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82
184화. 타지(2)
새벽 2시 14분.
제법 늦은 시간이었지만 성역의 의사당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중성이 업무를 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당장 수 시간 뒤면 5일 차 조례가 시작될 예정.
따라서 사실상 성역의 총괄 책임을 지고 있는 중성은 동이 트기 전까지 주요 안건을 정리해야만 했다.
스슥, 슥.
극히 일부 인원에게만 허락된 개인용 필기구.
중성은 이 귀한 물건으로 또 그만큼 귀한 종이 위에 현재 성역의 문제점을 조심스럽게 적어 나갔다.
어느덧 성역에 머무는 사람의 수가 112명에 달하게 됐고, 이에 따라 온갖 잡다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단연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성역에 머무는 사람 중 절대다수는 기술자다.
그러다 보니 각자 이곳에서 맡은 일이 있었고, 대체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성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자들도 자신이 이곳에서 어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지를 금방 깨닫게 된다는 거다.
즉, 성역이 더는 자신을 함부로 내치거나 죽일 수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
이건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를테면 정기 배식 도중 두 사람이 실수로 몸을 부딪치는 바람에 한쪽의 음식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얼핏 생각하면 시국이 시국인 만큼 떨어진 음식이야 다시 줍고 서로 사과한 뒤 헤어질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대번에 시비가 붙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음식을 떨어뜨린 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와서 부딪쳤으니, 그쪽이 떨어진 음식을 가져가라고.
그럼 상대편은 어떻게 나오겠는가.
설령 자신이 부딪친 게 맞다고 해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 것을 내주고 떨어진 음식을 가져가기엔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또한 자신이 부딪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엔 백이면 백 상대를 가해자로 몰아세웠다.
결국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큰 말다툼이 벌어지거나 심하면 몸싸움까지도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이건 두 사람이 각자 본인의 가치가 엇비슷하다고 느낄 때의 이야기.
한쪽이 기술자고 다른 쪽이 ‘잉여 인력’이라고도 불리는 임산부의 남편이거나 할 때는 사태가 상당히 심각했다.
표면적으론 오히려 말끔하다.
상대적으로 가치 열위인 남편으로선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좋게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피해자인데 상대가 이쪽더러 떨어진 음식을 가져가라고 요구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본인은 물론 아내와 자식에게도 먹여야 할 음식인데 말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순간적으로 살의마저 품는다.
심지어 이 케이스는 중성이 우연히 배식장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늦은 밤까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있는 거다.
‘민사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개인 간의 문제를 조율하기 위해 민사법을 제정한다면 피고가 판결 내용을 이행하도록 강제성이 부여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지금이야 성역의 주인이 아직 이 나라에 있기에 의원들의 결정에 힘이 있지만, 언젠가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더군다나 민사가 생기면 종래엔 형사법도 만들게 돼. 그리고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러나 만약 민형사법을 꼭 만들어야 한다면 지금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아직 의회에 힘이 있을 때 말이다.
“…….”
그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자 누군가 의사당 문을 두드렸다.
“중성 씨, 계십니까?”
시설 관리자 주영재였다. 소위 ‘똥물 사건’으로 회자되는 변소 범람 건으로 주가가 상승한 설비 계통 기술자 중 하나.
나름대로 노하우와 기초 지식을 가진 자들도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저들이 없다면 얼마나 더 큰 문제가 터지게 될 것인지 모두가 고민하게 된 거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예, 무슨 일이시죠?”
중성은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문을 열어 영재를 맞았다.
그러자 영재뿐만 아니라 수의사 김경채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각각 한 정씩 파지한 소총이 중성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두 사람 모두 동초 근무 중이었던 것이다.
“전 오늘 당번이 아닌 걸로 아는데 무슨 일로…….”
왜인지 긴장한 중성이 시커먼 총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영재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선웅 씨가 부르십니다. 남쪽 경계부입니다.”
“선웅 씨가요?”
이에 중성이 영재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쪽 경계부. 성역 중심지 근처에 세워진 이곳 의사당에선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날이 어두운 탓이다.
“…….”
하필 직전에 형사법과 강제성 등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차라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걱정이 괜히 솟아올랐다.
이를테면 뭐 쿠데타라든가.
물론 대리자인 선웅이 완벽한 정우 측 사람이기에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 아니지, 불가능하진 않다. 수면 시간을 이용하면 성역의 누구든지 선웅을 죽일 수 있지 않은가.
선웅의 전담 불침번만 처리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런 다음엔 선웅의 이름을 팔아 의원들을 불러 모은 뒤 한꺼번에 처리.
“…….”
이렇게 중성이 망상 아닌 망상을 하고 있자 영재가 이상하단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중성 씨? 괜찮으십니까? 몸이 편찮으시더라고 전할까요?”
“아,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 좀 했습니다.”
영재의 마지막 말에 비로소 안심한 중성은 한층 편해진 얼굴로 의사당을 나섰다.
“됐습니다. 혼자 가지요.”
그는 동초 근무자들의 호위를 마다하고서 잰걸음으로 어둠 속을 헤쳤다.
저벅, 저벅.
한때 공명수의 어둠이 침식해 있던 대지.
이제 그 땅은 황무지가 됐고, 특히 성역에서 아직 용도를 특정하지 않은 남부 쪽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선웅은 왜 이곳으로 중성을 불러들인 것일까.
한참을 걷자 드디어 저 앞쪽에 어렴풋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신장으로 보건대 선웅이 거의 확실했다.
은은한 금빛을 띠는 성역의 보호막 바깥엔 아무도 없었으니 오로지 대화를 위해 이 자리를 만든 것이리라.
“선웅 씨.”
상대와의 간격이 10미터가 되어 갈 때쯤 중성이 먼저 기척을 냈다.
그러자 큼직한 실루엣이 뒤를 돌아봤다.
역시 선웅이 맞았다.
“오셨군요. 여기까지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가급적 조용히 대화하고 싶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가.
중성이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선웅이 허공에 시선을 걸어 둔 채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우 씨가 곧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상황이 거의 정리 돼 가는 느낌이에요.”
“…예?”
뜬금없는 소리에 중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상대가 정우와 연결된 유일한 존재라는 걸 기억해 낸 덕이었다.
“방주가 계속 커지고 있나 보군요.”
“네.”
중성의 말에 선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밤사이에 20석이나 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선 선웅도 긴장이 됐는지 침을 힘겹게 삼켰다.
“정우 씨가 보유한 정수가 1억 개를 넘어 버렸어요. 지금 1억7천만 개입니다.”
“이, 일억…….”
감조차 오지 않는 규모에 중성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렇다는 건…….”
“예, 저번 손님도.”
성역에 찾아왔던 북의 1위.
그 무시무시해 보이던 구원자도 정우를 꺾지 못한 것이다.
물론 실상은 다소 달랐지만 두 사람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와요. 갑자기 진입로를 몰아서 닫기 시작하신 것도 그렇고, 조만간 돌아오실 겁니다. 그러곤 다시 떠나시겠죠.”
선웅이 말한 ‘떠난다.’라는 것은 1차 임무를 마친 구원자들의 파견을 의미했다.
이번엔 지방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완전히 타국으로 가 버리는 거다.
이는 즉 성역이 조만간 혼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그렇게 떠난 구원자가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어쩌면 이대로 독립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영원히.
“그럼 저희 나름대로도 준비가 필요하겠군요.”
중성은 이제야 선웅이 자신을 따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대리자도 이쪽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던 거다.
지금이야 최상위 구원자의 대리자로서 대량의 정수를 끌어올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지만 만에 하나 정우가 타국에서 죽어 버리면 그 순간 일반인으로 강등이다.
정우가 여태 살아 있음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곧 떠날 거란 사실에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추측이나마 해 본다면 언제쯤 돌아오실 것 같습니까?”
중성의 물음에 선웅이 미간을 구기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빠르면…….”
그러나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그 해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타앙!
큰 징을 친 것만 같은 굉음.
그러곤 어떤 문구가 모두의 시야에 드러났다.
「소속 지역 내 모든 진입로가 폐쇄되었습니다!」
| 지금부터 대한민국의 폐쇄 권능자 5인이 전이 결정을 합니다.
| 더는 본 지역에서 진입로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 더는 본 지역이 파견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지 않습니다.
* * *
같은 시각, 전북 익산 도심지.
정우는 이제 ‘터’가 돼 버린 진입로 앞에 서 있었다.
시커먼 통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보랏빛 구체 형태의 단말기가 허공에 홀연히 남았다.
슥.
정우가 손을 대자 예의 문구가 나타난다.
[진입로를 폐쇄했습니다!]| 더는 이 지역에 진입로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방주 기능이 활성화됐습니다!]| 현재 112/150 개체를 탑승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150개…….’
정우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확보한 방주의 좌석 개수를 한참 쳐다봤다.
초기 예상했던 200개에 한참 못 미치는 양이다.
예측이 틀렸던 건지, 아니면 먼저 죽은 북의 구원자 말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인지 이젠 알 도리가 없게 됐다.
크릉.
냄새가 지친 얼굴로 땅바닥에 엎드리며 하품을 한다.
“수고 많았다. 이상한 거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정우는 냄새에게 경고를 한 뒤 시야에 새로 나타난 문구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에겐 이곳에서 할 일을 다 했으니 떠날 준비를 하란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아마 냄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이- 잔류와 파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십시오.」
| 잔류
소속 지역에 잔류합니다. 잔류 기간 동안 지역 내 모든 정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 전이 재선택이 가능합니다.
| 파견
진입로가 남은 타 지역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파견된 지역의 진입로가 모두 폐쇄되기 전까지는 전이 재선택이 불가능합니다.
‘하루가 지난 뒤라면 24시간을 말하는 건가.’
정우가 머릿속에서 혼잣말을 하자 지난번엔 꿈쩍도 하지 않던 평가관이 기척을 드러냈다.
-그렇습니다. 잔류 선택 시점으로부터 24시간입니다.
‘파견은 선택 즉시 원하는 나라로 이동하는 거고.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전이 선택은 얼마나 유예할 수 있죠?’
파견도 잔류도 고르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거다. 그는 자신이 떠나기 전 성역을 한 번 들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골치 아픈 일을 잔뜩 떠맡은 중성과 선웅을 위해서 말이다.
-12시간 이내에 선택을 마쳐야 합니다. 제한 시간을 초과할 경우 무작위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평가관의 말을 조금 꼬아 보자면 말을 듣지 않는 놈은 적당한 곳에 던져서 정수로 바꿔 버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대번에 정우의 다음 질문이 쏘아져 나갔다.
‘혹시 잔류를 고른 상태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까? 전이가 불가능할 때도 제멋대로 넘어오던데?’
북의 구원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쪽 진입로가 남아 있음에도 남한으로 무단 침입을 하지 않았는가.
이에 평가관이 잠시 뜸을 들였다.
-……가능합니다.
‘아, 그럼.’
가설을 확인받은 정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답을 내린 것이다.
잔류를 골라 국내에 남은 정수를 모두 흡수한 뒤 곧바로 냄새를 혹사시켜 중국으로 향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