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15
218화. 전문가(2)
* * *
지구 폐쇄 개시 5일 차, 남양주의 성역.
중성은 잠에서 깼다.
간신히 반쯤 뜬 눈에 비친 주변 풍경은 여전히 어두웠다.
아직 밤인 것이다.
“…….”
방금 꾼 꿈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러다 이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서서히 사라졌다.
현재 위치는 의사당 바로 앞에 마련된 천막 안.
“하.”
중성은 제자리에 가만히 누운 채 고개만 비틀어 좌우를 살폈다.
다행히 천막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천막 바로 너머엔 불침번이 서 있을 것이다.
직선거리로 치면 10미터가 채 안 될 것이기에 중성은 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노력 자체가 실은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결국엔 애처로운 표정을 짓게 됐다.
슥.
양쪽 팔꿈치로 바닥을 짚으며 가능한 한 상체만 일으키려 했으나 하체가 들썩이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속옷 안쪽에 고여 있던 흰 점액질이 사타구니를 벗어나 엉덩이 골 밑쪽까지 흘러 내려갔다.
“아.”
짧지만 깊은 탄식.
이제는 사태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몽정을 해 버렸다.
‘얼마나 된 거지?’
중성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현재 시각, 오후 11시 23분.
잠든 지 약 1시간 만에 이 사달이 난 거다.
그간의 일정이 너무 고되어 깊이 잠든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몽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몽정이 문제가 되리란 사실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중성은 어정쩡한 자세로 앉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이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건 부차적인 문제.
가장 큰 문제는 배출된 정액 자체였다. 처리가 곤란한 쓰레기니까.
정액은 간단히 말해서 단백질 덩어리 아닌가? 썩기 시작하면 상당한 악취를 풍긴다.
여기에 더해 성기를 통해 배출되므로 한 벌이 아쉬운 속옷이나 그보다 더 귀한 담요를 더럽힌다는 문제도 있고 말이다.
빨래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건 물론 세제조차 귀한 성역에서 몽정은 상당한 복병이 될 터였다.
여기에 더해 이 공동체의 8할가량이 남성…… 이들 역시 늦어도 십여 일 이내에 이쪽과 같은 일을 겪게 될 거다.
‘맙소사.’
대량의 점액성 쓰레기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이것뿐인가?
‘아.’
고민을 계속해 가던 중성은 자신이 남성이었기에 간과하고 있던 큰 문제를 뒤늦게 발견했다.
‘……생리.’
임산부들의 출산을 대비한 위생 도구는 어느 정도 갖춰 놨지만 기술자 자격으로 성역에 들어온 나머지 여성의 생리 대비까지는 아직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남성이야 앞으로 논의를 통해 자위를 권장하든 어떤 식으로든 간에 최소한의 대비를 할 수 있겠으나…….
‘골치 아프군.’
생리는 미리 해 둔다고 해서 멎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이런 유형의 문제가 앞으로 또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잘 발달된 문명이 가려 주고 있던 기본적인 문제들 말이다.
중성은 막연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러곤 이미 진창이 된 바지와 속옷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천막 바깥에서부터 자그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스슥.
불침번이 중성이 깨어났음을 알아채고서 뒤를 돌아본 것이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불침번은 의사당과 중성의 거처, 그리고 바로 옆에 마련된 대리자 조선웅의 숙소 경호를 전담한다.
즉, 근무자가 핵심 인물들의 목숨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으로만 편성되어 있다는 거다.
그럼 오늘의 근무자는 누구일까?
아직 잠이 완전히 깬 게 아니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중성은 헛기침을 하며 불침번을 부르기로 결정했다.
“계십니까? 바깥에.”
이에 천막 너머에서부터 제법 묵직한 느낌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그게.”
중성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다.
아무리 그래도 60세를 넘긴 입장으로서 몽정을 했다는 걸 남에게 알리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 때문에 농업 전담자 박태휘가 근무 중이길 내심 기대했으나…….
‘성태 씨군.’
천막 밖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던 건 광수대 출신의 형사 이성태였다.
올곧은 사람이긴 하지만 정액이 잔뜩 묻은 담요와 속옷을 들고서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조금은 거리가 있는 그런 사람.
“미리 송구하다는 이야길 해야겠습니다.”
“예……? 무슨 일이시기에.”
중성은 이제 숙소 입구를 가린 얇은 천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천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성태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마침 달빛이 제법 밝았기에 상대의 실루엣을 볼 수 있는 건 성태도 마찬가지였다.
“지, 지금 무슨.”
갑자기 성태의 음성이 흔들린다.
비로소 중성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천막 안에 서 있는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성 씨……?”
“……금일 조례의 주요 안건은 자위와 생리가 될 예정입니다.”
* * *
같은 시각, 중국.
정우 일행은 몽정이나 자위 같은 걸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온 사방이 언제고 촉수를 뻗어 올 수 있는 검은 바다이지 않은가.
위협의 차원이 다른 환경이라 설령 누군가 갑자기 대소변을 뿌려 댄대도 일과의 우선순위가 바뀌진 않을 터였다.
현재 정우 일행…… 아니, 정우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관찰자 다홉과 도르 제거.
둘째, 당장 몇 시간 뒤 수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셋째, 만약 딩저우마저 검은 바다에 휩쓸렸다면 다음 목적지는?
‘관찰자들은 힘으로 꺾는 수밖에 없어. 오늘 안에 최대한 정수를 긁어모은 뒤 결판을 내야 한다.’
정우는 번개 같은 속도로 달리는 냄새의 등 위에 몸을 실은 채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검은 바다의 두 지점이 마치 언덕처럼 크게 부풀어 오른 게 보였다.
다름 아닌 관찰자들이었다.
바닷물 속에 몸을 파묻고서 바짝 따라오고 있는 거다.
제아무리 이계에서 온 존재라지만 중단거리 고속 이동에 특화된 냄새와 저리도 가볍게 속도를 맞추다니…… 놈들의 전투력이 상상 이상일 수도 있다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
한편 아까부터 계속 정우를 곁눈질 중이던 아므라는 그에게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로 관찰자들과 싸울 생각인가. 패배한 뒤의 일은 전혀 고려도 하지 않고 있는 거야……?’
자신이 인간이란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완전히 미쳐 버린 걸까?
아니면 11억9천만 개나 되는 정수가 정신력을 보강해 주기라도 하는 걸까?
당장 이쪽만 해도 관찰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오금이 절로 저려왔다.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말이다.
언젠가 대형견이 호랑이를 보자마자 오줌을 지리며 도망가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이제야 영상 속 개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종의 차이…… 아니, 이건 종을 넘어서 존재감의 차이라고 해야 할 거다.
‘저놈들 앞에선 숨조차 편히 쉬질 못하겠어……. 그런데 어떻게 놈들과 싸운다는 발상을 한 거지?’
어쩌면 그래서 11억 개짜리 구원자인 걸지도 모른다.
아므라는 더 생각하길 포기하고서 다시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전방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게 보였다.
“저기가 딩저우군.”
이윽고 정우의 입에서 ‘딩저우’란 지명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 말인즉슨.
‘딩저우가 아직 건재하구나……!’
아므라의 눈에 일말의 희망이 감돈다.
앞서 본 검은 바다의 진출 속도를 봤을 때 딩저우는 진즉에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 여태 딩저우에 바닷물이 밀려들지 않았다는 건 검은 바다의 침식 범위가 무한하지는 않음을 의미했다.
즉,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각 진입로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까지만 바다에 잠기게 된다는 거다.
“예, 옙! 딩저우가 맞습니다!”
아므라의 뒤에 타고 있던 전태천도 정우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리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로 딩저우가 ‘도시’로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물부터 칙칙한 잿빛이긴 했지만 불길한 바다의 까만 지평선을 그만 보게 된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제 저 도시를 정리하고 공업사만 찾으면 되나?”
정우가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묻자 딩저우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왕위삼이 눈을 껌뻑였다.
“그…… 렇긴 한데.”
“이번엔 또 뭐가 문제지?”
정우는 퉁명스레 되물으면서도 왕위삼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관찰자 시야를 사용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2억 개짜리 구원자다. 녀석이 뭔가 석연찮아 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
정우가 말을 마저 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왕위삼이 입을 우물거리다 손가락을 들어 도시의 한 방향을 가리켰다.
“지금 내 눈은 도시 안의 길짐승 한 마리까지 전부 잡아낼 수 있어. 그런데.”
왕위삼은 여기까지 말한 뒤 침을 꿀꺽 삼키며 한 호흡을 쉬었다.
“이 도시엔 쥐새끼 한 마리 없다. 말한 그대로야. 산 것이 정말 하나도 없어. 저 안쪽에 자리 잡은 두 녀석을 제외하곤.”
“두 녀석?”
“엄밀히 말하면 하나지. 다른 녀석은 아주 미미한 존재다.”
“그렇군.”
여기까지 들은 정우는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전형적인 조합이지 않은가. 순정품에 가까운 누군가와 그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또 다른 존재.
대개 부모와 자식이거나 부부 관계다.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 먼저 온 녀석이 알아서 도시를 정리해 줬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왕위삼은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정우는 그런 그에게 어서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하며 냄새를 전방으로 내달리게 했다.
파앗!
호랑이 한 마리와 두 필의 말, 그리고 두 관찰자가 검은 바다를 헤치며 딩저우를 향해 간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가 눈을 크게 떴다.
“……?”
도시 외곽부터가 너무 멀쩡해서였다.
건물들이 전부 허름할지언정 무너졌거나 큰 구멍이 뚫린 건 하나도 없었다.
물론 1일 차에 흔히 벌어지는 강도나 폭동의 흔적은 있었다. 불에 그슬렸거나 어설프게 파괴된 건물들 말이다.
하지만 이 도시에 산 것이라곤 도시 구석에 자리 잡은 두 생명체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마어마한 ‘대청소’가 진행됐다는 뜻인데 그러고도 도시가 이렇게 멀끔하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재주를 가진 거지? 설마하니 한 사람씩 직접 찾아가서 칼날로 베진 않았을 테고.’
정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왕위삼에게 다시 물었다.
“전투력은 어느 정도지?”
그러자 왕위삼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은 긴장해야 하는 정도……?”
“……뭐?”
정우가 인상을 구기자 왕위삼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뒤편의 두 관찰자를 흘깃 봤다.
“웬만하면 해가 뜨기 전에 저것들을 정리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려면 가능한 많은 정수를 모아야겠지. 그래서 여길 오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거다. 저기 박혀 있는 놈이 밤사이에 만나 볼 수 있는 상대 중 가장 강한 놈이거든.”
“…….”
진심인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정우는 더 이상의 대화가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그가 왕위삼의 말을 간단히 받아넘기자 도리어 아므라가 불안에 찬 눈빛을 보내왔다.
어차피 누군가의 뒤를 쫓아다녀야 한다면 그게 박정우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양반보다 더 독특한 발상을 하는 각성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 정말 괜찮은 겁니까?”
보다 못한 아므라가 한마디를 얹자 정우가 칙칙한 모습의 딩저우를 응시하며 건조하게 말했다.
“만약 저기 있는 놈이 날 꺾을 정도로 강하다면 그럼 정말 죽는 수밖에 없지. 이미 관찰자와 계약한 녀석은 아니길 기대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