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3
23화. 살인 메카 (4)
푸아아아악!
정수가 살점을 집어삼킬 때 나는 소리.
만년필 끝에서 방출된 역(逆) 고깔 형태의 파동이 매장 오른편올 덮쳤다.
전면 유리의 창가 방향으로 대략 12미터.
그 장면을 또렷이 본 것은 정우 하나뿐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사람이 지워지던 장면 말이다.
그들과 함께 의자, 테이블, 심지어 유리창까지 모든 게 사라졌다.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일시에 고요해진 것도 이때였다.
뚝.
“……”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모든 이가 동작을 중지했다.
그리고 이건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만년필올 전방에 내지른 모습 그대로 고개만 돌려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올 바라봤다.
그곳엔 쟁반에 물병 다섯 개를 얹고 걸어가던 사내가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걸 보니 본래 이 매장 직원이었던 듯하다.
사내는 지뢰를 밟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떨리는 손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물병에 든 것이 파도치고 있었으니까.
지금 장내 모든 이의 심정이 저럴 것이다.
소리 없는 폭풍이 몰아쳤다.
한 박자. 아니 두 박자는 느린 것 같은 첫 반응.
정우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짧은 머리’가 낸 소리였다.
자신이 아무 의심 없이 들인 어느 사내.
그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납득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유도 이유지만.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저기……이게 무슨…….”
짧은 머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방문객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휘이…….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전면 유리창이 ‘있던’ 공간올 통해 바깥의 뜨거운 바람이 들이 닥쳤다.
더 이상 매장 에어컨은 여름 날씨로부터 사람들올 지켜 주지 못했다.
피부에 와 닿은 열기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는지, 정우의 왼편에 있던 사내들이 위협적인 기척올 냈다.
주변의 뭐라도 집어서 이 방문객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홰액!
정우의 왼팔이 먼저 움직였다.
아래에서 위로. 저리 가라는 손짓처럼 휘둘러진 팔.
정수가 담긴 동작이었기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압력이 뿜어져 나갔다.
다만 이건 살상용이 아니었다.
정우는 사내들 뒤쪽에 있던 계산대와 물품들이 손상되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을 밀쳐 내기만 했을 뿐이다.
행운동에서 자경단원을 상대로 연습해 본 적이 있기에, 의도에 따라 잘될 것이 라 생각했다.
“으억 I”
하지만 1,466개나 되는 정수를 비살상 용도로 쓰려면 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콰자작!
계산대 밑에 처박힌 사내는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또 한 명은 계산대 너머 창고 입구에 부딪혔다.
나머지 하나는 다름 아닌 ‘짧은 머리’였는데, 정우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죄로……
꾸드득!
차에 받히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으로 박혀 들어가더니 하반신이 박살났다.
“……?”
정우는 차에 깔린 쥐새끼처럼 짓뭉개진 상대의 하체와 자신의 왼손을 번갈아 봤다.
방금 자신이 내뻗은 정수가 대체 어떤 형태로 방출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을 무참히 죽여 놓고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박정우.
다른 사람들의 눈엔 온전히 미친 살인마로만 보였다.
“이,이익……!”
이윽고 막이 열린 아비규환.
이 일이 왜 벌어졌는지,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다.
모두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몇은 냅다 매장 바깥으로 뛰었는데, 정우의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홱!
또다시 만년필이 허공을 가른다.
푸아아아악!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려 봐야 십 미터를 일 초 안에 주파하진 못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퇴로란 존재할 수 없었다.
삽시간에 1층의 인원이 열 명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곧 이상한 낌새를 느낀 2층 사람들이 내려오려 했지만, 매장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1층의 생존자들이 계단에 몰려들면서 길이 막혔다.
“그 밑에, 무슨 일이에요?”
“비, 비켜……! 제발!”
“비켜요!”
아니, 위로 가면 헬리콥터라도 타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2층도 결국 막다른 길일 뿐인데, 사람들은 기를 쓰며 계단을 기어올랐 다.
정우는 허둥대는 사람들의 꽁무니를 바라보면서. 1층에 홑어진 정수들을 흡수했다.
1.466…… 1.584…… 1,637. 빠르게 불어난다.
그가 지금 바로 나머지 인원을 정리하지 않는 이유는 계단 때문이었다.
저곳에다가 정수를 뿜었다간 2층으로 가는 길까지 함께 사라져 버릴 테니까.
“후…….”
정수밭을 정리하다 보니 정수의 파동이 미처 삼키지 못한 ‘찌꺼기’들이 드러났다.
대체적으로 발목 이하 부분과 손이나 손가락이었다.
한두 개 정도를 보는 건 괜찮았는데. 이런 게 십여 개씩 홑어져 있으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이쪽이야말로 ‘청소부’가 된 것같다.
정우는 명치 근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슬슬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계단에 모인 사람들은 정수를 창 형태로 던져서 걷어 내고, 그다음엔…
“……!”
나름의 계획을 생각하던 정우의 미간이 확 좁혀진다.
자신의 뒤편으로 그림자가 비치는 걸 본 거다.
‘뭐지? 내가 미처 못 본 사람이 있었나?’
여태 숨어 있던 거라면, 이건 기습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상체를 젖히며 측면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빠르게 회전하는 그의 시야에 푸른색 궤적이 나타났다.
후욱!
“억!”
난데없이 나타난 궤적이 목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바람에 정우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공포를 맛봤다.
찰나였지만, 이미 목이 베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미친, 뭐였지?’
정우는 얼른 뒤로 더 물러서면서, 상대를 시야에 넣었다.
놈은 방금 그가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지글거리는 악기가 동공 밖으로 흘러 넘치려고 했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 사이로는 땀이 줄줄 흐른다.
정우는 저걸 보고서 이자가 밖에서 막 들어온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쪽의 첫 출수로 인해 매장 오른편이 통패로 날아갔다. 아마도 그리로 몰래 접근해 온 것일 터.
하지만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이었구나.’
놈의 오른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는 푸른 기운.
다소 흐릿해서 그렇지, 전체적인 윤곽을 봤을 때 분명히 칼날이었다.
즉, 정수로 검을 빚어낸 것이다.
검강 · · · · · · 아니 권강이라고 해야 하나.
폭은 대략 5 센티미터. 편의점에서 봤던 흔적과 일치했다.
저게 정말 강기 형태의 정수 활용이라면, 정수를 몇 번이고 연속으로 사용한것 같던 편의점의 상황이 충분히 설명된다.
휘발성 공격인 ‘방출’과 달리, 저건 그 자체만으로도 유형의 무기이니까.
상대의 정수는 311 개.
이 녀석은 현 시점 정수 운용의 달인인 셈이다.
정우는 경외감마저 느꼈다.
‘스승으로라도 모시고 싶네.’
그러나 다음 전개가 그의 바람을 무참히 부쉈다.
“상훈 씨!”
계단에 몰려 있던 사람 중 누군가가 눈을 크게 뜨면서 외친 것이다.
이에 정신없이 앞사람의 등을 짚고 오르던 나머지도 고개를 돌렸다,
“어?”
“오, 오셨군요……!”
다들 구세주를 본 듯한 표정.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긴 하다.
311개짜리 사내가 이 매장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이쪽은 본의 아니게 빈집 털이를 거하게 해 버린 입장이고.
“얼른 죽여 버려요!”
앙칼진 목소리.
그 여자였다.
짧은 머리와 같은 그룹에 있던 여자.
아까 분명히 계산대 근처에 있는 걸 봤는데, 그새 계단 중턱까지 기어올라 있었다.
정우가 눈을 흘기자 본능적으로 움찔하면서도 이내 오만한 표정을 짓는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상훈이란 사내를 믿고 저러는 것이다.
“……”
정우는 눈앞의 사내를 다시 위아래로 훑었다.
정수로 검을 빚은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게 많음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이자의 정수는 고작 311개.
더군다나 그중 대부분이 ‘검’에 쏠려 있올 것이다.
슥.
정우가 만년필을 앞으로 뻗자 상훈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푸아아악!
정수 운용의 달인이 지워졌다.
이 경망스러운 비명은 방금 전까지 정우를 얼른 죽이라고 재촉하던 여자의 것이다.
그녀는 악다구니를 쓰며 계단 위의 사람들을 헤쳤다.
“좀 비켜요!”
본인도 살인마의 눈길을 끌고 있다는 걸 아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티틱.
그사이 정우는 상훈이 남긴 정수를 흡수했다.
사아……. 정수 총량이 단번에 1,953까지 늘어났다.
구원자 순위는 아직 ‘3’.
저 여자를 포함해 이곳의 모두를 죽이면 2천 개를 훌쩍 넘길 예정이다.
슥.
정우가 몸에 푸른 방어막을 두른 채 계단으로 접근하자 여태 꽉 막혀 있던 길이 자연스레 뚫렸다.
모두가 그를 피해 계단 위로 일제히 도망갔기 때문이다.
“어어…….”
다들 구도가 이렇게 잡히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2층에 죽기 좋게 모였다.
기존 2층 인원과 1층에서 살아 올라온 사람을 모두 합치니 오십 명가량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정우를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굳이 먼저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단 1초라도 더 살고 싶은 게 이들의 심정이었다.
탁.
이윽고 정우가 2층 바닥을 밟았다.
“음……”
그는 흡사 당구 치듯이, 이 사람들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각도를 찾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삶이 끝날 거라는 점 말이다.
“누,누가 뭐라도 해봐요…….”
“이대론다 죽을 거야…….”
겁에 질려서 수군거리는 사람들.
정우는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년필을 들어 올리려 할 무렵.
홱!
오십여 개의 머리 사이에서 팔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
정우가 깜짝 놀랄 정도로 당찬 동작이었다.
팔의 주인이 누군가 찾아보니, 사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어떤 사내였다.
애초에 허락 같은 건 구할 생각이 없었는지, 곧바로 말을 시작했다.
“전…… 푸치니라는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요리는 정말 자신 있습니다. 재료가 아무리 빈약해도 웬만큼 먹을 만한 정도로 만들어 냅니다. 절 살려 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보존 식품 만드는 법도 알고요. 아주 잠깐 고민이라도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원가 했더니 살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의외로 정우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다짜고짜 살려 달라는 게 아니고, 어떻게든 자신을 상품화시키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요리사를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본인의 목숨을 영업하는 광경에 잠시 홀린건 사실이었다.
그가 일순 멍한 표정올 짓자 이때를 놓칠세라 여기저기서 손이 획획 올라왔다.
“저는 엔지니어입니다……. 살려 주시면…….”
“작년까지 육상 실업 팀 소속이었습니 다. 제가 짐꾼 노릇이라도…….”
“현직 변호사입니다. 언젠간 제가 쓸모…….”
여기에 더해 별다른 특기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도 손을 들었다.
척후병이나 미끼 역할이라도 하겠다는 거다.
개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답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여자’가 했다.
일찍이 바깥에서 대면했고. 이곳에 와서는 정우를 가리켜 ‘얼른 죽여 버려 요!’라고 외치던 여자.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할게요.”
너무 상투적인 대사이지만…… 실제로 내뱉으려면 보통 결심을 한 게 아니고서는 힘들 것이다.
심지어 이 여자는 네가 생각하는 그 ‘뭐든지’가 맞다는 듯 묘한 눈빛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미친.”
정우는 어이가 없어서 육성으로 욕을 내뱉고 말았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상황이긴 하지만, 여기까지다.
만년필을 마저 들어 올리는 걸로 시장통 같은 소란을 잠재웠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이 난 것이 있어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물었다.
“혹시 여기에 의사 있습니까? 웬만큼 진단할 줄 안다, 이딴 거 말고요. 진짜 의사요.”
이에 돌아온 건 침묵뿐.
정우는 알았다는 둣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께 감정은 없습니다. 고통도 없을 겁니다.
“……!”
일제히 커지는 오십여 쌍의 눈.
이어서 푸른 정수의 파동이 장내를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