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199
201화. 악인(4)
* * *
“이상해.”
아므라가 눈을 껌뻑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평안’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과 달리 아므라는 전장에서 아주 흉포하기 짝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데 그가 선공을 해놓고서도 왠지 불안하다는 이야길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던 트무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트무르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쇠’.
실제로 트무르는 본인의 이름답게 아주 강인한 자였다. 며칠 전의 전투로 코의 반이 잘려나갔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출신지는 다름 아닌 중국 내몽고 자치구 동부의 소도시 츠펑.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말을 탄 채로 정수 창을 미친 듯이 던져대고 있는 장내 모든 이가 내몽고 자치구에 거주하던 몽골족이었다.
“중국놈이 아닌 것 같아. 반응이 이상하잖아.”
아므라의 말대로 이쪽의 정수 포화를 받아내고 있는 상대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꽤 돼서 서로의 실루엣 정도만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긴 했지만, 상대가 죽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럼 다음엔 반격을 해오던가 하다못해 도망이라도 가야 정상 아닌가?
“…….”
아므라의 시선을 좇아 이 사실을 확인한 트무르는 비로소 표정을 굳혔다.
게다가 아므라는 직감이 뛰어난 자다. 그런 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면 결코 좌시해선 안 됐다.
“그만.”
트무르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포격 중지 명령을 내리자, 좌중의 여덟 몽골인이 투창 자세를 풀고서 뒤를 돌아봤다.
“수비 태세로 기다려라. 대화가 필요한 상대인 것 같으니까.”
“예.”
리더의 지시에 수하들이 일제히 보호막을 짙게 둘렀고, 곧 트무르와 아므라가 상대를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의 정수는 각각 6천, 그리고 5천만. 수하로 들인 동족들도 저마다 1천만 수준의 각성자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전력을 갖춘 상태였다.
물론 상대가 누구고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알았다면 진즉에 최대 속도로 말을 몰아 이 자리를 떴겠지만 말이다.
따각, 따각.
츠펑에서 직접 주조한 편자가 연갈색 대지와 맞닿으며 단단한 소리를 낸다.
그러다 아므라의 말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아므라가 멈춰 세운 게 아니었다.
* 크다……!
다름 아닌 아므라의 애마가 스스로 걸음을 멈춘 거였다.
쉬이익!
녀석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에 트무르가 타고 있던 말 역시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시퍼렇게 빛냈다.
* 위험해!
그러곤 성난 울음을 뱉으며 반대편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어억! 무, 무슨 짓이야? 멈춰!”
당황한 트무르가 말을 달래기 위해 보호막을 두껍게 둘렀으나 소용없었다.
콰득!
트무르의 말은 땅바닥이 깊게 파일 정도로 전력을 다해 달음질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교전이 재개됐다.
여태 잠자코 있던 상대가 갑자기 실력 행사를 한 것이다.
쐐애애액!
“헉, 트무르!”
맞은편에서 정수 창이 쏘아져 나오는 걸 본 아므라가 경고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푸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시퍼런 궤적이 탈주마를 관통했다.
꼬리뼈에서부터 앞가슴까지 일직선으로 찢긴 트무르의 말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몸체 대부분이 사라진 탓에 머리통과 등가죽 일부, 그리고 4개의 다리만 남게 됐기 때문이다.
철퍽!
흡사 오체분시(五體分屍).
말의 사체가 기괴한 형상으로 사방에 흩어졌고, 그 위로 엉덩방아를 찧게 된 트무르는 경황없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이내 시퍼런 빛이 그의 시야를 꽉 채웠다.
몽골인 측에선 정체불명의 상대일 수밖에 없는 사내, 박정우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는 탓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웬 호랑이의 샛노란 눈동자가 트무르를 노려보고 있었고, 박정우는 그 위에서 태연자약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억…….”
이 모든 광경을 목도하고도 손 하나 꼼짝하지 못한 아므라는 제자리에 뻣뻣이 굳은 채 정우를 곁눈질했다.
‘어, 엄청난 속도다. 대체 정수를 얼마나 먹인 거지?’
일찍이 말에게 정수를 먹여 이동수단으로 사용해 왔기에, 아므라 역시 방금 그 불가사의한 움직임이 호랑이의 능력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않은가?
저만한 괴물을 승용으로 부리는 이 사내는 얼마나 강할 것이냐는 문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굽니까……? 당신.”
아므라가 정우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출신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인지를 묻는 거였다.
중국은 무려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지만, 실제론 한족이 나머지 55개 민족을 반강제적으로 끌어온 형국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인구 비율을 봐도 한족이 91.5%, 나머지 8.5%를 55개 민족이 채우고 있으며, 실제로 중국 내에서의 처우도 인구 비율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저급한 일자리, 종교 활동 제재.
소수민족 입장에선 식민 지배를 받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던 것이다.
이에 따라 티베트, 몽골, 위구르족 등이 독립을 요구했으나 중국 정부는 전시를 방불케 하는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문화, 언어 말살은 물론 고문과 공개 처형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으니 소수민족들이 얼마나 이를 갈아 왔겠는가.
그러던 중, 갑자기 ‘행성 폐쇄’의 날이 찾아온 거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아니 각자의 생존을 위한 살육전 참여 요구.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민족들이 살인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륙으로 조금만 가면 열 명 중 아홉이 한족이었으니까. 죽일 자는 널려 있었다.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지 않소? 보아하니 한족은 아닌 것 같은데.”
아므라가 재차 대화를 시도했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조금 전 정우의 공격을 본 수하들이 대기하란 명령을 무시한 채 돌진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깜짝 놀란 아므라가 황급히 정지 신호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쐐애애액!
이미 십여 발의 정수 창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중이었고, 그 다음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휙.
정우가 팔을 한 번 휘두르자 그를 향해 날아들던 모든 정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
불가해한 장면에 트무르와 아므라 모두 몸을 움찔했고, 이어서 뻗어나간 수백 줄기의 가시를 보고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촤아아아악!
“헉!”
이제야 깨달은 거다.
이번 상대는 뭔가 다르다는 걸 말이다. 민족 갈등 따위에 관심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다른, 위화감에 가까운 기운이 느껴졌다.
퓩, 푸퓩!
정우의 보호막에서부터 뻗어나간 가시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몽골인들을 무참히 찢어발긴 뒤 천천히 복귀했다.
그리고 트무르와 아므라, 중국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수일 간 일대를 떠돌며 모은 동족 각성자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멍하니 봐야만 했다.
푹, 퍼억!
고깃덩이를 바닥 메치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난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이색적인 살인 방식이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아…….”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흘러나온 정우의 첫 마디를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한족? 여긴 민족 단위로 경쟁 중인가? 툴팁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군.”
“…….”
대사의 내용, 말투, 표정까지 아주 이질적이다.
트무르와 아므라는 비로소 상대가 한족은 물론 55개의 소수민족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누…… 누구십니까, 대체……?”
아므라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고, 드디어 정우가 답을 줬다.
“한국에서 왔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 너희는 이제 곧 사라질 처지인데 말이야.”
그러자 말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트무르가 반 밖에 남지 않은 코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상대를 바로 죽이지 않는 데엔 다 이유가 있지. 거래의 여지가 있소?”
“……?”
정우가 눈썹을 실룩인다. 의외의 제안이었으니까.
말을 타고 떼로 몰려다니는 모습이 독특해서 배경이나 좀 알아볼까 싶었을 뿐, 이자들과 거래를 할 생각까진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같은 민족을 모아서 한족 사냥을 하고 다니는 놈들이 아닌가? 무슨 재주로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거지?”
“…….”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정우의 진단에 둘의 표정이 구겨졌으나, 곧 트무르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활로 찾기를 시도했다.
“한국에서 온 게 사실이라면 길잡이가 필요할 텐데.”
“어디로 가야 할지 정도는 알고 있다.”
정우가 이 말과 함께 베이징이 있는 방향인 서쪽을 바라보자, 트무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먼 곳까지 온 손님치고는 똑똑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제법 도발적인 대사. 그러나 정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 대사 때문에 상대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 올라가기까지 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 저만한 여유를 보일 수 있다는 건, 본인이 가진 패에 자신이 생겼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베이징이 비었다는 소린가?”
정우가 이렇게 묻자 트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나? 베이징 바로 위가 어떤 지역이지?”
그건 다름 아닌 내몽고 자치구.
“우린 몽골인이야. 베이징은 우리가 직접 함락시켰다. 거긴 지금 아무것도 없어.”
“그럼 너희를 죽이면 베이징을 내가 함락시킨 셈이 되겠군.”
“……아니, 잠깐.”
정우의 눈이 다시 파랗게 타오르는 걸 본 트무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쨌든 정수를 모으고 있는 거 아닌가? 단순히 베이징이 문제는 아닌 거잖아.”
“…….”
이번엔 정우가 별말을 하지 않았고, 이를 확인한 트무르는 아므라의 눈치를 슬쩍 보고선 자신의 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해선 안 되는 짓을 하려는 눈치였다.
“뭐야, 자네 설마.”
아므라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가로 저었으나 트무르의 입은 이미 움직이는 중이었다.
“정수가 대량으로 모여 있는 곳이 있다. 대신 한 가지 약속만 지켜.”
“어떤 약속이냐에 따라 다르지.”
정우가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자, 아이러니하게도 두 몽골인의 표정이 상반되게 변했다.
트무르는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려는 눈치인 반면, 아므라는 자신이 죽더라도 정우에게 더 이상의 이득을 줘선 안 된다고 판단한 거다.
다만 현재 둘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건 정우였기에, 사실상 아므라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므라가 결단을 내린 걸지도 모른다.
촤앗!
갑자기 트무르를 향해 팔을 뻗더니 정수 방출을 시도했으니까.
“……!”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트무르가 눈을 크게 떴고, 곧장 아므라의 손에서부터 푸른 정수가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파츠츠츠츳!
트무르를 덮친 정수 파동이 낸 소리는 살점의 파열음이 아니라 정수 간의 마찰음이었다.
“아.”
아므라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짤막한 탄식을 뱉는다.
그 짧은 순간에 정우가 보호막을 확장시켜 트무르를 보호한 것이다.
“동족이 죽이려 들 정도의 배신자라면 내겐 귀인이란 소리 아니겠나.”
방어 성공을 확인한 정우가 미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오히려 트무르가 분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동족을 배신하려는 게 아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면, 나도 이 자리에서 죽음을 선택할 거니까.”
“뭣……?”
정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의기에 찬 트무르의 눈빛을 보고서 헛웃음을 지었다.
“내 약속을 어떻게 보장받을 거지? 너희에겐 선택권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