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02
204화. 규격 외(2)204화. 규격 외(2)
* * *
오후 5시 3분.
민구는 이 세상이 단단히 잘못되어 가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벌써 수십 분 가까이 도망 나왔음에도 아직 ‘함선’의 포격 사거리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투웅……!
또다시 들려오는 포격음.
그러더니 고속으로 질주 중인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쐐애애애애액!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둘을 덮친 건 시커먼 점액 덩어리였고, 민구는 신체 강화에 썼던 정수를 황급히 보호막으로 돌리면서 몸을 옆으로 빼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동보도 똑같이 대응하며 점액을 피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 미친! 언제까지……!”
슬슬 기가 질리기 시작했는지 동보가 이를 드러내며 바닥에 달라붙은 점액 덩어리를 노려봤다.
정체불명의 함선에서 쏘아 내기 시작한 것은 진입로를 중심으로 시커먼 바다를 이루고 있던 ‘올챙이 떼’였다.
츠으읏…….
올챙이들이 한데 모여 만든 까만 점액에서 연기 같은 게 솟더니 이내 까만 안개를 피워 올렸다.
공명수가 뿜던 검은 안개와 똑같은 물질이었다.
“…….”
민구는 이 현상을 이미 수십 분 동안 봐 왔기에 놀랄 것도 없이 곧장 정수를 뿜어 점액 덩어리를 지웠다.
그러나 의미 없는 짓이란 것 역시 잘 알았다.
진입로 근처에 정박한 저 함선을 부수지 않는 이상 이 일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바다로 변할 테니까.
하지만…….
‘제길.’
민구는 다시 진입로의 반대편으로 뛰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수십 분 전, 함선이 첫 포격을 할 당시가 떠올라서였다.
포문에서 검은 바다를 이룬 것과 똑같은 물질이 안개 밖으로 쏘아져 나가는 걸 본 민구는 직감했다.
저 함선의 1차적인 목적이 바다의 면적을 넓히는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든 함선을 부숴 보려고 했으나 곧이어 진입로에서부터 함선 한 척이 더 들어오는 걸 보고서 생각을 바꿨다. 진입로부터 닫아 버리기로.
그러나 극도의 공포감을 억누르며 도착한 진입로 앞에서 민구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5일 차에 처음으로 만난 진입로의 폐쇄 조건이 무려.
‘……1억3천만 개였던가.’
만에 하나 동보를 죽인다 해도 정수 총량이 1억 개가 채 안 된다.
다시 말해 민구와 동보 모두 행성 폐쇄 5일 차의 ‘구원자’로선 실격이라는 거다.
‘한 3시간 뒤면 해가 질 텐데…….’
민구는 덜컥 겁이 났다.
5일 차의 진입로가 1억 단위의 정수를 필요로 한다면 대체 6일 차까지 얼마나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이윽고 민구의 시선이 앞서 뛰어가고 있는 동보에게 닿았다.
어쩌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같은 시각, 정우도 마침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해가 지기까지 3시간 정도 남았나.’
아직 햇볕이 뜨거웠지만 시간상으론 이미 하루의 반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바오딩까지 얼마나 남았지?”
정우가 이렇게 묻자 앞서 말을 몰던 트무르가 뒤를 흘깃 돌아봤다.
“3시간……? 빠르면 2시간이 좀 지나서 도착할 수 있을 거요.”
“그럼 해가 질 때쯤이겠군.”
“……그렇겠지.”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자 잠자코 있던 아므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침 해가 진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뭔가.”
“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므라의 말에 정우가 고개를 잠시 갸웃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 세심한데.”
“우리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아므라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번엔 트무르가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물었다.
“우리 목숨이 달렸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간인 이상 저 사람도 잠을 자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리 앞에서 잠들려고 하진 않겠지. 그럼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즉, 다른 방법이 없다면 박정우가 자신들을 죽이려 들 것이라는 게 아므라의 주장이었다.
이에 트무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동료의 주장에 수긍하고 말았다.
“맙소사.”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또한 다소 비참한 현실이기도 했다.
웬 외지인의 안락한 수면을 위해 목숨을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라니…….
“저게 정말이오?”
뻔한 결론을 굳이 확인하려 드는 트무르.
정우는 그런 그를 보면서 둘 중 하나만을 살려야 한다면 아므라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좀 더 비상하고 눈치가 빠른 건 아므라 같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만, 이 녀석에게 쉴 시간을 준다면 불침번을 서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최대한 빨리 마차를 만들 수 있게 도와라.”
정우가 말한 ‘이 녀석’이란 다름 아닌 냄새를 뜻했다.
호랑이는 야행성 동물이 아니던가. 또한 야간 시야도 뛰어난 편이니 불침번으로선 이보다 더 적합한 존재가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 녀석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민구와의 재회. 다른 데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사실상 이 자리에서 가장 순진한 존재이기도 했고 말이다.
굳이 이쪽의 정수를 노리지 않을 거란 이야기다.
“짐승한테 불침번을 맡기겠다고……?”
정우와 냄새의 사연을 모르는 두 몽골인은 도저히 알 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갸웃했다.
그러다 마침내.
“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린 트무르가 낮은 소리를 냈다.
곧게 뻗은 공도 한가운데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람들’이었다. 저마다 몸을 파랗게 빛내고 있는 걸 보니 민간인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단위 각성자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움직임이 상당히 느렸으니까.
그리고 그 뒤로는.
파아아아앗!
언뜻 봐도 움직임이 남다른 두 사내가 정수 창을 던지며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창의 조준점이 좀 이상했다. 상대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걸음을 제지하는 용도로만 쓰는 느낌이었다.
“……?”
정우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상대편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고, 곧 본의 아니게 신원 미상의 무리와 뒤섞이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쫓기는 쪽이 정우 일행에게 달려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는 마당에 제삼자에게라도 의탁해 보려는 의도였을 터.
“사, 살려 주세요!”
“아아악!”
사색이 되어 쫓기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자였다. 이들은 정우 일행과 맞닥뜨리자마자 양팔을 벌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는데, 이때 다소 묘한 광경이 연출됐다.
여자들이 걸치고 있던 옷이 결코 일반적인 의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마다 색감이 요란한 데다가 재질도 안쪽의 살갗이 다 비쳐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입고서 길에 나올 수 있는 옷은 아니고, 유흥가에서나 걸칠까 싶은 수준.
게다가 몇몇은 트무르와 아므라가 탄 말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적극적으로 구명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때 둘의 반응이 또 한 번 갈렸다.
“어…….”
트무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좀 떨어지라며 손을 내저은 반면, 아므라는 말을 거칠게 몰며 물리적인 위협을 가한 것이다.
“꺼져, 뒈지기 싫으면.”
순간 아므라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며 그의 본모습이 언뜻 드러났다.
정수 5천만 개를 모았을 정도로 포악한 학살자.
아무리 약자로 보이는 자들일지라도 정수를 다룰 줄 안다면 언제고 기습해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진 것이다.
“헉……?”
“저, 저게 뭐야?”
이 와중에도 탈주자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자가 있으니, 그건 바로 호랑이에 올라타 있는 박정우였다.
‘기껏해야 십만 수준이네. 민간인도, 그렇다고 각성자라고 하기도 뭣한 녀석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정우는 숨을 헐떡이고 있는 여자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고민했다.
상태를 보니 몇 시간씩 뛰어다닌 건 아닌 것 같고, 길어야 10분 정도를 달린 눈치였다.
즉, 아주 가까운 거리에 은신처든 공동체든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한 점은 구성원이 전부 여자고, 복장 상태를 보니 바깥에 나와 강도질을 하던 자들은 아닌 것 같다는 정도.
‘대체 뭐지. 어디 인질로 잡혀 있던 자들인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정수 보유량이나 개개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모종의 기세가 전혀 달랐다.
인질로 잡혀 있던 자들이라면 눈빛에서 위축된 기운이 감지돼야 할 텐데 이들에겐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살고자 하는 의지만 엿보일 뿐.
“……어쩝니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트무르가 전에 없이 공손한 말투로 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때맞춰 여자들을 쫓던 2인조가 현장에 진입했다.
1,600만, 그리고 2,200만 개를 가진 각성자였다.
예상대로 여자들을 죽이지 못해서 이러고 있던 게 아니라 살려서 데려갈 요량으로 위협만 가하고 있던 거다.
“…….”
정우의 표정이 마치 시장기를 느낀 사람처럼 변한다.
경위야 어찌 됐든 3,800만 개나 되는 정수가 제 발로 뛰어든 셈이었으니까.
헐벗은 여자들을 쫓는 천만 단위 각성자라는 그림도 꽤 흥미로웠고.
“음…….”
한편 상대의 정수량을 볼 수 없는 트무르와 아므라는 내심 긴장한 자세로 보호막을 더 두껍게 둘렀다.
하지만 바로 등 뒤에 정신 나간 전력의 구원자가 있지 않은가. 한시적 아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겁이 나진 않았다.
“뭐, 뭐야 당신드…….”
“근처에 사창가라도 있나?”
나름 호기롭게 운을 뗀 트무르의 말을 끊고 정우가 난입했다.
그러자 정우 일행과 여자들에게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춘 두 사내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나는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장신, 다른 하나는 170 중반 정도의 평범한 체격이었다.
이윽고 장신 쪽이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들이 알 바 아니야. 괜찮다면 여자를 이쪽으로 보내고 그냥 지나가지 그러나.”
목소리가 생각 외로 얇다. 이제 보니 체격만 크지 얼굴도 앳된 편이었다. 20대 중반 정도 될까.
“한족이군.”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트무르가 인상을 확 구기며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실은 정우에게 올리는 요청에 가까웠다. 저놈들을 반드시 죽였으면 한다, 라는.
또한 모르긴 몰라도 여자들이 쫓기던 이 상황에 분개한 탓도 있을 거다.
물론 정우에겐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의 관심사는 이 여자들이 온 곳에 수준급 각성자가 더 있느냐 없느냐 뿐이었으니까.
“…….”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현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트무르와 아무르의 정수량이 상당히 높은 탓에 항상 이 둘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2인조의 입에서 본거지의 위치가 나오게 하거나, 아니면.
슥.
정우의 시선이 비로소 여자들에게 향했다.
몇몇은 옷이 완전히 흘러내려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었지만 옷을 추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고의인지 아니면 너무 경황이 없어서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
“……?”
호랑이를 탄 남자가 시선을 주니 여자들의 안색이 확 굳기 시작했다.
말에 올라탄 자와는 신분 자체가 다른 인물이라는 걸 직감한 거다.
그러자 드디어 정우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쨌든 너희 모두 같은 곳에서 온 거겠지? 먼저 입을 여는 녀석만 살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