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88
190화. 새 땅, 새 법(3)
“흡…….”
숨이 절로 꽉 막혀 온다.
성역 중심부를 가득 채운 백여 명의 사람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정우와 친분 내지는 신뢰가 제법 쌓였다고 자평하던 ‘원년 멤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 봐야 겨우 하루 아니던가? 박정우가 성역을 떠나 있던 시간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나타난 정우는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모습 때문이 아니다.
‘뭐, 뭔가…….’
중성은 정우에게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위화감을 억지로 밀어내며 어색한 동작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오셨군요. 마침 조례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우가 단 위에 나란히 선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대리자, 조선웅.
초대 의원이자 사실상 성역의 총괄자인 김중성.
의료진의 리더이자 의원 중 하나인 윤재희.
마찬가지로 의원 중 하나이면서 굴삭기 기사인 김용철.
그리고 역시나 마지막 의원은 이 자리에 없었다.
박민구 말이다.
* 중국!
냄새가 기다렸다는 듯 입에 붙은 그 단어를 외친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가자는 뜻이었다.
이에 정우는 냄새의 등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로 중성을 향해 말했다.
“이제 전 중국으로 갈 겁니다. 일주일 치 식량과 쓸 만한 물건이 있으면 좀 챙겨 주십시오.”
“아, 물론입니다.”
주문을 받은 중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뒤편의 성호를 향해 무언가 지시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호가 어디서 커다란 배낭을 가져왔다.
정우가 올 것을 대비해 중성이 이미 준비해 놨던 것이다.
“저, 그런데 냄새…… 씨의 식사까지는 완전히 챙겨 넣지 못했습니다. 두 분이 함께 드신다면 대략 4일분, 정우 씨 1인 기준으론 14일 분량입니다.”
중성의 이 말에 정우가 허리 밑의 냄새를 슬쩍 쳐다봤다.
“예, 이 녀석 식량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
저게 무슨 의미일까.
한때 냄새와 함께 수색 작업을 나가 본 일이 있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먹이겠단 뜻이리라.
“물건도 이 안에 다 들어 있는 건가요?”
“저희 생각에 요긴하게 쓰일 것 같은 물품으로 최대한 채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성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답례했다.
그러곤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면서 다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시기 전에 한 가지 승인해 주셔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으음, 그것이…….”
중성의 표정이 상당히 비장하다.
그리고 정우는 그런 상대의 표정에서 신뢰감을 느꼈다.
어찌 보면 성역을 어떻게 굴리든 당장 중성 본인과는 크게 상관이 없지 않은가?
올해 나이 62세. 성역의 다음 세대가 주도권을 잡았을 때쯤엔 이미 죽었거나 거의 죽어 가는 상태일 것이다.
그러니 사실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현재 인원만 적당히 관리하면 그의 삶에 큰 풍파는 없을 터.
그럼에도 중성은 항상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걱정했다.
“좀 껄끄러운 화제입니까?”
정우가 다음 대사를 재촉하자 중성이 장내를 슥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간을 더 지체하진 않았다.
“사형 내지는 처형 제도를 도입해도 될는지요? 이미 방주에 탄 사람을 저희가 죽여도 되는지 여쭙는 겁니다.”
“……!”
상당히 파격적인 워딩에 장내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심지어 중성은 외교부 출신의 인물이다. 어휘 사용에 민감한 사람인 만큼 이번 대사는 다분히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자 정우가 주변을 눈으로 훑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아직 일이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전국에서 이리로 사람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여전히 방주에 탈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예……?”
이 대답은 중성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곧 정우의 말이 이어졌다.
“더 뛰어난 인재가 찾아왔다면 성역의 자리 하나를 비워야겠죠. 자리를 만드는 방법으로 사형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그래야 할 테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치곤 너무나도 태연한 어조다.
그래서인지 성역의 모든 이는 현실 감각이 없는 듯한 얼굴로 정우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책임감 있게 주도적으로 결정하세요. 전 이제 여길 떠날 거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결정에 대한 책임은 여러분 스스로가 지는 겁니다.”
“…….”
이 말엔 중성은 물론 성역의 그 누구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단 한마디도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이 나라는 이제 진입로로부터 해방됐고, 앞으로 써 나갈 역사가 40여 일이 될지 수백 년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독립적 존재가 된 것은 자명했다.
그러니 이젠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박정우라는 인물이 사라져도 기틀이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아……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곧 중성이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고, 정우는 마지막으로 장내를 다시 한번 둘러본 뒤 짤막한 말을 남겼다.
“아, 그건 그렇고. 조만간 용헌 씨가 동물들을 데리고 나타날 겁니다. 원만하게 해결하길 바랍니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 * *
오전 10시 14분.
평안북도에 시퍼런 빛줄기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정우와 냄새였다.
쏴아아아아앗!
냄새의 등에 올라탄 정우의 귀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파공음 외엔 들리는 게 없었고,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꾸룩.
이윽고 정우의 다리 사이에 끼워진 냄새의 몸통에서부터 굵직한 울림이 올라왔다.
냄새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전조 증상이었다.
“조금만 더 힘내. 거의 다 왔다.”
정우는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한 막으로 시선을 줬다.
마치 성벽처럼 직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늘어진 이 막은 전방의 넓은 들과 야산 따위를 가로지르며 생성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지역 간의 경계선이다.
그리고 일찍이 남에서 북으로 넘어올 적에도 보고 온 바였다.
질감은 정수 보호막의 그것과 아주 흡사했는데, 적어도 남북 경계면에서 본 그것은 정우와 냄새를 가로막거나 하진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둘을 들여보내 줬다.
그렇다면 중국으로의 진입부에 생성된 이번 장막은 어떨까?
중국은 앞서 거친 두 나라와 달리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지역이지 않은가.
* 숨 차!
냄새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녀석도 저 장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탓이다.
타탓!
둘은 고속으로 들판을 가로질렀다.
중국. 인구 14억, 토지 면적만 해도 한반도의 44배.
그런 나라에 난데없이 지구의 무차별 살인 지령이 떨어졌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정우는 점점 가까워지는 푸른 장막을 응시하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토지 면적 대비 인구수는 한국이 앞선다. 현시점 중국의 평균 정수량이 압도적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물론 이 가설을 실전에 적용해선 안 된다는 걸 정우도 잘 알았다.
실제 현장에서는 평균 정수량이란 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마주치는 적 중 가장 위험한 게 누구인가? 일대의 최강자다.
즉, 상위권자들의 정수량이 의미가 있지 중하위권자들이 정수를 얼마나 가졌냐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14억 인구란 요소는 예측 불가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베이징만 해도 인구가 2천만. 대한민국 총인구의 20퍼센트가량이 거주하는 서울의 두 배다.
이것만 봐도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탄생했을 각성자들이 얼마나 강할지 알 수 있다.
‘이대로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면 사실상 도박이다. 웬만해선 나보다 강한 자를 만나지 않겠지. 운이 좋아 그렇게 하루 이틀 정도를 버틴다면 나 역시 중국의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진입 첫날에 바로 더 강한 자를 만나 먹잇감으로 전락.
“…….”
아찔한 상상이었지만 정우는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전시안을 가져왔으니까.
5일 차 선두 특혜를 통해 얻은 전시안의 잔여 횟수는 2회.
다시 말해 중국에서의 ‘신분 상승’을 꾀할 기회가 두 번 있는 셈인 거다.
크르응……!
그사이 냄새가 힘이 부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입에서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체력이 거의 바닥나고 있는 거였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녀석을 만류할 수도 없었다. 이미 중국의 경계면에 거의 닿아 가는 중이었으니까.
냄새가 들판을 번개처럼 가로지르자 이름 모를 풀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장관을 이뤘다.
취아아앗!
둘은 그렇게 공간을 갈라내듯 하며 높이 솟은 장벽 앞에 당도했다.
크릉.
냄새가 숨을 세차게 내뱉으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에 정우는 황급히 녀석의 털을 움켜쥐며 몸의 중심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 물!
당당하게 ‘급유’를 요구하는 냄새.
정우는 두말없이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쩍 벌어진 냄새의 입에 전량을 쏟아부었다.
‘생각해 보니 음식보다 식수가 문제겠네. 이 녀석을 어떻게 먹이지?’
중국에서의 여정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험하고 빈곤할 것이다.
영리한 중성이니만큼 배낭을 알차게 채워 줬겠지만 도난을 당하든 정수에 스쳐 박살이 나든 간에 모든 짐을 갑자기 잃게 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갸르릉!
눈 깜짝할 사이에 물병 하나를 비워 버린 냄새가 더 달라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낭에 빈 병을 집어넣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었겠지만 조금만 참아. 도시로 가면 물 정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바닥에 푹 퍼진 냄새를 지나쳐 장막으로 접근했다.
남에서 북으로 넘어올 땐 장막을 부술 기세로 통과했기에 잘 몰랐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천천히 살펴보니 어떤 진동이 느껴졌다.
우우웅.
우우웅.
장막 전체가 아주 낮게 울고 있었던 거다.
이에 정우가 손을 천천히 내밀자 장막의 진동이 조금 더 강해졌고, 이어서 그의 손이 닿게 되자.
파앗!
접촉면에서부터 둥근 파문이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 안내문 같은 것이 나타났다.
「중국」
| 혼란스럽습니다! 수십 개의 소수 민족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파견자께서는 이 지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극도로 분노한 경쟁자들과 경합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 1차 지역에서 3위 이상의 성적을 기록한 파견자에게는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공합니다.
‘뭐야, 이건?’
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했다.
이건 전이 선택 과정에서 파견을 골랐을 때 나타나는 문구일 것이다.
그것도 파견 대상지를 중국으로 선택했을 때 볼 수 있는.
‘그런데 난 파견자가 아니잖아.’
정우는 엄밀히 말해서 잔류자였다. 그의 소속은 아직 대한민국이고, 24시간 뒤에 파견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구원자가 경계면에 닿으면 기본적으로 보여 주는 건가?’
잔류도 파견도 아직 해 본 적 없는 정우로선 알 수 없는 일.
이어선 장막 표면에 댔던 손가락을 안쪽으로 집어넣었으나 아무런 거부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된다고?’
스륵.
정우는 팔뚝까지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냄새를 쳐다봤다.
그러곤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가자,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