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92
194화 새 땅, 새 법(7)
“난 너희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니야. 당장은 위로 올라가는 게 최우선 목표다.”
정우는 이렇게 말한 뒤, 초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슥.
“……!”
그리고 이걸 본 노인, 장진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 돼! 불문율이오!”
“뭐?”
불문율이라는 단어에 정우가 반응을 했으나 이미 정수가 뿜어져 나간 뒤였다.
푸아아악!
파동에 휩쓸린 초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곧 푸른 구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무슨 소리지? 불문율이라는 게.”
불문율의 사전적 의미는 ‘문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법’이지만, 좀 더 실질적인 의미는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규칙에 가깝다.
이를테면 윤달에는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든지, ‘돚대’는 빌려주거나 빌려 피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국인가. 길에서 사람을 마주치면 열에 아홉은 살인귀고, 마지막 하나도 대량의 정수를 얻을 기회가 온다면 굳이 마다하지 않을 시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불문율……? 정우로선 정말 납득하기 어려웠다.
대체 누가 그 불문율이란 걸 지켜 준단 말인가? 이제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는 강자만이 베풀 수 있는 자비에 가까웠다.
“초병을 죽이면 안 되는 룰이라도 있다는 건가?”
이에 노인이 두 초병이 서 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성홍기를 둘렀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의인은 해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율법이외다……!”
노쇠한 음성이었지만 굵직한 진노가 실리니 제법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수 실린 목소리로 상대의 감정을 덮어 버렸다.
「이 머저리들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모든 중국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겠는데.」
정우는 잽싸게 마차에서 내린 뒤 초병들이 남긴 정수를 흡수했다.
“이놈들이 쥐고 있던 정수만 해도 200만 개가 넘어. 의인? 사람을 벌레 잡듯 하던 놈들이 어떻게 의인이 되지?”
티틱, 스아아…….
정우는 제자리에 선 채 눈을 껌뻑이며 소량 증가한 정수 총량을 점검했다.
「286,501,447」
그러자 이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장진곤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변했다.
“기, 기본적인 ‘의’도 없군. 그런 식으론 이 나라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소. 아무도 당신을 동정하거나 신뢰하지 않을 테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뭘 본 건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지금 불문율이니 의니 하는 건 다 허상이야. 너희보다 훨씬 강한 자가 나타나는 순간, 그 불문율이란 게 너희 목을 죌 거다.”
정우의 이 말은 자신에게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직도 잊지 못한 탓이다. 북의 1위가 시키던 대로 자신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오던 남한의 민간인들 말이다.
그때 느낀 무력감, 공포…… 구원자로서의 자아가 송두리째 찢겨 나가는 경험이었다.
“이……!”
진곤이 무어라 반박을 하려 하자, 여태 숨을 죽이고 있던 젊은 여자가 그의 팔을 붙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만하세요. 저희, 다음번엔 정말 죽을 거예요.”
정우의 논조를 통해 느낀 것이다. 불문율과 ‘의’ 따위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이 사내의 가치관이 자신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어찌됐든 목숨을 살려 준 탓에 당장은 살아 있지만, 여기에서 선을 한 번 더 넘어 버리면 그땐 가차 없을 것이다.
“…….”
여자가 눈빛으로 간곡히 사정했고, 이에 결국 진곤이 노기를 거뒀다.
그사이 정수 흡수를 마친 정우가 마차 안으로 다시 몸을 들였는데, 자연스레 긴장한 얼굴의 여자와 시선을 맞대게 됐다.
“그쪽은 정체가 뭐지? 정수도 없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
그러나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진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정우는 이 장면을 보고서 두 사람 모두 범상치 않은 내력이 있음을 직감했다.
“순정품이지만 그렇다고 민간인은 아니군.”
정우가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자, 마침내 여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장추영이라고 해요. 제가 창춘 시장입니다.”
“……?”
* * *
덜그럭, 덜걱, 쿵!
마차는 줄기차게 창춘을 향해 달렸지만, 정우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장추영, 28세.
전직 육상 국가 대표, 현직 창춘 시장.
말도 안 되는 이력이다.
그러나 정우는 이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도 흔하게 벌어지는 시대니까.
이쪽만 해도 호랑이를 타고 다니지 않는가.
“……당신이 창춘 시장이라고?”
정우가 재차 묻자 장추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사연일까. 분명 이 사태가 터지기 전에는 시장이 아니었을 거다.
진짜 시장은 시민들에게 맞아 죽었든 도망갔든 했을 터.
“…….”
정우는 잠시 생각한 뒤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사실인가?”
그러자 추영이 정우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뒤 마차 바깥을 바라봤다.
“적어도 창춘에서는 그렇죠.”
“……?”
자연스레 추영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정우.
그리고 이내 이를 악물었다.
‘제길. 이건 생각도 못…….’
이게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하이라이트 장면이었을 거다.
저 멀리,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황금빛 보호막이 넓게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전시안의 표식 역시 보호막 안쪽에 박혀 있었다.
성역. 외부자의 정수를 강제로 비활성화시키는 절대적 권능이 존재하는 곳.
“…….”
정우는 점점 가까워지는 창춘…… 아니, 성역의 모습을 난감하다는 얼굴로 응시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냄새를 향해 외쳤다.
“멈춰!”
크릉.
지시를 받은 냄새가 커다란 몸을 웅크리며 급정거를 시도했다.
반면 불과 수백 미터 앞에 있는 성역이 유일한 동아줄이란 걸 모를 리 없는 나귀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려 했다.
* 안 돼!
나귀의 애타는 목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끊어지고 말았다.
콰악!
냄새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녀석의 몸뚱어리를 바닥에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캬르릉……!
냄새가 맹수 특유의 살벌한 눈빛을 내뿜으며 나귀를 내려다봤고, 이에 마차 안의 추영과 진곤마저 낯빛을 굳혔다.
하지만 정우 측이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
곧 막연한 느낌의 정적이 찾아왔다.
“…….”
한시가 급하지 않은가. 중국 초입에서 마주쳤던 그 3억 개짜리 구원자가 언제 이곳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정우는 속으로 이를 갈며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러나 저 노란 보호막을 시야에 담게 된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현 상황의 유일한 해법은 추영이란 여자와 노인을 데리고서 성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란 사실 말이다.
‘……기가 막히는군.’
정우는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신의 따위가 하등 쓸모없는 세상이란 말을 하기 무섭게, 이들이 말하는 그 ‘의’에 기대지 않고선 생존이 어려운 처지가 돼 버렸으니까.
아마 저 두 사람, 아니, 추영이란 여자만큼은 이 상황을 일찌감치 예측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곤이란 노인이 이쪽을 도발해 오던 걸 저지한 거다.
가만히만 있어도 본인들의 생존이 보장되리란 걸 알고 있던 것.
“아까는 누구에게 쫓기고 있던 거죠? 어차피 당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니까 도망가던 거 아닌가요? 길바닥에 쓰러질 때까지요.”
아니나 다를까, 추영이 본격적으로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물론이고 저 호랑이도 지금 많이 지친 상태예요. 창춘으로 가요. 당신이 최소한의 ‘신의’만 지켜 준다면, 우리도 그쪽을 해치지 않겠어요.”
이에 정우가 추영과 시선을 맞대며 물었다.
“초병 살해 금지는 불문율이라고 하지 않았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인데?”
그러자 추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초병 살해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문제죠. 하지만 확실히 약속드릴게요. 지금은 당신을 처벌하지 않겠어요. 창춘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요. 대신 창춘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추영은 굳이 뒷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창춘이 전력을 다해 정우를 노리겠다는 의미이리라.
“음.”
정우가 처음으로 침음을 흘린다.
그의 입장에서 이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창춘에서 이쪽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면 그곳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곧 뒤를 쫓아올 ‘그놈’에게 멱을 따일 테니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제안이군. 내 목숨을 어떻게 보장한다는 거지? 저 안에 든 녀석들이 너희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하면 그 순간 모든 게 끝이야.”
정우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특히 대량의 정수를 보유한 각성자는 더욱 믿지 않는데, 심지어 저 창춘이란 도시엔 전시안의 추적 대상까지 머물고 있지 않은가?
만약 추영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창춘 측이 이쪽의 정수량을 보고서 마음을 바꾼다면 정우로선 살아 나갈 방법이 없을 터였다.
“…….”
한편 추영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정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멀찍이 보이는 금빛 보호막에 시선을 두며 또렷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어쨌든 지금쯤 마차가 온 걸 확인했을 테니, 곧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거예요. 만에 하나 당신이 그 사람들마저 죽여 버린다면 제가 했던 제안은 물거품이 되겠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저희도 이 자리에서 죽게 될 테고요. 알아서 하세요. 전 제가 해야 할 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전했습니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온전한 약자여서일까? 본인의 죽음을 말하고 있음에도 추영은 아주 꿋꿋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히려 수세에 몰린 건 정우.
잃을 게 훨씬 많은 것도 정우였다.
‘다시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도시를 찾아봐야 하나?’
정우는 이를 악문 채 휑해 보이는 창춘의 주변 풍경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은 도박이다.
또한 3억 개짜리 구원자가 이쪽에게 전시안 표식을 꽂은 채 달려오고 있다는 걸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정확한 위치가 노출된 상태라는 거다.
“…….”
정우의 동공이 다시 창춘의 금빛 보호막으로 향한다.
그러자 그 밑쪽에서부터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추영이 말한 대로 마차…… 정확히는 자신들의 시장을 마중하러 오는 것이었다.
“현명하게 결정해요. 당신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절 인질로 붙잡고 있는 한 창춘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는 않을 거예요.”
추영이 간곡하게 마지막 조언을 하는 순간.
“……!”
정우의 발치에 있던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창춘 방향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홱 돌았다.
그놈. 정수 3억 개를 보유한 그 녀석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 진입했다는 의미였다.
“후.”
정우는 입으로 날숨을 세게 내뱉고서, 슬슬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창춘 측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음엔 마차 안의 두 사람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도 그 오성홍기라는 걸 가지고 있나?”
“……?”
생각도 못 한 물음에 추영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진곤이 자신의 뺨을 한 번 쓰다듬더니 어딘가에서 곱게 접힌 붉은 천을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오성홍기였다.
“괜찮다면 잠깐만 빌려 쓰지.”
정우가 이렇게 말하자 진곤이 추영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이내 국기를 넘겼다.
“뭐, 뭘 하려는 거죠?”
이 장면을 본 추영이 겁먹은 듯한 목소리를 낸다.
희생, 신의 등의 상징인 오성홍기를 기가 질릴 정도로 사악해 보이는 외부인이 사용하려 들지 않는가.
“정말 쓸데없는 부분에서 동요하는군.”
정우는 그새 초식동물처럼 변해 버린 추영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차 전면에 오성홍기를 활짝 펼쳐 매달았다.
그리고 아직 마차와 연결되어 있는 냄새를 향해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전방으로 달려. 최대한 사납게. 대신 사람은 해치지 마라. 놈들의 신념이 진짜인지 한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