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07
209화. 검은 바다(1)
* * *
“뭐?”
정우는 까마귀들이 상공으로 피신하는 걸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온다.’의 주체가 ‘검은 바다’일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거리였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무려 8시간 이상 달려야 닿는 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까마귀들의 경고가 사실이라면 검은 바다의 확장 속도가 상식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스자좡에 모인 구원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나?”
정우가 이렇게 묻자 진모용이 황급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시 정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대화가 없습니다.”
“그럼 그쪽에 있던 바다가 여기까지 밀려오고 있는 게 맞겠군.”
그러자 이번엔 트무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자좡에 생겼다던 바다가 벌써 이곳까지 왔다는 말입니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러나 트무르는 자신의 대사를 끝까지 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주 깊은 울림을 가진 뱃고동이 멀리서부터 들려왔기 때문이다.
바아아앙…….
그저 소리일 뿐이었다.
그것도 제법 익숙한 형태의 소리였고, 이걸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구토가 나오거나 정신이 혼미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정우 일행은 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진입로에서부터 흘러나왔다는 검은 바다.
이 바다 위를 헤엄치는 존재가 있다는 암시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배가…… 돌아다녀요?”
여전히 트무르의 보호막에 몸을 의탁 중인 당천애가 몸을 움츠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에 정우는 뱃고동이 들려온 방향을 흘깃 본 뒤 도로 까마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들은 이제 동족이고 뭐고 상관없다는 듯 대열을 완전히 흐트러뜨린 채 도주 중이었다.
‘분명히 뭔가를 보고 오는 길이었군.’
그렇다고 스자좡에 모여 있던 구원자들이 전멸하는 걸 본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바다야 진입로에서 나온 것이니 초월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쳐도, 까마귀들은 어디까지나 지구의 주민들이지 않은가?
기껏해야 한두 시간 거리에서 막 날아온 참일 거다.
까악, 깍……!
까마귀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탓에 놈들이 내는 소리도 점점 작게 들리기 시작했다.
“…….”
정우는 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놈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전방 수백 미터가 새파랗게 물들며 하늘을 까맣게 채웠던 까마귀 떼가 일시에 사라졌다.
“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머지 일행.
심지어 당천애를 제외하면 전부 천만 단위 각성자다.
짤막한 실력 행사였지만 방금 그 장면을 통해 박정우가 어떤 존재였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이 사내는 본인이 원한다면 자그마한 마을 하나쯤은 손짓 하나로 지워 버릴 수 있는 괴물인 거다.
구원자라고 불리긴 한다만 실상은 행성 청소부에 가까워 보이는 존재.
“…….”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박정우가 까마귀들이 남긴 정수를 향해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이때쯤 그 일이 벌어졌다.
쏴아아아아…….
까마귀들이 도망쳐 온 방향에서부터 파도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이…… 미친, 진짜 바다가 이리로 밀려오고 있는 건가?”
일찍이 문제의 방향을 보고 있던 진모용이 얼굴을 구겼다.
그러면서 엉겁결에 함께 말에 타고 있던 아므라의 팔뚝을 붙잡았다.
텁!
그러자 아므라가 대번에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진모용의 손을 뿌리쳤다.
“이 씨발 새끼가, 건들지 마라.”
전에 없이 격한 반응이다. 웬만한 일엔 동요하지 않던 아므라조차 이 순간엔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희…… 얼른 저리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당천애가 저 멀리 정수를 흡수 중인 박정우를 가리켰다.
꿈에서도 보기 힘들 미치광이지만 적어도 전투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던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건 틀림없었다.
“물론이오.”
트무르가 잽싸게 말을 몰아 정우에게 향했고, 아므라도 두말할 것 없이 그를 따라 말을 내달렸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검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쏴아아아……!
처음엔 지평선이 두꺼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지평선 밑으로 펼쳐진 대지가 순식간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너무나도 빨라서 물이 밀려온다기보다는 대지가 고속으로 채색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헉!”
초조한 얼굴로 연신 뒤편을 살피던 당천애가 숨통이 찌그러진 듯한 소리를 낸다.
시커먼 점액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어느새 자신이 올라탄 말의 꼬리 근처까지 밀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뒤, 뒤, 뒤에……!”
당천애가 사색이 되어 외치자 트무르가 뒤를 돌아봤고, 곧 그도 숨이 턱 막힌 듯한 신음을 흘리게 됐다.
“컥!”
그다음엔 본능적으로 자신이 쥔 유일한 동아줄을 당겼다.
“저, 정우 씨! 살려 주십시오!”
다름 아닌 박정우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외친 것이다.
이자가 정말 구원자인가? 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냉정하고 패악스러워 보이던 존재.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박정우에게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말이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 자신들을 구해 낼 수 있는 건 박정우 하나뿐인 것 같았으니까.
심지어 이 경우엔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정우 씨!”
쏴아아아아!
트무르의 애타는 목소리가 검은 바다의 파도 소리에 묻힌다.
그리고 이 순간 전력으로 말을 몰던 네 사람의 맞은편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마침내 까마귀들의 정수를 모두 흡수한 정우가 보호막을 팽창시킨 것이다.
파아아아앗!
폭발하듯이 확장된 그의 보호막은 검은 바다보다 한발 빠르게 일행을 감쌌고, 곧 표면을 다면체 형태로 바꾸며 충돌에 대비했다.
대지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검은 바다 전체와의 충돌 말이다.
이윽고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의 마찰음과 함께 시커먼 점액이 정우가 전개한 보호막 위로 끼얹어졌다.
취아아악!
누런빛이 돌던 사위가 순식간에 칠흑처럼 변했고, 이에 놀란 말들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각자 태우고 있던 사람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억!”
“커헉!”
그러나 그 누구도 갑자기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게 됐다고 해서 놀라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들이 검은 바다에 휘말렸는지 여부였으니까.
“아……!”
가장 먼저 소리를 낸 건 당천애였다. 그녀는 바닥에 엎어지자마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군청색으로 빛나고 있는 박정우의 보호막 표면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푸른 보호막이 검은 바다와 완전히 맞닿아 있어 어둡게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박정우의 보호막이 바다가 밀려들어 오는 걸 일부나마 막아 냈다는 거다.
“허…….”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트무르도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흙이 붙들려 있다는 걸 깨닫고서 눈을 크게 떴다.
보호막 안쪽의 대지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 이게 어떻게…….”
트무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에 묻은 흙을 내보이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므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보호막의 주체인 박정우를 중심으로 대략 직경 12미터.
이 작은 공간만큼은 검은 바다가 단 방울도 틈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에.
“……놀랍군.”
트무르는 고개를 들어 더없이 까맣게 변해 버린 천장을 바라봤다.
해는커녕 하늘의 일부조차 볼 수 없었다.
보호막 안쪽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바다에 덮여 버린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 바닷속에 있는 겁니까?”
아므라가 이렇게 묻자 정우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데.”
그리고 이때쯤 보호막을 뒤덮고 있던 바닷물에 변화가 생겼다.
츠르륵, 츠르릅.
괴상한 소리를 내며 출렁인다 싶더니 서서히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뭐지……? 물이 도로 빠지고 있나?”
진모용이 보호막의 중심부로 물러서며 이렇게 말했지만 정우의 생각은 달랐다.
“여길 이미 지나친 거다. 지금쯤 다른 지역으로 계속 확장해 나가고 있을 거야.”
“…….”
마치 이 바다가 온 곳에서 살던 사람인 양 너무나도 평온한 정우의 말투에 다들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보호막을 감싼 바닷물의 수위가 각자의 허리, 골반 위치까지 내려왔을 때쯤 또 한 번 경악하게 됐다.
보호막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과연 지구인가 싶을 정도.
언제 밀려 왔는지 시커먼 안개가 하늘을 가득 채웠고, 현 위치에서부터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까지의 모든 공간이 오로지 검은 바닷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단 한 그루의 나무,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정우가 전개했던 보호막 안에 남은 흙바닥과 이름 모를 잡초 정도가 이곳이 지구임을 알리는 유일한 증거였다.
“이 상태에서 움직이면 어떻게 됩니까……?”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아므라가 제법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에 정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므라를 쳐다봤다.
“아마 지금 밟고 있는 것들은 전부 사라질 거다. 아니, 이 나라의 모든 게 오늘 안에 사라지겠군.”
어떤 방식으로든 이 바닷물들 빨리 걷어 내지 못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정우는 생각했다.
현시점 몇 군데나 존재할지 알 수 없지만 성역이 몇 군데 더 있다면 그곳만이 ‘지구의 대지’를 보존할 수 있을 거다.
그 외엔 전부 바닷물에 잠식되어 변형…….
‘순위권 구원자들이라면 시간을 좀 벌 수는 있겠군.’
정우는 발밑의 흙을 슬쩍 쳐다봤다.
이미 늦긴 했다만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이쪽이 보호막을 더 넓게 펼쳤다면 좀 더 많은 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수억 개의 정수를 보유한 구원자라면 검은 바다에서 자그마한 마을 정도는 지켜 낼 수 있었을 거란 이야기다.
‘물론 그 시간부로 보호막을 전개한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됐겠지.’
구원자가 성역의 보호막을 대체하는 셈인 거다.
그런데 과연 중국의 순위권자 중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자가 존재할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한동안 이어진 정적을 깨고 당천애가 정우를 향해 물었다.
이에 정우는 예고 없이 전방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스윽.
그러자 그가 전개했던 직경 12미터짜리 보호막이 통째로 움직였고, 나머지 일행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따라 걸음을 함께 뗐다.
그러곤 보게 됐다.
츠르릅.
검은 바다에 침식되어 있던 대지의 일부분이 보호막 안쪽으로 들어온 것을 말이다.
“아.”
‘새 대지’를 목격한 당천애가 침음을 흘린다.
정우의 말대로 검은 바다에 휩쓸렸던 땅은 이전과 달랐다.
흙이나 풀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바짝 타 버린 나무처럼 거칠고 까만 표면의 무언가가 이전의 대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상처에 눌어붙은 딱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경우엔 지구의 살갗에 남은 딱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이렇게 되면.”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당천애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고, 냄새를 포함한 짐승들도 생기가 사라진 대지 앞에서 숨을 죽였다.
그러나 5일 차 진입로가 가져온 선물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바아아앙……!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뱃고동 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퍼졌고, 곧이어 정우 일행이 우두커니 선 지점에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의 바닷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헉.”
단말마처럼 툭 잘리는 정우 일행의 호흡.
무언가 아주 거대한 것이 바닷속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직감한 정우가 일행에게 짧게 지시했다.
“저게 5일 차 침입자군.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라. 곧 보호막을 거둘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