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03
205화. 규격 외(3)
* * *
“뭣……?”
먼저 입을 여는 자만 살려 준다는 말에 장신의 사내가 미간을 구겼지만 막상 실력 행사를 해 오진 못했다.
정수 보유량 1,600만.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입장이다.
그래서 정우가 단순히 허풍을 떨고 있는 게 아니란 걸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
웬 호랑이를 타고 있는 것부터 여자들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체 뭘 믿고 자기가 더 강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사내는 괘씸함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면서도 실은 답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구원자가 아닌 이상에야.’
행성 폐쇄가 시작된 이래 사실상 ‘도발’이란 단어는 유명무실해졌다.
누구나 대량의 정수만 가지고 있으면 자신보다 약한 자를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게 돼 버렸으니까.
즉, 먼저 도발을 해 온다는 건 둘 중 하나라는 거다.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거나, 진짜 강한 놈이거나.
그런데 아직 서로 합을 주고받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더 강한지 어떻게 알겠는가?
다시 말해 상대의 정수량을 볼 수 있다는 구원자가 아니고선 대뜸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없는 거다.
“씨팔.”
자존심을 빨리 굽히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사내는 경험을 통해 잘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며 비굴한 표정을 띄우려는 찰나.
“디, 딩싱……! 딩싱에서 왔어요, 저희!”
트무르와 아므라 주변에 몰려 있던 여자 중 하나가 손을 들며 외쳤다.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정우가 자신의 말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여는 녀석만 살려 주겠노라고.
쫴애애애액!
“……!”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정우가 두르고 있던 보호막에서부터 가시가 뿜어져 나왔다.
두 줄기뿐인 이 가시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방의 두 사내를 관통했고, 심지어 반격의 여지조차 주지 않기 위해 정확히 이마를 꿰뚫은 상태였다.
“으음…….”
이를 본 트무르가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침음을 흘린다.
벌써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공격 방식이었던 탓이다.
“꺄악!”
“헉!”
정우 일행에게 목숨을 의탁하려던 여자들 역시 겁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으나 차마 걸음을 떼지는 못했다.
조금 전 가시의 사출 속도만 봐도 자신들의 능력으론 피해 낼 수 없음을 알았으니까.
또한 저마다 10만 단위의 각성자들이었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쫓기는 신세일지언정 정수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쫓던 사내가 얼마나 강한지 익히 아는데, 그런 자들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죽여 버렸다는 건…….
“사, 살려 주세요, 제발……!”
‘딩싱’이란 도시명을 처음으로 발음했던 여자가 정우를 향해 넙죽 엎드렸다.
팍!
이때 이마가 바닥에 닿으며 큰 소리가 날 정도였는데, 여자는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절박한지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액션’을 취한 느낌. 정우는 물론 두 몽골인도 여자에게서 억척스러운 인상을 받았다.
“그럼 이제…….”
상황이 정리됐다고 생각했는지 트무르가 목을 가다듬으며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우는 아직 일을 다 마친 게 아니었다.
“이 중에 혹시 의사가 있나? 아니면 제법 전문적인 응급 치료가 가능하다던가.”
“……?”
당연하게도 정우의 물음에 답을 해 오는 자는 없었고, 이내 그가 동공을 파랗게 빛냈다.
“그럼 전부 쓸모없는 녀석이군.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라. 하나만 살려 준다.”
“……!”
좌중의 여자들은 보기보다 사태 파악이 아주 빨랐다.
각자 반문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곧장 사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
뭔가 잘못됐다는 소리를 내는 트무르.
그사이 정우가 아므라를 향해 지시했다.
“저 여자만 붙들어 놔.”
“……어떤?”
아므라가 정우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곧 이 구원자가 누굴 살리고자 하는지 알게 됐다.
가장 처음 정우에게 답을 내놨던 여자가 허겁지겁 도망 중인 게 보였으니까.
“아아.”
어찌 됐든 이쪽의 명줄을 쥔 자가 내린 지시이니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므라는 군말 없이 정우가 지목한 여자를 쫓아 몸을 날렸고, 이에 맞춰 정우의 보호막이 다시 한번 뒤틀렸다.
그러곤 수십 개의 정수 가시를 일제히 뿜어냈다.
쐐애애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시퍼런 가시가 탈주자들을 쫓아 움직였고, 트무르는 이때가 돼서야 정우가 여자들에게 도망치라고 명령한 이유를 알게 됐다.
행여 자신과 아므라가 타고 있는 말이 다칠까 봐 일부러 안전거리를 확보했던 것이다.
여차하면 둘을 죽이고 말을 가져가겠단 말이 진심이었던 것.
‘무, 무서운 놈.’
트무르가 반쪽짜리 코를 찡그리며 정우를 흘깃 보자 정우가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이에 트무르는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이미 가시에 꿰뚫린 여자들을 바라보며 침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정수라고 해 봐야 10만 수준인데…….”
“정수가 문제인가? 이 녀석들도 한족인 건 마찬가지다.”
“그건…….”
트무르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 대화가 오가는 사이 아므라가 유일한 생존자를 붙잡아 돌아왔다.
그는 말에 탄 채로 여자의 뒷덜미를 붙잡아 들고 있었는데, 마치 들짐승을 잡아끌고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안이 다 비쳐 보이던 옷마저 반쯤 찢긴 상태라 ‘정상인’이라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맙소사, 적당히 좀…….”
트무르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애처로운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자 아므라가 정우의 앞에 여자를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발음했다.
“설마 이 와중에 성욕을 느끼나?”
“……뭐?”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녀석을 어떻게 다루든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이에 트무르가 발끈하며 이를 드러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안 보이나? 자네가 붙잡은 여자 꼴을 보라고.”
그러나 아므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어떻다는 거야? 내 눈엔 곧 뒈질 또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네 눈엔 젖가슴 달린 여자인 거지.”
“…….”
트무르는 이 대목에서 반박할 수 없었다.
만약 아므라가 끌고 온 자가 같은 남자였다면 별생각이 들지 않았을 테니까.
“정신 차려. 지금 자네 처지가 어떤지 잘 생각하라고. 계속 그렇게 굴다간 곧 죽게 될 거야.”
아므라는 마지막으로 직언한 뒤 트무르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묵묵히 대화를 듣던 정우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딩싱이라고 했나? 어디쯤에 있는 지역이지?”
정우는 여전히 냄새의 등 위에 올라탄 채였고, 그래서 압도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같은 인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여자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
그러다 정우조차 예상하지 못한 대사를 꺼냈다.
“이름부터 말하게 해 줘요.”
“……?”
“통성명은 해야죠. 날 죽이지 않겠다는 게 진심이라면.”
“이름을 묻지 않는다면 입도 열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예,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건 어차피 오래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거겠죠. 그럴 거면 차라리 지금 죽이세요.”
이렇게 답하는 여자의 표정은 죽음을 불사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초연해 보일 정도.
물론 주변에 불과 수십 초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달음질하던 동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현실 감각이 산산이 박살 났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우는 오히려 이러한 여자의 모습에서 진정한 결의를 엿봤다.
‘잠깐 구명하는 건 크게 의미 없다는 입장인가? 그래 봐야 내가 이름을 들은 뒤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슥.
정우가 정수 칼날을 빼내려는 듯 손을 들었음에도 여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래, 이름이 뭐지?”
“…….”
비로소 여자가 심호흡을 한다.
그러곤 또렷한 눈빛으로 정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천애. 당위삼의 둘째 딸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몰라요. 지금은 딩싱에서 2년째 몸을 팔고 있죠. 며칠 전부턴 돈을 받지 않지만.”
“…….”
상당히 과하고 장황한 소개에 정우는 물론 트무르와 아므라도 잠시 멈칫했다.
“2년째 몸을 팔고 있었다는 건 딩싱이 본래부터 사창가였다는 말인가?”
이건 정우의 질문.
이에 당천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그렇죠. 꽤 오래됐고, 충분히 유명했어요.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그럼 그날에도 마찬가지였겠군.”
정우가 말한 ‘그날’이란 지구 폐쇄가 시작되던 첫날을 뜻했다.
“네. 그래도 또 모르죠, 그 새끼들이 돈을 들고 왔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수도.”
유쾌한 기억일 리가 없는 데도 당천애는 제법 익살스러운 대사로 운을 뗐다.
그러나 그 이어진 이야기는 결코 웃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세계 파멸이 시작되던 그날.
가족이나 친구를 챙기는 대신 사창가로 달려온 자들의 수준이 어땠겠는가.
인간 말종에 가까운 쓰레기들이 수십, 수백씩 몰려들었고, 미처 딩싱을 떠나지 못했던 여자들은 무방비 상태로 ‘습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각성자 간의 전투는 결코 아니었기에 머릿수부터 한참 모자란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지켜 낼 수 있을 리 없었고, 그 결과로…….
‘정수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이제 좀 알 것 같군.’
정우는 당천애의 진술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뒷이야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딩싱에서의 첫 살인. 아마도 침대 위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축 늘어진 어떤 남자를 여전히 분개 중인 여자가 살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살육전이었을지는 그려 보기 어려웠으나 당천애 역시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건 충분히 느껴졌다.
“그런데 한바탕 한 것치곤 정수가 너무 적은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듣고 난 정우가 이렇게 묻자 당천애가 처음으로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물론 우리가 강한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첫날의 살육전 이후에도 타지에서 온 방문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
2일 차부터는 단순히 멸망의 날을 맞아 강간을 하러 온 멍청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 ‘생존자’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온갖 생필품이 든 배낭이나 수레를 끌고 다니는 자들, 그리고 언뜻 봐도 상당량의 정수를 가지고 있어 섣불리 선공을 하기 어려운 자들.
이렇다 보니 딩싱도 입장을 바꾸게 됐다.
상대를 봐가며 일부는 도시 안으로 끌어들여 살해하고, 만만치 않은 자들을 상대론 ‘장사’를 하게 된 거다.
돈 대신 물건을 받는 방식으로 말이다.
“뭐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트무르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고, 이에 정우가 손을 내저으며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만만치 않은 자라고 했는데, 그런 놈들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정말 강한 놈들은 물러서는 법이 없어. 너희는 진작에 다 죽었어야 한다.”
그러자 당천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우리도 ‘가드’가 있어요. 아니, 있었죠.”
도시 안쪽으로 유인해 죽인 자들에게서 떨어진 정수를 한 사람에게 몰아줬었다는 게 그녀의 설명.
그러나 지금은 과거 시제를 쓰고 있었다.
“있었다는 이야긴 지금은 없다는 뜻인가.”
“네, 그리고 그게 우리가 여기까지 도망 나온 이유고요.”
정우가 지적한 대로 끝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게 된 거다.
“아까 그 두 놈을 말하나? 아니면 더 있는 건가?”
정우가 바닥에 흩어진 정수 구체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당천애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침울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가드를 쓰러뜨린 녀석은 따로 있어요. 아직도 딩싱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 그럼 만나러 가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