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32
235화. 가이드라인(5)
기준점. 위험도 K급, 정수 1억 개를 보유한 각성자.
그리고 곧이어 나타난 위험도 B급의 존재…….
심지어 이번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관찰자다.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정수 전량이 고스란히 ‘영구적 손실’로 이어진다는 거다.
승자가 이쪽을 대신해 임무를 계속해 나갈 거란 기대가 있는 ‘같은 주민’ 간의 대결과는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이건 절대, 절대로 지면 안 되는 싸움인 것이다.
‘……한심한 자식들.’
정우는 저 멀리서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대지와 허페이 전경을 바라보며 턱에 힘을 꽉 줬다.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속 어디에선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꾸드득.
주먹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뒤늦게 손가락 마디가 저려 온다.
오랜만에 생존 본능이란 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지면, 너희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 거다.”
정우가 이렇게 말하자 무전기 너머의 류량성이 어이없다는 듯한 음성을 흘려 보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무슨 말씀을……. 그럼 우리가 당신에게 순순히 목을 내놔야 했다는 소립니까?
“네놈들이 직접 날 꺾지 못할 바에야 그편이 낫겠지. 이대로라면 너희는 어차피 죽어. 그런데…… 결국 죽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선택지를 골랐군.”
이에 류량성이 실소한다.
-하,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지요.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혹시 모릅니다. 언젠간 저희가 당신보다 훨씬 강해질지도. 그때가 되면 오늘의 손실을 알아서 메우겠습니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마 겁에 질리신 건 아니겠죠? 관찰자를 꺾으면 그만인 문제인데 말입니다.
비아냥거리는 대사 뒤로 이어지는 낮은 웃음.
“…….”
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대화하길 그만뒀다.
물론 상대야 이쪽의 평정심을 흔들기 위해 던진 말이겠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 유력한 행성 구원자라면 관찰자 따위에 지진 않겠지. 놈들은 5일 차에 들어온 침입자다.’
그리고 지금은 행성 폐쇄 6일 차.
새 침입자도 아직 만나 보지 못했는데 ‘구닥다리’에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에 하나 여기서 패배한다면 이쪽이 지구가 기대한 만큼의 뛰어난 인재까진 아니었다는 방증이리라.
‘어쩔 수 없군.’
결국 정우는 관찰자부터 부러뜨린 뒤 무전기 너머의 사내와 경감이란 자를 만나 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2급 경사 영성봉에게 닿았다.
“…….”
“대충 들었으니 이해할 거라 믿는다.”
“……?”
솨앗!
번개처럼 성봉의 목을 가로지른 푸른 궤적.
정우가 정수 칼날을 회수했을 땐 성봉의 몸이 뒤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어선 푸른 정수 구체가 허공으로 솟았다.
파팟.
총 1억 개.
정우의 현재 정수 총량과 비교하면 5%가 채 안 되는 양이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양분이었다.
어쩌면 조만간 정수 하나가 아쉬워질지도 몰랐으니까.
쿠두두두두…….
이윽고 문제의 관찰자가 현장에 도착했는지 땅 밑에서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물줄기가 발밑으로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정우가 선 자리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대지가 폭발했다.
시커먼 연기와 물줄기를 사방으로 고속 분사하면서 말이다.
‘뭐지……?’
지금까지 만나 본 두 관찰자 모두 검은 바다 안에서만 물밑으로 이동했고, 바다가 없는 공간에선 안개 형태로 몸을 바꿔서 움직였다.
즉, 진입로의 영향권이 아닌 곳에서는 함부로 지구를 훼손하지 못했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녀석은 지구를 마치 제집 거닐 듯이 하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최소 수천 평의 대지가 박살 났고, 그 밑에서부터 ‘바닷물’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으니까.
콰아아아아!
사방으로 솟던 물줄기가 천천히 한데 모이기 시작하더니 종래엔 육중한 물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취아앗……!
증기 소리 같은 것과 함께 무시무시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들은 대로군.」
낮고 침착한 어조였지만 이 소리가 뇌에 전달되자 아주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여러 종류의 아주 강력한 흥분, 분노와 슬픔, 그리고 ‘격앙됐다’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까지.
놈의 음성을 들은 사람마다 떠올린 장면이 달랐지만 정우의 경우는 소년기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강제적으로 회상 당하고 있었다.
누런 불빛, 좁고 지저분한 화장실의 문간.
그 문간 위로 희멀건 그림자가 쉴 새 없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철푸덕, 하는 젖은 소리. 거세고 다급한 기척.
어린 시절로 돌아간 정우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정우는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머리가, 변기 안으로 처박히는 중이었다.
좁은 화장실을 꽉 채운 세 남성의 덩치는 아버지가 진 빚만큼이나 육중했다.
큐르릅, 퓨릅!
고장 난 청소기 같은 소리가 아버지의 생존 여부를 확인시켜 준다.
“지저분한 방법을 쓰는군.”
정우는 의식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고스란히 받아 내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그새 고층 빌딩 높이가 돼 버린 ‘물기둥’ 안에서 어떤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놈이었다.
[정보] 관찰자, 테르가. 위험도 B급.물기둥을 담고 있던 정우의 시야 한편에 이런 문구가 나타난 것도 이때였다.
특수 이력자 박정우를 위한 지구의 가이드라인이 여전히 작동 중이었던 거다.
그러더니 다음 문구를 띄워 올렸다.
[알림] 관찰자, 테르가의 존재가 귀하의 항상성을 감소시키고 있습니다. [정보] 인간, 박정우 님의 현재 항상성은 84%입니다.|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13% 손실. 4초 전.
‘항상성?’
이 정도까지 세밀한 정보를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이드라인…… 아니 지구가 관찰자의 공격 방식, 원리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항상성이란 게 본래 100%가 아닌가? 4초 전에 13%를 잃어서 84%가 됐다면 나머지 3%는 어디서 잃은 건데?’
그러나 가이드라인은 정우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새 문구들을 수초 간격으로 띄워 올렸다.
[정보] 인간, 박정우 님의 항상성이 계속 감소 중입니다.|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3% 손실, 4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2% 손실, 1초 전.
그새 또 ‘항상성’이란 걸 5%나 잃었다.
어찌 됐든 이걸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의 상태를 계속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것.
다시 말해서…….
‘미치지 않으려는 성질이군.’
정우는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근거로 삼을 만한 샘플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웬만한 민간인들은 관찰자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몸에 이상 증세가 왔고, 수준급 각성자들도 쉽게 이성을 잃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 원인이 바로 이 항상성 때문일 거다.
항상성이 너무 빠르게 떨어져서.
그리고 이걸 뒤집어 보면.
‘나 역시 항상성이 바닥나면 미치게 된다.’
정우는 다시 눈앞의 문구로 시선을 돌렸다.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3% 손실, 17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2% 손실, 14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2% 손실, 10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3% 손실, 4초 전.
[정보] 인간, 박정우 님의 현재 항상성은 74%입니다.|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1% 손실, 1초 전.
이젠 굳이 평가관이나 가이드라인의 설명이 없어도 알 것 같았다.
이 테르가라는 관찰자는 이전에 만났던 두 녀석과 차원이 달랐다.
놈들과 직접 싸우기까지 했던 이쪽의 항상성을 아주 빠른 속도로 깎아 내리고 있었으니까.
‘인정하긴 싫다만.’
정우는 상대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충분히 위축됐고 겁이 났고, 슬펐다.
심지어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잊고 있던 인간성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때에 맞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정보] 인간, 박정우 님의 현재 항상성은 74%입니다.|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1% 손실, 7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3% 손실, 5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4% 손실, 2초 전.
|테르가의 존재로 인해 9% 손실, 1초 전.
[정보] 인간, 박정우 님의 현재 항상성은 57%입니다.정우가 ‘인간다운’ 마음을 갖자 항상성을 잃는 속도가 급격히 가속화된 거다.
“……!”
이건 지구가 특수 이력자에게만 일러 주는 고급 정보.
어떤 유형의 존재가 상위 관찰자와 싸울 수 있는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말인즉슨.
‘인간은…… 한계가 있구나.’
그러나 더 낙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 이 미친 새끼들!”
뒤편의 마차 쪽에서 정영륜의 당혹스러워하는 음성이 쏘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정우가 고개를 돌리자 마차의 몸체 부분인 버스가 통째로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본래 마부석에 앉아 있어야 할 정영륜도 왜인지 버스 안쪽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이유를 잘 살펴보니.
‘……제길.’
마차 안쪽의 민간인들이 이미 항상성을 다 잃고 서로 칼부림 중이었다.
의사 4인방이 메스와 수술 가위 등을 휘두르기 시작한 탓에 정영륜이 이를 막으러 들어간 것이다.
가이드라인의 보조를 받고 있는 정우의 눈엔 다른 존재의 항상성까지 표기됐는데, 마차 안쪽에서 3%, 6%, 4% 따위의 숫자가 홱홱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개중에 유일하게 두 자리 숫자를 지니고 있는 건 억 단위 각성자인 정영륜뿐.
하지만 그마저도 항상성이 21%였다. 어느 형태로든 곧 미쳐서 날뛰기 시작할 거란 뜻이다.
그렇다면 냄새와 아므라는?
“…….”
정우가 ‘VIP’ 차량 쪽으로 고개를 움직이니 바닥에 이마를 박고서 납작 엎드려 있는 아므라가 보였다.
그의 항상성은 19%.
그리고 어느새 차에서 내려와 ‘물기둥’을 노려보고 있는 냄새의 향상성은.
‘38%……?’
의외였다.
곧 냄새도 정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슬쩍 돌려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 일어나!
성난 얼굴로 정우를 꾸짖듯 외쳤다.
다음엔 귀를 뒤쪽으로 납작하게 접으며 다시 물기둥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물기둥 안의 실루엣이 점점 거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온다!
‘아.’
순간 기시감이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듯해서, 정우는 전율했다.
냄새의 표정과 대사, 몸동작, 이 모든 상황이 행운동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
일찍이 진입로 앞에 모여 싸울 준비를 하던 행운동의 고양이 군단 말이다.
물론 녀석들은 전부 죽었다.
형편없이 구겨진 채로, 때로는 살을 발라내고 난 닭 뼈처럼 앙상한 모습으로.
녀석들의 신체 조각이 허공에 흩뿌려지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
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지독한 공포, 그리고 그보다 더한 중압감이 그의 얼굴을 마음대로 휘젓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우의 얼굴이 빳빳해졌다.
기가 질려 밑으로 늘어져 있던 입꼬리가 도로 바짝 올라가자 이번엔 마치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크릉.
정우의 모습을 본 냄새가 귀를 더욱 납작 접는다.
다음엔 뒤로 서서히 물러났다.
녀석은 더 이상 물기둥을 보고 있지 않았다.
테르가 앞에서도 항상성을 유지하던 냄새를 겁에 질리게 한 건, 다름 아닌 박정우였다.
x 236
236. 항상성(1)
* * *
“그, 그만둬 이 등신들아……!”
1억 3천만 개짜리 구원자, 정영륜이 당황한 음성을 낸다.
아니, 그는 겁에 질려 있기까지 했다.
민간인을 상대로 무력감을 느끼는 날이 오리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익……! 익!”
“끄아악!”
마차 안은 완전히 아비규환이었다.
의사 4인방이 저마다 메스나 가위 따위를 들고서 눈에 보이는 아무나 찔러댔고, 덕분에 전직 약사인 왕려성의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가기 직전이었다.
여기에 더해 마차를 손봐야 할 전태천도 온몸에 자상이 난 채로 피칠갑을 한 상태.
더 무서운 건 상대적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왕려성과 전태천 역시 아무나 죽이려 드는 건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가진 무기라곤 기묘하게 구부러진 맨손뿐이면서도 쇠붙이를 든 상대에게 덤벼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으어으! 으어어!”
대체 의식 속에서 뭘 보고 있는 걸까.
모두가 사람 같지 않은 표정, 눈빛, 동작을 하고 있다.
“……씨팔.”
영륜은 팔다리는 물론 머리, 어깨까지 이용해서 여섯 미치광이가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빈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때마다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적시는 걸 봐야만 했다.
“후.”
진한 피내음이 코를 찌르다 못해 이마 안쪽까지 할퀴는 듯하다.
심지어 극심한 현기증이 계속 찾아오고 있었는데, 이게 단순히 피 냄새 때문이 아님을 영륜도 잘 알았다.
‘제기랄.’
자신 역시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식은 대체 이 꼴이 되도록 뭘 하고 있는 거지? 잘난 체는 다 해놓고서……!’
영륜은 이를 갈며 그 자식, 박정우가 서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대번에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 *
테르가. 위험도 B급의 관찰자.
놈이 물기둥 바깥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하자 방대한 양의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취아앗……!
다름 아닌 놈의 전신에서 발생하고 있는 거였다. 신장이 백여 미터나 되는 거대한 실루엣에서.
“…….”
체온이 말도 안 되게 높은 걸까? 어쩌면 신체가 빠르게 형태를 갖추는 과정에서 발생한 에너지 탓일지도 모른다.
놈의 모습을 본 정영륜은 이런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정작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던 정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있네.’
현재 시각, 오후 12시 16분.
제법 높이 뜬 태양이 장내의 모든 사물을 비추고 있었다.
지붕이 반쯤 뜯기다 만 차량, 위축된 모습으로 바닥에 바짝 엎드린 아므라, 몸을 웅크린 채 물러나는 중인 냄새, 쉼 없이 흔들거리는 마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쿠웅.
마침내 지구의 대지 위에 발을 들인 테르가.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증기 때문에 여전히 놈의 모습이 가려져 있긴 했지만, 아까와는 분명 달랐다.
물기둥에 숨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지금은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다시 말해서.
‘이놈도 실력 행사를 하기 위해선 행성의 법칙에 예속돼야 하는구나.’
이전의 두 관찰자에 비해 재량권을 더 가진 건 맞는 것 같지만, 그래봐야 본질적으론 같은 종족.
‘결국 이 녀석도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존재다.’
그림자가 생기는 신체라는 건,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의미 아닌가?
이건 다시 말해서 베고 찢고, 죽일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싸우기 위해 실체화된 이상, 더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몸집이 크고 외형이 낯설 뿐이야. 이놈도 그저 동물에 불과하다.’
정우의 생각이 여기에 이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흰 불꽃이 확 튀었다.
파앗.
그러곤 그를 보조하던 가이드라인이 새로운 문구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알림] 인간, 박정우 님의 항상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외부 요인에 의해 8% 증가. 8초 전.
|고유 특질에 의해 5% 증가. 6초 전.
|목적의식에 의해 3% 증가. 5초 전.
|목적의식에 의해 5% 증가. 3초 전.
|목적의식에 의해 6% 증가. 2초 전.
|목적의식에 의해 11% 증가. 1초 전.
“……!”
이번 문구는 앞선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지난 문구들이 관찰자의 공격 원리에 대해 알려줬다면 이번 것은…….
‘내 작동 원리.’
박정우란 존재가 항상성을 잃게 될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복원을 시도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거였다.
일종의 알고리즘인 것이다. 인간이 이계의 존재와 맞서는 과정을 보여주는 알고리즘.
그리고 이때쯤 테르가가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쿠웅.
놈의 몸을 감싸고 있던 증기도 그새 많이 걷혀 있었고, 덕분에 이전의 관찰자들과 완연히 다른 놈의 신체가 햇볕 아래 드러났다.
몸의 형태는 인간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으나 피부의 색깔과 질감이 전혀 달랐다.
표면이 마치 바짝 마른 물고기의 껍질 같은데다가 어두운 보랏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더해 뒷덜미에서부터 허리 끝까지 이어지는 등판 전체에 시커먼 촉수를 수천 개나 달고 있었는데, 놈의 신장이 워낙 크다 보니 모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넌 확실히 다르군.」
지상에서부터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붙은 테르가의 머리가 정우를 향해 살짝 구부러졌다.
이에 정우도 놈의 얼굴을 올려다봤는데, 그도 모르게 표정을 구기고 말았다.
다른 관찰자처럼 테르가도 머리만큼은 인간의 것을 베껴오지 않고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텐데, 생긴 게 꼭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놈의 머리통엔 눈과 코, 입, 심지어 귀도 없었다. 그럼에도 목에서부터 매끄럽게 이어져 올라가는 턱의 윤곽이나 광대의 위치, 이마 등이 영장류의 그것과 똑같았다.
사람의 머리통에 보랏빛 비닐을 씌운 뒤 팽팽히 잡아당기면 딱 저렇게 보일 것이다.
이에 정우는 놈을 향해 정수 실린 음성을 쏘아 보냈다.
「그게 본래 네 머리인가? 왜 우리와 닮았지?」
「……?」
그러자 대번에 테르가가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상체를 슬쩍 뒤로 물린 것이다.
놀란 것처럼 보였다.
지구의 존재가 정수를 이용해 말을 걸어온 게 처음인 걸까?
아니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걸까.
그러다 놈이 이내 동요한 기색을 감추며 척추를 곧게 폈다. 몸을 더 크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우는 놈의 등판에 붙은 촉수들이 아까보다 한층 거세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관찰자 도르가 ‘흰 구멍’으로 감정을 드러냈듯이, 이놈도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숨기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정우의 표정이 한층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가이드라인이 ‘정상화 안내’를 해왔다.
[정보] 인간, 박정우 님의 현재 항상성은 97%입니다.‘여전히 3%는 행방불명이군.’
어찌됐든 테르가에 의해 위축되기 직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실제로 정우의 의식은 아주 명료했다.
여전히 소년기의 기억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지만 더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러한 싸움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이 과정에 익숙해져야 6일, 7일, 8일 차 침입자들과 힘을 겨룰 수 있을 거란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인다!’
테르가를 죽이고 싶다는,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강렬한 살의. 정우의 동공이 더없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불쾌하다.」
그런 정우의 모습에 테르가가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으나, 이미 싸움이 시작된 뒤였다.
파아앗!
정우가 전신을 파랗게 태우며 놈을 향해 내달린 것이다.
이에 테르가가 몸을 웅크리더니 등판을 부풀렸다.
“……?”
이건 정우도 예상하지 못한 동작이었기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곧 놈의 등에서부터 수천 개의 촉수가 포물선을 그리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는 걸 보게 됐다.
‘뭐야, 이건?’
그가 반사적으로 보호막 밀도를 올리는 사이, 촉수들이 대지를 쑤시고 들어갔다.
다른 일행을 노리려는 줄 알고 방어 준비를 하던 정우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더니 곧 테르가가 상체를 도로 일으켰다.
다음엔.
꾸드드드드득…….
고무가 힘껏 비틀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상체의 오른편을 뒤로 빼냈다.
‘아.’
그건 ‘펀치’였다.
자신의 몸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올지 알고서 대지에 촉수를 박아놨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지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파공음.
쒸에에에에엑!
신장이 백여 미터에 이르는 존재가 정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위가 까맣게 물들었고, 정우가 밟고 있던 대지는 이미 산산이 조각나는 중이었다.
놈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땅이 으스러지고 있는 것이다.
‘맙소사.’
정우가 의식 속에서 경악하자마자 그의 호흡이 잠시 끊겼다.
퉁……!
테르가의 주먹이 보호막을 강타한 탓이었다.
순간적으로 일대가 진공 상태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고, 곧 이명(耳鳴)이 찾아왔다.
찌이잉!
그다음 정우가 보게 된 것은 왜인지 거리감 있는 현장의 전경과 뿌연 돌가루였다.
그는 십여 미터 높이에서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 버린 것이다.
보호막에 실었던 정수 대부분이 소멸해 버렸다는 건 그 다음에나 깨달았다.
놈의 일격에 정수 총량 23억 개 중 19억 개 소멸.
아무리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해도 이건…….
‘힘 싸움이란 게 성립하지 않는구나.’
앞으로 약 3초 동안 정우가 사용할 수 있는 정수는 4억 개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의 몸은 이미 빠르게 곤두박질하는 중이었다.
쏴아아아아……!
귓가를 스치는 추락음 속에서, 정우는 자신의 팔다리가 부러져 나갈 것을 염려하진 않았다.
지금 가진 정수만으로도 얼마든지 바닥에 착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뒤 남은 2초를 어떻게 버티냐는 거였다.
지금만 해도.
콰드드드득!
테르가가 직경 수십 미터의 구덩이 속에서 주먹을 꺼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현장 근처에 있던 마차는 ‘펀치’의 여파에 저 멀리 굴러 나가 있었으나, ‘VIP’가 탄 차량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흙먼지에 가려진 게 아니라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난 것이리라.
‘제길.’
그는 사태 발생 이래 처음으로 행운을 바랐다.
일행을 챙기긴커녕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할 여력조차 없었으니까. 녀석들이 이제 곧 전부 죽을 거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촤아앗!
이윽고 그의 몸이 볼품없이 으깨진 지구의 대지 위에 닿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커먼 그림자가 주변을 덮쳤다.
테르가의 두 번째 공격이 다가오고 있는 거였다.
‘최대한 피해보는 수밖에 없나?’
이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이쪽이 생존할 확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정우는 지체 없이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보호막은 의미가 없을 테니 보유한 정수 전량을 신체 강화에 쏟았고, 즉시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물론 상대의 공격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 아니 도박이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를 파악하게 됐다.
후우우욱!
묵직한 파공음.
이번 공격은 머리 위에서 곧장 떨어져 내려오고 있는 거였다. 놈이 주먹질을 해온 아니라 손바닥을 펼쳐 그대로 내려찍는 중이었으니까.
“……!”
사위를 덮친 그림자로 미뤄봤을 때, 그의 몸이 ‘안전지대’에 닿으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필요했다.
그러나 놈의 보랏빛 손바닥이 벌써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고.
‘설마.’
지글거리던 그의 투지가 다시 사그라지려는 순간.
홰액!
또 하나의 푸른 궤적이 그를 낚아챘다.
테르가의 손아귀 밑에서 찌그러지기 직전에 말이다.
타아앙!
놈의 손이 충격파를 뿜어내며 땅을 내려친 시점에, 정우는 현장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개활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한 탓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자신을 받치고 있다는 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뭐, 뭣…….”
그가 경황없는 소리를 내며 손을 더듬거리자,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털이 만져졌다.
다름 아닌 냄새였다.
그 짧은 순간에 냄새가 치고 들어와 정우를 빼낸 것이다.
실로 엄청난 속도.
“……아.”
무언가 감이 잡힐 듯해서 미간을 실룩이고 있자, 냄새가 숨을 헐떡이며 물어왔다.
* 아직. 약해?
테르가를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라는 이야기 같았다.
이에 정우가 도리어 냄새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처럼 몇 번이나 더 움직일 수 있지?”
그러자 냄새가 속도를 천천히 늦추며 대답했다.
*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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