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80
182화. 적자(適者)(4)
“……!”
정우는 머리가 위아래로 분리되다시피 한 사내가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걸 봤다.
분명히 살아 있었다.
턱이 완전 쪼개지면서 일부 신경에 손상이 왔을지언정 목뼈가 뽑혀나간 건 아니라서 숨이 붙어 있었던 거다.
겁이 났다.
“이, 이익!”
정우는 전에 없이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며 사내의 입을 찢었던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케헵, 헤엑……!”
턱을 덜렁거리며 뒤로 넘어가려던 사내의 몸이 시퍼렇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 놈이 신체 강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였다.
‘미친 자식……!’
보호막 전개가 아닌 신체 강화부터 했다는 점에서 상대의 판단력이 온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어쨌든 경악스러운 수준의 정신력이었다.
“헥!”
놈은 숨찬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용케 정우의 팔을 붙든 뒤 자신의 입속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곤.
꾸드득.
엄청난 기세로 정우의 팔을 쥐어짰다.
“으, 으어……!”
전완근을 덮은 피부가 순식간에 검붉게 변색되더니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팽창했다.
하지만 때마침 소모됐던 정수가 다시 차오르고 있었고, 정우는 이걸 깨닫자마자 반대편 팔로 칼날을 빚어 내 상대의 팔을 잘랐다.
삿!
처참한 광경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절삭음.
사내는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가는 데도 신음 하나 흘리지 못했고, 대신 팔의 절단면에서 걸쭉한 느낌마저 나는 핏물을 뿜어냈다.
푸아아앗!
“윽……!”
그리고 정우는 이때가 돼서야 자신 역시 보호막을 감지 않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놈의 혈액이 얼굴은 물론 입과 눈, 귀, 셔츠 안쪽까지 마구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앗!
뒤늦게나마 보호막을 둘렀으나 이미 온몸이 시뻘겋게 물든 뒤였다.
혈액 특유의 비린내에 현기증이 날 정도.
“맙소사.”
놈의 피가 각막에 엉겨 붙는 바람에 눈앞이 캄캄했다.
정우는 보호막 유지에 심혈을 기울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미칠 노릇이군.’
지금 정수 7,800만 개짜리 구원자를 목전에 둔 채로 눈을 감고 있는 거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눈을 연신 깜빡이자 흐릿하나마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우는 땅바닥의 윤곽이 보이는 시점에서 바로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곧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비틀거리는 한 남자를 보게 됐다.
“꺽, 꺼억…….”
사내는 이제 숨이 다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고,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목 안쪽에서부터 트림 소리 같은 걸 뽑아 올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딘가를 향해 몇 걸음 걷다가 그대로.
푹.
바닥에 고꾸라졌다.
“……?”
정우는 그렇게 엎어진 사내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고, 다음엔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살폈다.
‘아직이야.’
정수 표식이 계속 사내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수 구체가 튀어나오지도 않았고 말이다.
“…….”
정우는 사내가 무방비 상태임을 알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엄밀히 말해서 이 싸움은 정우가 이긴 게 아니었다.
그저 운과 타이밍이 좋았을 뿐.
따라서 저 사내는 정우에게 아직도 미지의, 정복하지 못한 상대였다.
그런데 이미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
사내의 박살 난 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우는 홀린 듯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고, 그러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봐.”
정우가 막연히 말을 던지자 사내의 몸이 꿈틀거렸다.
다음엔 정우를 바라보려는 듯 상체를 비틀다가 도로 그만뒀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한 걸까.
턱이 뜯겨 나갔으니 말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구원자 채널을 공유하는 사이도 아니라서 이렇다 할 대화 창구가 없는 상태였다.
“…….”
정우는 정적 속에서 사내를 응시했다.
그러자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사내가 갑자기 왼팔을 살짝 들었다가 바닥에 내리쳤다.
착!
뭔가 쇳조각 같은 게 찰랑거리는 소리가 난다.
“……?”
이에 정우가 몸을 일으켜 사내에게 다가갔고, 곧 그의 왼쪽 손목에 감겨 있던 시계를 보게 됐다.
본래부터 이 사내의 소유는 아니었을 고급 시계였다.
착!
정우가 가까이 다가온 걸 인지한 사내가 또 한 번 바닥에 왼쪽 손목을 내리친다.
시계의 유리면이 상하지 않도록 시곗줄 부위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이를 본 정우는 소름마저 돋았다.
‘설마……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건가?’
아마도 맞을 것이다. 처음 대면했을 때도 대화 시간을 재고 있던 자였으니까.
그래서 턱이 뜯겨 나가고 오른팔이 잘린 상황에서도 이쪽을 향해 시간을 아끼란 이야길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어쩌면, 충분히 고통스러우니 이만 끝내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이 사내의 음성을 듣는 날이 다시 오진 않을 테니 결코 알 수 없는 일.
어찌 됐든 결착을 내야 할 때다.
스윽.
정우가 더 가까이 가자 사내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란 의미였다.
정우는 그런 상대를 보면서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재목을 어처구니없이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이쪽과 사내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파아앗.
이윽고 정우의 손에서 시퍼런 정수 칼날이 뽑혀져 나왔다.
“…….”
다음엔 지체 없이 사내의 목을 위에서부터 쑤시고 들어갔다.
푸욱.
마치 허공을 찌른 듯 너무나도 쉽게 뚫려 버리는 사내의 신체.
다음엔 예의 그 현상이 일어났다.
파파팟!
상대가 품고 있던 정수 구체가 튀어 오른 것이다.
타지의 1위 구원자답게 십여 개나 되는 구체가 생성됐고, 정우는 이것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리는 걸 멀거니 바라봤다.
‘아.’
무엇 하나 현실성 있는 게 없다.
아직도 놈이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자 정우의 의식 속에서 평가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이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소속 지역 내 모든 진입로를 닫으십시오.
사무적인 투였지만 실상은 정신 차리고 움직이란 지시나 다름없었다.
상대가 누구였든 간에 죽어 버린 이상 더는 의미 없지 않은가.
이제 남북한 두 개 지역의 통합 최강자는 누가 뭐래도 박정우였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남았으니까.
‘……전이 시점이 다가왔다고?’
비로소 정우가 상대의 시체에서 눈을 뗀다.
그러곤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바라봤다.
‘아.’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잊고 있던 목적의식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남아 있는 진입로 추적 표식이 세 개뿐이었기 때문이다.
‘세 개면…….’
정우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현재 시각, 오후 8시 46분.
남은 진입로가 아무리 멀리 흩어져 있다 해도 헬기를 타고 움직이면 오늘 안에 전부 닫을 수 있을 거다.
생각을 정리한 정우는 다시 바닥에 널브러진 망자의 몸뚱어리에 시선을 줬다.
정확히는 그의 손목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시계를 쳐다본 거였다.
슥.
정우가 허리를 굽히자 난자당했던 복부가 구겨지며 진물을 짜냈고, 이를 이겨 내지 못한 복강이 무언가를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우어억!”
누런빛을 띠는 토사물.
덕분에 정우의 몸은 이제 오물과 피범벅이 됐고, 그는 그런 꼴을 하고서 끝끝내 상대의 시계를 벗겨 냈다.
다음엔 사방에 흩어진 정수 구체를 하나씩 흡수하기 시작했다.
티틱, 스아아…….
흡수 과정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지만 이로 인한 변화만큼은 전례가 없었다.
고오오오…….
일찍이 그의 몸속에 자리 잡았던 어떤 공간에서부터 거대한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려왔고, 정우는 점차 어지러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구체를 계속 흡수해 나갔다.
티틱, 틱, 틱.
최초 7천만 개였던 정수가 바로 9천만 개까지 뛰어올랐고, 그다음엔 1억 개를 초과했다.
틱.
정수 총량이 1억 개를 넘어서는 순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바코드 찍는 소리가 났으나 정우는 그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아직 구체가 한참 남아 있었으니까.
티틱, 틱.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릿속의 숫자가 미친 듯이 돌아가며 각각의 자릿수를 바꿔 나갔다.
……103,318,297.
……110,640,361.
……125,263,304.
……133,415,870.
그러다 마침내 더는 흡수할 구체가 보이지 않게 됐다.
그리고 이때 정우가 의식 속에서 보게 된 숫자는 무려…….
「150,038,650」
1억5천만 개.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개수에 정우의 동공이 확장되려는 순간.
찌잉!
정수리에 바늘이 쑤시고 들어오는 듯한 통증이 시작됐다. 대량의 정수 흡수로 인한 후유증이 온 거다.
“허억!”
신음을 내지르는 정우의 입 사이로 푸른 불꽃이 삐져나왔고, 눈에서도 시퍼런 연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선웅이 대리자 역할을 부여받은 뒤 첫 정수 청구를 했을 때와 거의 같은 현상이었다.
그 정도로 버거운 에너지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크읍……!”
여기에 더해 난도질당한 복부와 송곳이 꽂혔던 허리에선 피가 계속 흘러나가고 있었고, 정우는 자신의 기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걸 절절히 느꼈다.
‘제길, 이러다간…….’
만에 하나 여기에서 정신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압도적인 고통에 짓눌려 있던 그의 눈이 확 뜨였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온몸을 짓누르는 졸음이 쏟아졌고, 정우는 자신의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육중한 형체를 봤다.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는데, 정우는 그걸 보면서도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의식이 거의 잠기는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끝내는.
팟.
의식이 꺼졌다.
* * *
“……니까?”
“……십 ……니까?”
이상한 소리.
정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소리가 조금 더 명료해졌다.
“……들리 ……십니까?”
이에 정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들린다.”
그리고 이 순간 그의 시야가 확 밝아졌다.
“……!”
“정우 씨!”
깜짝 놀란 정우가 눈을 번뜩 뜨자 눈코입에 거즈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어떤 놈의 얼굴이 보였다.
우주가 점지해 준 주치의, 최동훈이었다.
“어…….”
정우가 경황없는 표정을 짓자 동훈이 뒤편을 흘겨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도 어찌 된 건지 잘 모릅니다. 호랑이가…… 물고 왔다고만 들었습니다.”
“……?”
동훈의 말에 정우가 상체를 일으켰고,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달았다.
멀쩡히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 천장의 조명, 여태 보아 온 건물 중 가장 깔끔한 벽지, 널찍한 침대까지.
부산의 대성 그룹 임원 대피소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머리가 복잡해진 정우가 이마를 짚자 팔목에서부터 철럭, 하는 소리가 났다.
“뭣.”
놀랄 일 천지다. 정우는 얼른 자신의 팔목을 봤고, 다음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의 1위가 차고 있던 은빛 시계가 팔목에 채워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아.”
이때가 돼서야 지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고, 잠시 뒤 정우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몇 시입니까?”
“그것이…….”
동훈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정우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아무리 박정우라지만 이 와중에 시간을 물어보는 게 제정신인가 싶었던 거다.
“오후 11시 21분입니다.”
“11시? 그럼 용헌 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길이 엇갈렸을 텐데.”
북의 1위를 만나러 갈 당시 선웅에게 지시한 게 떠올라서였다. 오후 10시까지도 표식이 지워지지 않으면 충남으로 오라고.
그러자 동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방금 말씀드린 건 현재 시간이고, 정우 씨가 도착한 건 9시 20분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