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84
186화. 타지(4)
“······맙소사.”
희중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고 있지도 않았다.
현실 감각이 산산조각 나서였다.
정아도 눈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남편보단 의지가 한층 강했다.
툭, 툭.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을 뒤로 내밀어 희중의 몸을 찔러 댈 정도는 됐다.
어서 행동하라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모든 신경이 ‘불청객’의 실루엣에 쏠려 버린 희중으로선 아내의 경고를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아······.”
그가 침음을 내뱉는 사이.
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까만 줄무늬가 그어진 누런 다리가 또 한 걸음을 디뎠다.
크릉.
텔레비전에서나 들을 수 있던 그 소리가 30평 남짓 되는 실내를 가득 채운다.
‘뭐, 뭐야. 대체?’
희중은 이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어느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위를 가득 채웠던 푸른빛은 어느새 사그라졌고, 대신 사내와 호랑이의 몸 주변에 걸쭉한 느낌마저 드는 푸른 아우라가 일렁였다.
“헉.”
비로소 정신이 든 희중이 본능적으로 ‘파견 시스템’을 향해 시선을 돌렸으나.
“기다려.”
사내, 박정우가 짤막한 대사와 함께 손을 휘두르는 바람에 무산됐다.
쐐애애애액!
눈 깜짝할 사이에 정수 창이 쏘아져 나간 탓이었다.
“······!”
이때 정아는 창이 생성되는 장면까진 보지 못했다. 대신 주변 공기가 뜨거워졌다는 느낌을 통해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아챘고, 곧 그 결과를 보게 됐다.
푸아아아악!
오른쪽 다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남편의 모습 말이다.
“어어, 억······?”
희중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기운 것에 먼저 놀랐고, 이게 다리가 잘려 나간 탓이라는 건 바닥에 머리를 찧고 나서야 깨달았다.
“읍······!”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어마어마한 고통이 단전을 치고 올라오더니 턱 끝까지 마구 쑤셔 댔다.
다리에선 핏물이 얼마나 많이 새어 나오는지 커다란 웅덩이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코팅된 장판을 따라 사방으로 쭉쭉 밀려 나갔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정아의 이성이 붕괴됐다.
“이익······!”
갑자기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뭔가를 움켜쥐듯 손에 힘을 주더니 정우와 호랑이를 향해 달려든 거다.
그러나 비각성자인 그녀가 보호막을 뚫을 수 있을 리 없었고, 정우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희중을 향해 말했다.
“이젠 파견으로 도망가도 소용없지 않나. 그냥 여기에서 죽는 게 나을 거야.”
너무나도 건조한 음성이라 이를 들은 희중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엄습한 고통 덕에 파견 시스템과의 연결이 끊어졌고, 몸속의 정수 또한 불이 꺼졌다 다시 들어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 그럼 저 사람만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여한이 없을 겁니다.”
식은땀 때문에 얼굴이 번들거리기 시작한 희중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정우를 향해 나아갔다.
“······.”
그러나 앞서 폭우의 ‘퍼포먼스’를 눈앞에서 보고 온 정우였기에 이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일진 않았다.
그렇다고 대번에 여자를 죽일 마음이 든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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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 아직 자리가 꽤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리가 남는다 해도 기준에 맞지 않는 자를 성역에 들일 순 없었지만 이걸 직접 고민하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네 아내인가? 남양주에 성역이 있으니 재주껏 그리로 가라.”
일단 가면 여자를 살리든 죽이든 성역의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다, 라는 뒷말이 더 있었지만 정우는 굳이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게 될 희중에겐 필요 없는 정보였으니까.
“가, 감사합······.”
이에 희중이 창백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려 했으나.
팟.
정우의 손에서 뻗어 나간 푸른 파동이 그를 지워 버렸다.
그러자 정우의 보호막 표면을 손톱으로 긁어 대고 있던 정아가 진노한 울음을 내뱉었다.
“아아아아악!”
목 안쪽이 다 찢겨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친 소리였고, 정우는 그런 그녀를 잿빛 동공으로 바라봤다.
“억울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무난하게 죽은 편이다. 살고 싶다면 성역으로 가. 남양주 근처로 가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거다.”
정우가 이 말을 끝으로 냄새의 등에서 내려오자 광분한 정아가 그를 쫓아 와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이 미친 새끼가······!”
탕!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로선 정우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고깃덩이처럼 변한 희중의 시체 앞에 정우가 섰고, 이내 그가 남긴 정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티틱, 스아아아······.
“이익······!”
남편의 유산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본 정아가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크릉.
여태 얌전히 있던 냄새가 희중이 있던 자리로 슬그머니 다가간 것이다.
* 배고파.
정우의 지시에 따라 수백 킬로를 쉬지 않고 달려온 녀석이다.
당연히 지금 극심한 시장기를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크륵.
놈은 선혈 가득한 희중의 시체를 보며 힘겹다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먹어?
그리고 이 소릴 들은 순간, 새하얗게 변해 버린 정아의 의식.
“아······!”
그녀는 너무 기가 막혀서 비명을 지를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벙어리가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보려는 것처럼 기괴한 신음만을 거듭하다가 끝내.
다닥!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걸음으로 다가와 남편의 신체 조각들을 몸으로 덮었다.
“안 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와줘! 도와줘!”
그녀는 두서없는 대사를 내뱉다가 이내 핏물 가운데에서 엉엉 울었다.
“······.”
정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가슴속 깊은 곳에 찌릿한 느낌이 잠깐이나마 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이 상황에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생생한 폭우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슥.
정우의 손이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냄새의 이마로 향한다.
“다음에. 조금만 참아. 곧 먹을 게 많은 곳으로 갈 테니까.”
그러곤 시선을 돌려 구원자 채널을 봤다.
아까부터 쉬지 않고 채팅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7] 기사도 :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어쨌든 더 이상 싸울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7] 빛 : 성역을 찾아가야겠죠. [11] 청하 : 이게 진짜 다 끝난 거라고요? [25] 초심 : 뭔가 좀 이상한데. 그럼 우린 여기 남아서 먹고살 궁리나 하면 되는 건가······.대한민국의 모든 진입로가 사라진 지도 벌써 수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순위권에 들지 못한 채 이 결말을 맞이한 자들은 정말 ‘끝’이 온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여태 생존을 위해 또는 순위권에 들기 위해서 살인을 감행해 왔는데, 난데없이 모든 진입로가 사라졌다는 공지가 날아왔으니 당황한 거다.
심지어 순위권자들은 ‘전이’라는 것을 통해 다음 임무를 하달받았다. 그럼 나머지는?
[41] 모래알 : 분명히 지구의 모든 진입로가 사라져야 한다고 그랬는데······. [20] 매 : 중요한 건 당장 이 나라엔 진입로가 없다는 거고, 순위 경쟁도 끝났다는 거겠죠. 우리끼리 더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8] 바람 : 글쎄요, 아무리 봐도 여전히 순위가 매겨지고 있는데······?모두가 찜찜한 마음으로 각자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고, 정우는 이 과정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1] 인간 : 이제부터 이 나라에 남은 모든 각성자를 죽일 거다. 하지만 기술자나 임산부, 어린아이 등은 조건부 제외다. 그러니 살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성역으로 보내. 남양주에 있다.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술렁이는 최초의 채널.
[25] 초심 : 무, 무슨 소리십니까? [8] 바람 : 저 사람이 왜 여태 여기 있죠? 1위잖아··· 다른 나라를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20] 매 : 설령 우리가 사람을 보낸다고 해도 남양주까지 무사히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20위, 매는 소중한 사람을 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반응한 반면 ‘매’만이 정우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지 않은가.
본인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가진 자만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에 정우는 매의 물음에 답을 해 줬다.
[1] 인간 : 당신 생각보다 각성자 수가 빠르게 줄어들 거야. 그러니 네 사람들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 [20] 매 : ······.터무니없을 정도의 호언이었지만 화자가 이 나라 1위 구원자다 보니 괄시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 나라엔 이제 진입로가 없다. 그럼에도 1위가 여태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8] 바람 : 미친 새끼.결국 8위, 바람이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건 결국 상대의 말에 동요했다는 걸 자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겁이 난 것이다. 1위라면 정말 본인의 말대로 국내 모든 각성자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각성자들을 찾아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30] 태호 : 대체 왜 계속 깽판인 거야, 씨발. [45] 적안 : 우리 좀 그냥 놔두면 안 됩니까?정우의 도발 아닌 도발에 여태 잠자코 있던 구원자들마저 등판했고, 곧 욕설, 목숨 구걸, 거래 제안 등을 위한 문장으로 채널이 가득 찼다.
그리고 이걸 본 정우는.
[1] 인간 : 이게 이곳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다. 살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성역으로 보내. 난 지금 출발한다.이 말을 끝으로 다시는 채널에 나타나지 않았다.
* * *
오전 7시 16분.
지구의 행성 폐쇄 5일 차 현황 보고가 시작되기까지 44분이 남은 시점.
이때 성역의 남부 외곽 근무자는 전직 농촌 정책 국장인 박태휘와 광수대 출신의 형사 이성태였다.
담배가 워낙 귀한 시대가 돼 버린 탓에 둘은 나무껍질을 씹으며 헛헛함을 달래고 있었다.
거대한 금빛 보호막이 드리워진 성역의 경계면에서 말이다.
“······.”
둘은 한동안 성역 바깥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고, 그러다 태휘가 먼저 정적을 깼다.
“내가 좀 들은 게 있는데.”
“어떤······.”
“법을 다시 만든다고 하더만.”
이에 성태가 무슨 소리냐는 듯 태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있지 않습니까?”
성태는 태휘가 말한 법이라는 게 성역의 규칙을 말하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한때 법의 수호자였던 그다. 그런데 그 법이 다시 생긴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부담감부터 느낀 것이다. 아이러니했다.
“지금 것은 법이라기보다는 약속··· 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법은······.”
성태는 뒷말을 삼켰다. 법은 그렇게 갑자기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라는 말을.
이곳의 모두가 기성 세계에서 온 자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과 같아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긴 엄연히 새로운 세계.
애초에 시원(始原)부터가 다르다. 기존 가치관으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 인물에 의해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법’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면 기존 가치관을 끌어올 수밖에 없을 터.
이에 따라 여러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적어도 갖은 현장에서 법을 집행해 온 성태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잘 안 될 겁니다. 법··· 아니, 정의라는 걸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려 들면 모를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방식으론 안 돼요. 문제가 생길 겁니다.”
“문제?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거요?”
태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에 성태가 무어라 부연을 하려는 찰나.
타닥! 타닥!
보호막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큰 발소리가 났다.
“······!”
기척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은 허겁지겁 서로에게 붙여 놨던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고, 곧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게 됐다.
타닥, 타닥, 탁!
뭔가 좀 이상하다 싶던 발소리.
다름 아닌 말발굽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