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05
207화. 규격 외(5)
* * *
“……다른 녀석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살려주던가?”
“예……?”
정우의 말에 진모용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바닥에 넙죽 엎드린 상태였고, 덕분에 보름달처럼 하얀 엉덩이가 정우의 시야에 자꾸 걸렸다.
“…….”
이에 정우가 미간을 찌푸리자, 모용이 잽싸게 이불을 집어 몸에 두르곤 다시 엎드렸다.
“보, 보잘 것 없는 놈입니다만……! 그래도 살려주십시오!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벽면을 따라 숨죽인 채 서 있는 여자들을 흘깃 보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눈앞의 사내가 여자 따위에 마음이 흔들릴 상대가 아니며, 애초에 저자가 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자신이 누리던 모든 권한이 넘어가 버렸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구는 이제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정우가 8억 개나 되는 정수를 가지고 이곳에 온 이상 진모용은 더는 유곽의 주인일 수 없었고, 따라서 방안의 모든 여자는 이미 정우에게 귀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발……!”
그저 상대와 마주친 것만으로 모든 걸 잃게 된 남자.
진모용이 땅에 이마를 박으며 애처롭게 외치자, 막 팔을 뻗으려던 정우가 동작을 멈췄다.
물론 모용이 벌거벗은 채 벌벌 떨고 있다고 해서 연민을 느낀 건 아니었다.
“내 정수를 보고 있군. 구원자인가?”
정우가 이렇게 묻자, 모용이 비로소 살길을 찾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렇습니다! 무려 최상 채널을 제가 보고 있습니다!”
최상 채널. 아마도 최초의 채널을 이야기하는 걸 거다.
“최상 채널? 그 안에서 넌 몇 위지?”
제법 중요한 질문.
이에 진모용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몸을 더욱 바짝 낮췄다.
“사십구…… 위입니다.”
“음.”
정우가 의미불명의 소리를 내며 모용을 빤히 쳐다본다.
정확히는 그의 정수량을 보고 있는 거였다.
‘오천이백만 개……. 겨우 이걸로 최초의 채널에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보다 50위 안쪽의 허들이 낮은 셈이다.
물론 같은 채널이라고 해도 중상위권의 정수량이 압도적으로 높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순 없었다.
“그럼 이전에 상위권 구원자를 만나본 적이 있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은 처음…….”
당연한 소릴 지껄이던 진모용이 문득 뭔가를 깨닫고서 눈을 크게 떴다.
“어……?”
정우의 음성이 정수 번역을 통해 나오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안 거다.
“당신 설마.”
“중국의 상위권이 어느 수준인지 알려달라고 해도 답을 들을 순 없겠지?”
정우가 이 말과 함께 오른손에서 정수 칼날을 뽑아내자, 진모용의 동공이 반사적으로 파랗게 빛났다.
“아, 아니 잠시만!”
그러더니 정우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허공의 어딘가로 시선을 옮겼다.
이에 정우는 녀석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소속된 최초의 채널을 보고 있는 것이다.
죽기 직전이나마 자국민을 위해 8억 개짜리 외지인이 나타났음을 알리려는 걸까?
‘그럴 녀석은 아닌데.’
정우는 놈이 입을 열길 기대하며 잠시 말미를 줬다.
그러자 진모용이 다시 정우를 쳐다보더니 다급한 말투로 제안을 해왔다.
“제가 눈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채널에서 오가는 대화를 전부 전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대화? 그곳에 네 몸값만큼의 정보가 있으리란 보장이 있나?”
“…….”
대번에 움찔하는 진모용.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죽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가 목숨값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면, 그때 가서 죽여주십시오.”
제법 당돌하지만 사실 그의 입장에선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정우로선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말이다.
놈의 말대로 쓸모가 없을 경우 죽여버리면 될 테고, 만에 하나 채널에서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면…….
‘49위면 어차피 피라미야. 이놈을 통해서 상위권과 만나볼 수 있다면 그쪽이 훨씬 득이 되겠지.’
정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자 진모용이 상체를 일으키며 무릎을 꿇었다.
“이미 흥미가 동하실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뭐?”
“구원자들…… 적어도 20위권대가 모이는 장소를 알고 있거든요.”
* * *
오후 5시 32분.
트무르와 아므라, 그리고 당천애의 표정이 굳었다.
무서운 기세로 유곽에 들어섰던 정우가 예상과 다르게 사람 하나를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중국의 49위 구원자 진모용.
“이……!”
아니나 다를까 당천애가 악에 찬 얼굴을 하며 정우를 노려봤고, 이에 그는 모용과 천애를 번갈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은 쓸모가 있는 놈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이 그룹에서 나가고 싶다면 바로 꺼져. 목숨은 붙여서 보내주마.”
“뭐라고요? 그게 지금 무슨……!”
기가 차서 가슴이 메는지 당천애가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날숨을 뱉었고, 그사이 진모용이 천애의 가슴골을 흘깃 보며 탐욕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뭐하는 거야, 이 새끼가.”
용케 그 순간을 포착한 트무르가 전신을 파랗게 빛내며 진모용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섰다.
파아앗……!
6천만 개짜리 구원자답게 트무르가 내뿜는 빛은 대낮의 공기를 시퍼렇게 물들일 정도였다.
그러나 진모용 역시 5,200만 개나 되는 정수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보아하니 너도 앞잡이거나 인질 신세인데…… 주제 넘는 짓은 하지 말자고.”
그는 트무르의 정수가 더 많음을 뻔히 알면서도 마찬가지로 파란 빛을 뿜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박정우가 자신의 뒷배가 돼 줄 것이라 생각한 거다.
이런 첫 만남에서 기세가 밀리면 앞으로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을 알기도 했고 말이다.
“…….”
그리고 두 얼치기의 기 싸움을 보고 있던 정우는 당사자들 대신 여전히 잠자코 있는 아므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둘을 끌고 가서 짐을 최대한 꾸려. 3분 뒤 떠날 거다.”
“……그러죠.”
아므라는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불만스러운 눈빛만큼은 숨기려 들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 정우가 새로운 인질로 들인 자가 무려 한족이었으니까.
기존 계약에 따르면 자신들에게 모든 한족이 죽는 장면을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움직여.”
정우가 아므라의 의중을 모른 체 하며 움직임을 재촉하자, 끝내 그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다가가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들었나? 둘 다 이 자리에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움직여.”
“……?”
“…….”
어찌됐든 정우의 말은 절대적이었기에 트무르와 진모용의 신경전이 일단락됐고, 이어서 딩싱 출신의 당천애만이 정우의 앞에 남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나? 어찌됐든 네 덕에 나쁘지 않은 정보를 얻었으니 목숨은 살려주마.”
“아니, 저보고 언니들을 강간한 미친놈과 함께 다니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방금 말대로라면 나 역시 네 언니를 부러뜨려 죽인 미친놈일 텐데.”
“…….”
당천애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자 정우가 그녀 대신 다음 대사를 이었다.
“여긴 차고 넘치는 게 물자일 테니 여기 눌러 살던가, 아니면 적당한 곳을 찾아서 숨어.”
그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머지 세 사람이 짐을 챙기러 이동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
정우를 바라보는 천애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하게 굳는다.
그러더니 종래엔.
팍!
땅을 박살 낼 듯 힘을 주어 걸었다. 정우의 뒤를 따라서 말이다.
이에 정우가 뒤를 슬쩍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네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차라리 떠나는 게 나을 거다.”
다분히 진모용을 고려한 말이었다. 정우 입장에선 꽤 천애를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천애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는 전혀 의외였다.
“어차피 죽일 거잖아요? 그놈.”
“……?”
“아까 그 몽골 사람도 둘 중 하나는 죽일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이 저 정도 되는 각성자를 끝까지 살려둘 리 없다고 생각해요. 언젠간 죽이겠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이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거 같거든.”
당천애의 말엔 아주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정우를 향한 증오는 또 아니었다. 그저 이러한 상황에 이골이 났을 뿐인 거다.
“적어도 저 자식이 죽는 걸 볼 때까진 나도 여길 떠날 수 없어요. 그러니 반드시 죽여요.”
“……네 복수를 위해 짐짝에 불과한 널 끌고 다니라고? 사양하지.”
정우가 더 따라오면 죽이겠다는 듯 눈을 파랗게 밝히자, 천애가 더욱 가까이 접근하며 거친 숨을 쉬었다.
“의사나 응급치료가 가능한 사람을 구한다면서요.”
“그게 넌 아니지 않나.”
“의사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웬만한 구급 처치는 가능해요. 한때 간호학교를 다녔으니까.”
“한때?”
“돈이 없어서 중퇴했거든요.”
“…….”
정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주가 점지한 주치의를 찾아낸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간호학교 중퇴자에게 몸을 맡길 처지가 되다니.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까.
마차를 빨리 만들 수 있다면 냄새와 당천애를 함께 실으면 이동상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가 걸음을 조금 늦추며 고민을 하고 있자, 당천애가 묘한 표정으로 정우의 팔을 슬쩍 잡으며 전에 없이 자그마한 목소리를 냈다.
“다른 방법으로…… 간호를 할 수도 있을 테고요. 대신 저 자식은 반드시…… 헉!”
살며시 웃던 당천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박정우의 전신에 다면체 보호막이 씌워지더니 그 표면이 불끈거리며 크고 작은 가시가 돋아났다가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어떤 병균체를 확대해둔 모습 같기도 하고, 식충 식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괴상한 모습이었다.
“마, 맙소사.”
비로소 겁을 먹은 당천애가 뒤로 물러서자 쉬지 않고 꿈틀대는 다면체 보호막 안쪽에서 정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릴 지껄였다간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겠다.”
이에 당천애는 곧 울 듯한 얼굴로 턱을 벌벌 떨었다.
“네, 네, 넷……!”
“걸어.”
짤막한 대사와 함께 빠르게 앞서 걷기 시작한 정우.
천애는 그런 그를 넋 빠진 얼굴로 바라보다가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방금 그 반응 말이다.
대체 뭐였을까?
‘무슨 결벽증이라도 있나? 너무 과민한 반응인데…….’
수년 동안이나 남자를 상대해온 그녀는 잘 알았다.
사내의 성욕이 얼마나 강하고 즉발적인지 말이다.
심지어 지금은 지구 폐쇄가 시작된 지 5일 차 아닌가?
이 시점까지 살아 있는 각성자들은 웬만큼 이 세계에 적응한 자들이고, 어떻게 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도 체득한 상태다.
즉, 생존 외의 다른 욕구에 눈을 돌려도 그리 이상할 게 없다는 거다.
특히 박정우쯤 되는 압도적 강자라면 더욱 그렇다. 천애가 보기에 정우는 지금 본인이 원하는 모든 걸 할 능력이 있었다.
‘대체 왜지? 왜……?’
범인(凡人)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천애는 정우를 따르며 계속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