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98
200화. 악인(3)
* * *
진입로.
지구에 대한 폐쇄 절차가 시작된 이래, 민구는 이 미지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그저 괴물들이 기어 들어오는 통로라고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
민구는 굳은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을 바라봤다.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구역이 새까만 안개에 덮였고, 심지어 그 안에선 까만 기름방울 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을 덮은 검은 점액의 일부가 하늘 위로 스며드는 중이었다. 마치 비 내리는 장면을 역재생한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허공으로 올라간 검은 점액들이 단순히 안개 속에 머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입로 구역 바깥에 있는 구름들을 먹어치우고 있다는 거였다.
슥.
민구가 손목시계를 본다.
현재 시각, 오후 3시 4분.
행성 폐쇄 5일 차가 시작된 지 약 7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곱 시간 만에 이렇게까지 됐다고……?’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동보가 바닥에 또 침을 뱉었다.
퉷!
긴장했다는 의미.
“이런 건 처음 봐요.”
동보의 음성이 가늘게 떨린다.
겁에 질린 녀석의 모습은 영락없는 17세 소년이었다. 무자비한 살인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라고 본 적이 있겠냐.”
물론 64세인 민구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른인 자신마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꽉 붙들고 있었다.
“한 대만 태우고 들어가자.”
“…….”
민구는 떨떠름한 표정의 동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서석.
볼품없이 짓눌린 담뱃갑을 검지와 엄지로 벌리자, 끝이 살짝 구부러진 담배 세 개비가 나타났다.
아, 하고 민구가 속으로 탄식한다.
막상 담배를 보게 되니 과연 남은 두 개비를 태우게 될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민구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이 말한 대로 담배를 하나만 꺼내 들었다.
그러곤 담뱃갑을 도로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중으로 담배를 좀 구해야겠네.”
민구는 라이터에 불을 켜면서 일부러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 와중에도 진입로 침식지의 검은 점액은 계속해서 하늘의 구름들을 잠식해 갔고, 이걸 멍하니 바라보던 동보가 나지막하게 한마디 했다.
“움직여요.”
“뭐?”
“움직인다고요.”
슥.
동보가 손가락을 들어 침식지 위의 까만 구름을 가리킨다.
그러자 정말 녀석의 말대로 묵직한 느낌의 먹구름이 스멀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구름 특유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
민구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뒷걸음을 치면서도 담배를 깊게 빨았다.
동보는 이미 보호막을 두껍게 두른 채 정수 칼날을 빼놓고 있었는데, 곧 정말로 어떤 일이 벌어졌다.
두르릅.
먹구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쏴아아아아……!
비를 쏟아내기 시작한 거다.
검은 비.
그런데 이 빗줄기는 지구의 ‘오리지널’과 달리 자연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게 아니라 뭔가 이상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지점을 향해 꿈틀대며 내려오는 듯했으니까.
마치 지구의 비를 보고 어설프게 흉내 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탓, 타탓.
“씨발, 이게 뭐야.”
민구가 보호막 표면에 달라붙기 시작한 ‘빗방울’들을 보고서 기겁한다.
검은 물방울처럼 보이던 것들이 실은 올챙이처럼 생긴 아주 작은 생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까맣고 매끈한 표피를 지닌 어떤 생물.
“으, 으어어!”
마침 동보도 같은 것을 보고 있었는지 넋이 나간 비명을 질러댔다.
“지, 진정해……! 보호막을 뚫진 못하는 거 같으니까.”
민구는 뒤로 막 넘어지려던 동보를 가까스로 붙잡으며 정신 차리라는 이야길 했다.
패닉에 빠져서 정수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되면 즉시 보호막이 사라질 터. 민구는 이 ‘빗방울’들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당장은 알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길 박살 내야 해.”
민구는 동보를 부축하며 아까보다 한층 넓어진 것 같은 진입로 침식지를 노려봤다.
불과 일곱 시간 만에 일대를 이만큼이나 집어삼켰으니 이대로 밤을 보내게 두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탓.
민구가 작정한 얼굴로 침식지 안에 몸을 들이려 하자, 그에게 팔이 붙들려 있던 동보가 몸에 힘을 주며 제자리에 멈췄다.
“너무 무서우면 여기에서 기다려.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
인간을 잘 죽이는 것과, 완전히 이질적인 무언가와 맞설 수 있는 자질은 또 다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선 이 순간 동보보단 민구가 좀 더 구원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말이야.”
동보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민구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가 저 안에 들어가서 죽어버리면, 그때는 정수를 회수하러 들어올 거냐?”
“……?”
“그래야 할 거야. 괴물들이 훔쳐간 정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그런 일이 생기거든 네가 챙겨야 한다. 그건 네 의무야. 물론 생존에도 도움이 되겠지.”
“아…….”
쉼 없이 흔들리는 동보의 눈에 비친 민구는 전에 없이 커보였다.
“알아서 선택해라.”
민구는 이 말을 끝으로 시커먼 침식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안개가 보호막을 갉는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하늘로 솟아오르던 ‘올챙이’들이 경로를 바꿔서 민구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보니 난자를 향해 움직이는 정자 떼처럼 보이기도 했다.
취치치칫!
놈들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민구의 보호막에 머리를 들이박았고, 바로 뒤편에서 이를 보던 동보는 한층 더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민구의 처지가 위태로워 보일수록 동보의 마음은 그를 따르는 쪽으로 기울었다.
조금 전 민구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수천만 개의 정수가 진입로 앞에 떨어지는 셈이니, 네가 정말 구원자라면 그걸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민구가 저 안에서 죽게 되면 결국은 자신도 저리로 들어가야 하고, 민구가 살아나온다면 함께 곁을 지키지 못한 이쪽만 부끄러워지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민구의 뒤를 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각성자다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으나…….
‘아니야. 진입로를 닫는 게 우선이지.’
미약하나마 가지고 있는 구원자로서의 사명감이 그의 정신을 다시 돌려놨다.
게다가 혼자서 저 안을 돌아다닐 엄두도 나지 않았고 말이다.
“씨팔, 진짜 별짓 다 하네.”
마침내 동보가 민구의 뒤를 쫓아 침식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치치칫……!
예외 없이 동보에게도 달려드는 올챙이들.
“…….”
동보는 놈들에게서 어떤 의도, 목적의식이 느껴지는 듯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이쪽이 보호막을 두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짓을 해올까?
“저쪽이야.”
그새 한참 앞서 간 민구가 뒤를 돌아보며 북쪽을 가리켰다.
“……예.”
스윽.
동보는 자신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바닥에서부터 새까만 올챙이가 무수히 튀어 오르는 걸 봤다.
‘제길, 제길.’
4일 차에 딱 한 번 만나봤던 ‘문지기’보다도 이놈들이 더 무서웠다.
아직 그 어떤 능력도, 존재의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알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그냥 무지막지한 괴물들이나 보낼 것이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동보가 바닥을 뒤덮은 점액을 보며 미간을 찡그리자, 민구가 그를 흘깃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뭔가 현지화를 하는 느낌이긴 한데.”
처억.
발을 뗄 때마다 그놈들이 먼지처럼 일어나 따라붙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세계의 심해 같은 풍경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약 5분 정도가 더 지나자 저 멀리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진입로였다. 그것도 고둥 형태의 외피에 감싸여 있는.
“저게 뭐야……?”
처음 보는 형태의 진입로에 민구가 놀라자 동보가 찝찝하단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계속 몸집을 키우더라고요. 마치 집 짓는 것처럼.”
“집?”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에서 멎고 말았다.
진입로가 가시거리에 들어오기 무섭게 보호막 표면에 잔뜩 달라붙어 있던 ‘올챙이’들이 일제히 어떤 진동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처음엔 불규칙한 진동이었으나, 점차 일정한 간격과 세기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최종적으론 두 사람의 고막에 사람 음성 형식의 소리를 전달했다.
「소멸.」
「소멸.」
「소멸.」
「소멸.」
“뭣…….”
팔에 소름이 쫙 돋아난 민구가 황급히 동보 쪽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 눈은 곧 뒤로 넘어갈 듯 위태로웠고 말이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이에 민구가 이를 악 물며 동보 쪽으로 몸을 날렸고, 이때 잠잠하던 진입로 표면이 크게 일렁였다.
그러곤.
“……?”
민구가 보는 앞에서 뭔가가 진입로를 통과했다.
* * *
7억 개의 정수.
비교적 충만해진 식량.
빠른 탈것.
이쪽의 위치를 항상 주시하고 있는 3억 개짜리 구원자.
그리고 전시안 하나와 파견 선택권.
정우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그럼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물론 이제 어딜 가도 창춘에서처럼 압도적인 위기를 맞이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놈을 먼저 잡아서 10억 개를 채운 뒤 전시안을 써야 하나?’
정우가 고려하고 있는 ‘그놈’은 터키에서 온 구원자를 의미한다.
이제 남은 전시안 횟수가 하나뿐이라 신중을 기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었고, 가급적이면 조금이라도 더 강한 상태에서 전시안을 발동하는 게 유리할 터였다.
‘지금쯤이면 녀석도 창춘이 박살 났다는 걸 알았겠지. 그러니 더욱 조심해서 접근해올 거다. 아예 날 포기했을지도 모르고.’
후자라면 매우 유감이다.
놈이 만약 이쪽을 쫓길 포기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면, 당장은 놈을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사실상 정수 3억 개를 잃어버리는 거다.
“…….”
7억 개나 되는 정수를 가졌음에도 정우는 여전히 초조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초조함이 자신을 계속 살려놓고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스윽.
“또, 인가.”
한동안 지침으로 삼던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이 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음.”
정우는 표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냄새를 계속 서쪽으로 가도록 했다.
어찌됐든 큰 도시를 찾아가야 뭐라도 소득이 있을 것 같아 베이징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패스파인더가 베이징과 먼 곳을 가리키면 그냥 무시해버리고 있었던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정우는 여느 때처럼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말이다.
이히히힝!
“엉?”
익숙하지만 결코 여기에서 들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소리가 고막을 울렸고, 정우는 곧장 발원지로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두두두두…….
가장 먼저 심상치 않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보였고, 그 다음엔 뿌연 먼지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곤.
쌔애애애액!
제법 날쌘 파공음이 곧장 정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이에 정우는.
“하핫.”
진심으로 밝게 웃었다.
수십 줄기의 정수 창이 그를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