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09
212화. 검은 바다(4)
“나와 거래를 하겠다고? 네 목적은 이 행성을 폐쇄하는 것 아닌가?”
정우로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거래라는 건 기본적으로 양쪽 모두 얻는 것이 있어야 성립하는 게 아니던가?
다홉이 ‘거래’의 뜻을 이쪽과 전혀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다홉이 정우를 따라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 목적은 정수 획득……. 행성 폐쇄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
“우리…… 라고?”
정우가 다홉의 문장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자 녀석이 거대한 오른팔을 움직여 정우가 볼 수 있는 위치에 희멀건 빛줄기를 쐈다.
그러자 곧 허공에 수십 개의 문양이 나타났다.
「관찰자.」
아주 짤막한 부연이었지만 이를 들은 정우는 지구에 상륙한 5일 차 과제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홉과 비슷한 존재가 적어도 저 문양의 숫자만큼 이 행성에 와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중국에 진입한 관찰자의 문양만을 보여 준 걸지도 몰랐다.
“이 나라에 저만한 관찰자가 들어와 있다는 뜻인가?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죽여.」
“관찰자들을 죽이라고?”
「관찰자가 너무 많다. 정수가 부족해.」
“…….”
여기까지 들은 정우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대화를 정리하자면, 다홉은 정우가 다른 관찰자들을 죽여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 이 행성에 들어온 관찰자가 너무 많아 자신이 가져갈 정수가 적어졌다는 것이고.
애초에 이 행성의 구원자에게 이런 제안을 해 오는 것부터가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정우는 이 문제를 뒤로하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네가 직접 죽이면 그만 아닌가?”
「그건 규칙을 어기는 일이다.」
스아아아……!
다홉의 새하얀 구멍이 심하게 요동친다. 긴장 내지는 진노한 것 같았다.
‘이것도 우주의 룰인가? 관찰자끼리는 서로 공격해선 안 된다는 게?’
정우는 비로소 다홉의 입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여느 침입자처럼 정수를 모으러 온 것도 맞고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관찰자들과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서로 죽여서라도 밀어내고 싶을 정도로 급박한 경쟁을.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아직 지구 폐쇄까진 수십 일이…….’
여기까지 생각하던 정우는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구 폐쇄 조건이 제한 시간 만료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
‘아. 정수가 모두 사라지면.’
남은 시간과 관계없이 지구의 정수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 행성 폐쇄가 완료된다.
즉, 1일 차에 주어졌던 42일이란 시간은 누군가 정수를 잔뜩 쥔 채로 계속 살아 있을 때나 유효한 것이라는 거다.
‘이놈들은 애초에 폐쇄 기한을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던 거구나. 기한보다 훨씬 빠르게 일을 마칠 자신이 있으니까.’
정우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이 행성의 모든 정수를 빨아들이는 데 얼마나 걸릴 거라고 예상했기에 이러는 걸까?
다홉만 해도 서둘러 경쟁자를 줄여야 자신이 가져갈 정수가 남아 있을 거란 입장이지 않은가.
“……내가 널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정우가 이렇게 묻자 다홉이 정우와 꼭 닮은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넌 이 자리에서 나와 싸운다.」
그러곤 그대로 검지를 하늘 방향으로 들더니 중지와 약지를 차례대로 펼쳤다.
「이 행성은 너희 시간으로 3일 뒤에 사라진다.」
“……!”
3일.
누군가 나머지 관찰자들을 찾아 죽이지 않으면 지구의 모든 정수가 3일 안에 사라진다는 거다.
“…….”
이계의 존재들도 말에 거짓이나 과장을 섞는가? 일개 인간인 정우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다의 확장 속도만 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이대로라면 이틀 안에 지구 전체가 바다에 뒤덮이게 될 거다. 하지만 3일 안에 정수를 모두 뽑아내려면 관찰자들이 각국의 순위권 구원자보다 강해야겠지.’
후자가 관건일 것이다. 정우만 해도 8억 개나 되는 정수를 보유했고, 이 수준이면 작은 마을 정도는 검은 바다에서 지켜 낼 수가 있었으니까.
“구원자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어떻게 너희가 3일 만에 지구를 박살 낸다는 거지?”
「…….」
정우의 이번 물음엔 다홉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으로 허공의 어느 지점을 툭 찔렀다.
그러자 또다시 그곳에서부터 어떤 파문이 크게 일었고, 마찬가지로 정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뭘……?”
「넌 자격이 있다. 관찰자를 죽여라.」
아까부터 계속 알게 모르게 자격 시험을 하고 있던 걸까?
정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얻는 건? 잘 대답해. 난 이 행성의 구원자다. 네게 협조할 이유가 없어.”
이에 다홉의 흰 구멍이 또 출렁였다.
「관찰자를 사냥하기에 충분히 강해질 것이다.」
그러곤 구멍에서부터 빛 가루를 뿜어냈다.
파아앗!
“아.”
다홉이 하는 걸 잠자코 보고 있던 정우가 탄식한다.
놈이 아주 작은 빛 알갱이들로 허공에 그려 낸 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시야를 제공하겠다는 거군.’
다홉이 보여 준 건 정우가 대한민국에 잔류할 당시 일시적으로 얻었던 능력이었다.
정해진 지역 내 모든 정수의 위치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던, 정우로선 ‘우주적 시야’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던 바로 그 능력 말이다.
‘놈의 시야를 얻어서 정수를 모으고, 그걸로 나머지 관찰자들을 처리하라는 건가.’
만약 이게 정말 성사 가능한 거래라면 지금쯤 다른 관찰자들도 ‘자격이 있는’ 또 다른 구원자와 거래를 하고 있을 거다.
“그럼 너는 어떤 방식으로 정수를 챙기지?”
가장 중요한 문제.
그리고 이를 들은 다홉이 다시 몸을 구부리며 정우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우주의 권위 아래 계약을 맺는다.」
사아앗!
놈의 얼굴 앞에 새하얀 빛이 생기더니 곧 새까맣게 변색되며 처음 보는 형태의 문양을 만들어 냈다.
아마도 이건 다홉의 고유한 문양일 터.
그러자 정우의 의식 속에서 평가관 ‘다467’이 입을 열었다.
-관찰자 다홉이 계약을 생성했습니다.
-다홉의 문양을 만지면 관찰자의 시야를 얻게 됩니다.
‘그 대가는?’
정우의 물음에 평가관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곤 그의 의식 속에서 기척을 냈다.
정우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평가관은 고개를 똑바로 들어 다홉을 쳐다보고 있었다.
-계약이 체결되는 순간, 구원자께서 획득하는 모든 정수의 2할을 다홉이 얻게 됩니다.
‘2할? 1억을 얻으면 2천만 개를 저 녀석이 가져간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또한 관찰자에게 분배한 정수는 즉시 행성에서 이탈됩니다.
‘…….’
문장이 다소 이상했지만 그 의미는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관찰자와 계약을 맺은 대가로 나눠 준 정수는 두 번 다시 회수할 수 없다는 거다.
‘뒤통수를 치는 것조차 불가능한 구조네.’
지구의 정수 총량을 줄이는 대신 본인의 생존율과 성장률을 비약적으로 올리는 셈이다.
따라서 자신이 아주 유력한 행성 구원자라면 고려해 볼 법한 선택지긴 하나…….
‘관찰자가 다홉 하나인 게 아니잖아? 모두가 이 짓거리를 했다간 엄청난 손해를 볼 거다.’
하지만 이미 대다수가 ‘이 짓거리’를 하는 중일 거란 걸 정우는 잘 알았다.
굳이 유력한 구원자 운운할 것도 없다. 그 누가 더 강해지고 더 오래 살아남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관찰자와의 조우는 일종의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만약 앞으로 50억 개의 정수를 확보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 경우 다홉이 가져가는 정수는 무려 10억 개. 심지어 이 정수는 다시 돌려받지 못한다.
‘제길.’
정우는 이 시점에서 이미 마음을 정했다.
다만 문제는 이 결정을 어떤 식으로 실천할 것이냐는 점.
그리고 이때 멀리서부터 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푸아아아앗!
다름 아닌 아므라가 말을 탄 채 달려오는 소리였다.
“……?”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정우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머지는 어디 있지?”
트무르와 당천애, 진모용을 말하는 것이다.
아므라의 정수량에 아직 변화가 없었기에 이렇게 물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아므라가 정우의 앞에 산봉우리처럼 솟아 있는 다홉을 힐끗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직접 보시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실은 제가 처리하려 했으나…….”
아므라는 여기까지 말한 뒤 정우의 눈을 바라봤다.
세 사람을 죽일 자신까진 있었으나 그다음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정우를 직접 찾아온 것이다.
왜냐하면 나머지 일행의 정수를 전부 삼킨 자신을 정우가 살려 둘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에 정우가 다홉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게 시간을 얼마나 줄 수 있나?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겠는데.”
「…….」
요청을 받게 된 다홉은 흰 구멍을 일렁이며 턱을 괴는 자세를 취했다.
「1시간. 내가 널 찾아갈 것이다.」
“좋다.”
정우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떨떠름한 표정의 아므라를 향해 앞장서란 제스처를 했다.
그러자 아므라가 황급히 말의 머리를 돌리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계약이라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명하고 싶지 않은데. 이젠 나도 꽤 급하거든.”
“……예.”
정우의 안색을 살핀 아므라가 여전히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다홉을 곁눈질한다.
그러곤 전력을 다해 반대편으로 말을 몰았다.
* * *
약 5분 뒤.
아므라는 용케 망망대해에서 문제의 현장을 찾아냈다.
그러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5분이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으음.”
‘현장’이 점점 가까워지자 아므라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일단 돔형 보호막이 전개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내와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홀로 남아 있는 말 한 필.
이를 본 아므라는 사내의 정체가 트무르일 것임을 직감했다. 만약 저자가 진모용이었다면 말이 근처에서 기다려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정우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고, 이에 아므라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무언가가 트무르와 진모용의 성욕을 극점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성욕을?”
정우는 이렇게 되물으면서 조금 전 다홉이 일으켰던 두 번의 파문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것이 일대의 생명체들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공격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성욕만 키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감정이나 자제력 같은 걸 건드린 게 아닌가? 어쨌든 어마어마하군.’
2일 차에 만났던 ‘농부’도 비슷한 공격을 해 오긴 했지만 그때는 보호막으로 막아 내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다홉의 이 공격은 보호막으로 막아 내는 게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러니 천만 단위 각성자인 트무르와 진모용이 영향권에 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멀쩡하군.”
“예……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현장이 2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현장에 홀로 서 있던 사내의 정수량과 인상착의가 정우의 눈에 명확히 들어왔다.
역시 사내의 정체는 트무르.
다만 정수량이 1억1천만 개까지 늘어나 있었고, 하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축 늘어진 성기만큼이나 녀석의 얼굴에도 힘이 없어 보인다.
“…….”
정우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훑어본 뒤 냄새의 등에 탄 채로 트무르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트무르가 뒤늦게 정우의 존재를 알아채고서 고개를 들었다.
“……아.”
의미불명의 소리. 그러곤 정우의 뒤로 보이는 아므라를 발견하고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수치심에 찬 얼굴이었다.
“도저히 못 버틸 정도였나?”
“…….”
정우가 대사 몇 줄을 한참 건너뛰어 묻는다.
그다음엔 트무르의 답을 듣기도 전에 다음 질문을 던졌다.
“당천애는?”
“죽었습니다.”
“어떻게?”
정우의 되물음에 트무르는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검은 바닷물을 바라봤다.
저 안에 처박혀 죽었다는 뜻일까? 정우로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정우는 트무르를 따라 바닷물을 응시하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진모용은 네가 죽였나?”
“예.”
“당천애가 죽기 전에?”
“……그렇습니다.”
“그렇군.”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당천애가 진모용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정신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녀가 이쪽을 따라온 목적은 부분적으로나마 달성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모용이 죽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했으니 말이다.
슥.
정우는 오른손을 들어 트무르의 머리 앞에 갖다 댔다.
그다음엔 짧은 작별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하나만 남겨야겠다. 넌 어차피 다음 관찰자 앞에서도 버티지 못할 거야.”
“…….”
이에 트무르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오히려 뒤편의 아므라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다음 관찰자라고……?’
그리고 곧장.
푸아아악!
정우의 팔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파동이 트무르의 머리통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파팟!
여느 때처럼 허공으로 튕겨 오르는 정수 구체들.
정우는 침착한 얼굴로 구체를 흡수하면서 이제 하나 남은 전시안을 발동했다.
| 찾고자 하는 대상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오.’
|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어느 거리까지 탐색하겠습니까?
‘냄새를 타고 전력으로 달려서 5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 원하는 조건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십시오.
‘관찰자와 이미 계약했으면서도 내가 제압할 수 있는 존재.’
과연 이 조건에 부합하는 대상이 있을까?
정우는 모든 질문에 대답한 뒤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반드시 있어야 해. 없다면…… 다홉과 계약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