
‘미친!’
아마 다음 공격으로 최후를 맞게 될 거다.
정우는 공격을 마친 사내의 팔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걸 보면서, 곧장 보호막에서 가시를 쏘아 보냈다.
사내의 머리를 노린 단 한 줄기의 가시를.
취이이잇!
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비기였다.
그러나.
핏.
“허.”
놈의 투창이 이쪽의 귀를 스쳐갔듯, 보호막에서 솟구친 가시도 상대의 뺨을 베고 지나가는 데 그치고 말았다.
너덜너덜해진 복부와 허리의 구멍 등에서 오는 통증이 정확한 조준점을 잡는 데 방해가 됐던 것이다.
“이 씹……!”
깔끔하게 잘려나간 사내의 뺨 안쪽으로 누런 어금니가 맞물리는 게 훤히 보인다.
난데없이 보호막에서 물체화와 유사한 공격이 튀어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이번엔 놈도 제법 당황했는지 얼굴에 오만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고, 정우는 그걸 보자마자 놈의 뺨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콰악!
사실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한 행동이었다. 이쪽은 남은 패를 다 써버린 상태고, 상대는 아직 수백만 개의 정수 여분이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어……?”
정우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의 손가락이 정말 놈의 뺨 안쪽으로 들어간 탓이다.
보호막에 제지받지 않고 말이다. 놈이 칼날을 회수해 보호막으로 바꿀 생각까진 미처 못 하고 있었던 거다.
“헉.”
정우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을 찾아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며 팔꿈치에 힘을 줬다.
그러자 상대의 치아 사이에 맞물려 있던 손가락이 더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갔고, 정우는 이 시점에 보호막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그 대신 신체 강화에 모든 정수를 쏟았다.
스아아아앗.
정우의 피부가 파랗게 빛나자, 입이 강제로 벌어진 사내의 머리통 안쪽에서도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러고는.
콰득.
이름 모를 사내의 위턱과 아래턱이 완전히 분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