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81
183화. 타지(1)
‘9시 20분에 도착했다고……?’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의 1위를 해치운 직후 시계를 봤을 때 오후 8시 46분이었다는 걸.
그리고 냄새가 자신을 이곳에 9시 20분경 데려왔다면 충남 중심지에서부터 부산까지를 30분 만에 주파했다는 뜻이었다.
‘그게 가능한가?’
헬기에서 맨몸 낙하를 하는 정우조차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녀석이 자신을 실어 나른 거리는 직선로로만 따져도 무려 300킬로였으니까.
신체 강화의 효율이 종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다 정우가 흠칫하며 동훈에게 다시 질문했다.
“녀석이 이곳 위치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 그것까지는… 한번 알아볼까요?”
이에 정우가 몸을 완전히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뇨, 제가 직접 물어보죠.”
그러자 동훈이 눈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냄새가 문지방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거다.
“정수를 많이 가진 사람은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동훈이 냄새가 저러고 있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했고, 정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왜인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냄새에게 다가갔다.
크릉.
정우가 접근하자 녀석이 고개를 들더니 콧바람을 세게 내뱉었다.
* 중국. 가!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냄새가 대뜸 중국으로 가자는 이야기부터 한다.
‘중국’이란 말을 남기고 사라진 민구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기 위해선 1차 지역인 이 나라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지금 못 가. 진입로 세 개를 더 닫아야 여길 떠날 수 있다.”
그러자 냄새가 고개를 갸웃하며 코를 실룩댔다.
* 닫아.
이에 정우는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네가 도와줘야지. 항상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날 데려왔을 때처럼 말이야.”
크릉.
냄새가 이빨을 살짝 드러낸다.
그러더니 허공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 느려. 빨라져!
“…….”
그래도 짐승과 대화할 수 있는 게 어디란 말인가.
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처음엔 느렸다가 점점 빨라진다는 소린가? 아버지는 이런 놈이랑 어떻게 생활한 거지?’
냄새와의 대화엔 상당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찌 됐든 다음 질문.
“그럼… 여긴 어떻게 찾아낸 거지? 누가 말해 준 거야?”
사실상 이건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백번 양보해서 냄새가 구원자 채널에 대성의 벙커 위치를 물었다고 해도 답이 나올 리 없었고, 애초에 충남에서 자신을 찾아낸 것조차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쩌억.
역시 곤란한 질문이었는지 냄새가 하품을 길게 하면서 고개를 애먼 데로 돌렸다.
하지만 상대는 박정우다.
“쓸모없으면 정수로 바꿔 버린다. 당장 대답해.”
촤아아앗!
정우가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보호막에서부터 수천 개의 가시를 꺼내 위협하자 깜짝 놀란 냄새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낮췄다.
캬아악!
* 중국!
냄새가 재차 중국행의 중요성을 알렸고, 정우는 안 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파앗!
수천만 개의 정수를 신체 강화와 보호막에 쏟은 채로 냄새의 목덜미를 잡아챈 것이다.
냄새는 무려 체중이 300킬로를 훌쩍 넘는 성체 호랑이인 데다가 보유한 정수도 어느덧 620만 개에 달했지만 1억5천만 개짜리 구원자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낑!
냄새는 겁에 질린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패대기쳐졌고, 이 소리에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 무슨 일이에요?”
“헉!”
“세, 세상에…….”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호랑이의 멱을 잡은 채 주먹을 들이대고 있는 정우의 모습이었다.
* …….
상두, 봉남 등 짐승 각성자들이 왜인지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이 사태를 조용히 관전하고 있던 동훈이 잠겨 있던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훈육은 바깥에서 해 주시면 어떻습니까? 마침 비도 그쳤는데.”
지금만 해도 침실 문짝이 거의 떨어져 나갈 위기여서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나머지 일행은 오늘 밤을 여기에서 보내야 하지 않는가.
이에 정우가 동훈을 쳐다보고는 다시 냄새에게 눈을 돌렸다.
“나가서 처맞기 전에 대답해. 여기 위치를 어떻게 알았어? 누가 말해 준 거냐.”
슥.
이번엔 턱이 아작 날 거라는 듯 정우가 냄새의 수염 근처에 주먹을 갖다 대니 비로소 냄새가 납작하게 접어 놨던 앞다리를 꿈틀댔다.
* ……목소리.
“목소리? 똑바로 말…….”
험악한 표정을 짓던 정우가 이내 말을 멈춘다.
냄새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알 것 같아서였다.
“목소리가 여길 알려 줬다고?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말하는 거야?”
* …….
냄새에게서 확답을 들을 순 없었지만 녀석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우의 추측이 맞았던 거다.
머릿속의 목소리. 즉, 냄새의 평가관이 정우를 어디로 데려가야 살릴 수 있을지 일러준 거였다.
아니, 그런데 냄새를 담당하는 자가 어떻게 냄새가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장소를 알고 있단 말인가?
정우의 생각에 이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나, 자신의 평가관인 ‘다467’이 냄새의 평가관에게 벙커 위치를 전달했다.
만에 하나 그런 거라면 평가관 사이에도 구원자 채널 같은 게 있다는 뜻이 된다.
둘, 지구가 직접 냄새의 평가관에게 벙커 위치를 전달했다…….
만약 두 번째 가설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력한 행성 구원자에 대한 호의?
당장이야 덕분에 살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구든 평가관이든 이런 식으로 간접 개입을 한다면 훗날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정우가 자신의 평가관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놈은 여느 때처럼 기척을 숨긴 채 대답하지 않았다.
* * *
오후 11시 30분.
정우는 벙커 밖으로 나와 있었다.
물론 냄새를 훈육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놈은 이제 제법 고분고분했고, 따라서 앞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는 이 나라에 남은 세 개의 진입로를 동이 트기 전에 전부 닫는 것뿐이었다.
“밤새 달릴 수도 있나?”
정우가 이렇게 묻자 어두컴컴한 도심을 응시하던 냄새가 뒤를 돌아봤다.
* …….
누가 동물에게 다양한 표정이 없다고 했는가.
지금 냄새는 누가 봐도 정우를 경멸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국으로 빨리 가고 싶다면 날 빠르게 실어 나르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최대한 무리를 해라.”
정우는 이 말을 하며 냄새의 등허리를 툭 쳤고, 이에 녀석이 몸을 낮추며 사람이 올라타기 용이한 자세를 취했다.
일찍이 민구를 태우고 달려 봤기에 일종의 배려를 해 준 것이다.
스윽.
다소 엉거주춤한 자세로 냄새 위에 오른 정우가 표정을 굳힌다.
“…….”
막상 올라타 보니 여러모로 어색했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냄새의 몸이 돌덩이 같진 않아서, 근육과 뼈의 움직임이 허벅지와 엉덩이 살에 고스란히 와 닿았다.
또한 이놈이 달리기 시작할 때 이쪽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고민이었다.
‘아버지는 이놈을 어떻게 타고 다니신 거지.’
정우가 멍한 표정으로 호랑이를 탄 민구를 그려 보고 있자 냄새가 콧김을 내뿜으며 전방으로 두어 걸음 움직였다.
그러자 네 개의 발이 엇갈릴 때 발생하는 몸통의 중심 이동이 정우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덕분에 고속 질주가 시작됐을 때 어떤 사달이 날지를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을 타는 게… 가능한가?’
확실히 호랑이는 승용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너무 자유분방하고 불규칙해서 탑승자가 제대로 대응하기란…….
홱!
정우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냄새가 갑자기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헉!”
아까 두드려 맞았던 걸 복수하려는 게 아닐까?
녀석은 문자 그대로 번개 같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정우는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황급히 울긋불긋한 목덜미를 팔로 휘감았다.
그러자.
홰액!
정우의 하체가 허공으로 붕 뜨면서 마치 냄새가 사람을 망토처럼 두른 꼴이 돼 버렸다.
호랑이가 달릴 때는 뒷다리와 꼬리뼈 사이… 즉 엉덩이의 윗부분에 어마어마한 탄력이 발생하는데, 정우가 이걸 생각 않고 본인의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긴 탓이었다.
“으, 으억!”
당황한 정우가 전신에 푸른빛을 휘감으며 냄새의 목을 꽉 조이자, 드디어 놈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목이 부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다.
캬오오!
* 아파! 숨. 막혀!
냄새의 입에서 가냘픈 울음이 뿜어져 나왔고, 이에 깜짝 놀란 정우가 손에서 힘을 빼자.
파앗!
그의 몸이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콰드드득!
그새 벙커에서 얼마나 멀어진 건지 건물 대신 나무들이 정우를 받아 낸다.
“어억…….”
신체 강화에 보호막까지 방비를 철저히 한 상태였지만 충남에서의 전투로 심한 상처를 입은 터라 몸을 굽히기만 해도 통증이 상당했다.
“아…….”
그가 바닥에 누워 계속 신음을 토하자 멀뚱히 서 있던 냄새가 달려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일어나.
그러고는.
* 중국!
앵무새처럼 주기적으로 ‘중국’이란 단어를 외쳤다.
“미친 새끼.”
끝내 헛웃음이 나오고 만 정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야지였고, 도시로 보이는 각진 덩어리가 시야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여긴.
‘대구로 향하는 고속 도로 어디쯤이겠군.’
발치의 진입로 표식 중 가장 큰 것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으니 얼추 맞을 거다.
“빠르긴 확실히 빠르네.”
정우는 냄새가 기대 이상으로 쓸모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전투 시에도 이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상당히 잽싸게 움직일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이쪽이 그 위에 올라타서 전투를 할 수 있냐는 점이겠지만…….
“다시 해 보자. 이제야 좀 감이 잡히는 거 같으니까.”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짓을 하자 냄새가 콧김을 세게 뿜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중국 간쑤 성 외곽의 어딘가.
밤이 깊었건만 민구는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중국, 그것도 가장 가까운 나라가 몽골이라는 낯선 지역에서의 첫 밤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드르릉, 드릉, 컥! 트르릉…….
불과 오륙 미터 옆에서 북의 4위 구원자가 코를 요란하게 골아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보, 17세, 남성.
물론 꼭 저 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소싯적 채권자들을 피해 전국을 유랑할 때가 있었는데, 당시에도 여인숙에만 가면 십중팔구 잠버릇이 고약한 사람이 꼭 있었다.
여인숙을 찾는 이유가 대개 값싼 잠을 청하기 위함인데, 이런 곳에 팔자 좋은 투숙객이 있겠는가?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터라 자연스레 잠버릇도 고약해진 거다.
그리고 지금 민구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17세의 순위권 구원자.
그것도 북한 출신이니 보통 사연이 아닐 터.
“…….”
민구는 침울한 눈으로 계속해서 상대를 시야에 담았다.
피차 애처로운 처지다.
하지만 이 연민 역시 민구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이 늦은 밤까지 눈을 번득이고 있는 이유는.
‘안 돼. 약속했다.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은 지켜야 해. 게다가 저 녀석이 날 살려 줬잖아.’
상대를 죽이고 싶어서였다.
놈의 정수가 탐난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실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국적.
동보가 언제부터인가 이쪽의 출신지를 떠보기 시작한 거다.
‘이미 알아챘어. 다만 확신을 가지고 싶은 거겠지.’
그런 걸 굳이 왜 물어보는 걸까?
만약 이쪽이 남한 출신인 걸 알면?
그럼 어떻게 북의 구원자가 됐느냐 물어올 테고. 그렇게 되면…….
‘제길.’
민구는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 전에 생각을 멈췄다.
그래도 이 앞에서 코까지 골아가며 자는 걸 보면 당장 자신을 죽일 생각까진 없는 것 같았다.
‘의리가 있는 놈이야. 오히려 내가 지금 못난 생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민구의 정수 총량은 1,100만 개.
반면 동보는 1,300만 개나 가지고 있었다.
즉, 이쪽이 약자다 보니 조바심이 나서 도리어 먼저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냐, 민구야.’
민구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몸 안쪽에서부터 손끝까지 스멀스멀 밀려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후.”
날숨을 크게 뿜는다.
그러곤 작심을 한 표정으로 상체를 천천히 눕혔다.
다시 잠을 청해 볼 요량으로 말이다.
그러자.
드릉, 드르릉, 드르……!
요란스레 이어지던 동보의 코 골음이 갑자기 멎었다.
“……!”
이에 민구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다시 일으켰고, 곧 동보의 목소리가 어둠 저편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