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대혼란 (1)
요리사부터 변호사, 육상 선수까지.
온갖 유형의 사람이 있던 자리엔 이제 푸른 빚깔의 구체만이 남아 있었다. 의외로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조금 멍해졌을 뿐이다.
“음.”
정우는 잠겨 있던 목을 가다듬으며 정수밭을 가로질렀다.
티틱, 티티틱.
무려 오십여 명이 남긴 유산.
스아아…….
정수 보유량이 빠르게 치솟는다.
1,953……2,137……2,310…….
끝도 없이 늘어나던 정수는 2,597개에 이르러서야 성장을 멈췄다.
불과 오늘 아침에만 해도 정수 5개를 들고 있지 않았던가.
현재 시각, 오후 4시 2분.
약 8시간 만에 500배 수준으로 불려 버린 것이다.
‘선’을 넘은 대가로 얻게 된 엄청난 성장력.
그래서 더욱 소롬이 끼쳤다.
“……”
구원자순위가 여전히 ‘3’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아직도 내 위에 있는 녀석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면서도 은연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첫 학살을 감행한 주제에, ‘진짜들’의 영역을 넘보려는 것이냐고.
자꾸 잊게 되는데. 이 순위란 것은 대한민국 내 모든 구원자를 대상으로 집계한 결과다.
어떻게 보면 지금 붙들고 있는 3위란 자리조차 과분한 걸지 모른다.
‘계속 달려야 돼. 위로 올라가는 것 이전에 이 자리를 지켜 내는 것부터 하자.’
전국 단위의 살인 경쟁.
정우는 새삼 조바심이 났다.
슥.
매장 1층, 상훈이란 사내가 죽은 자리로 그의 고개가 돌아간다.
좋은 예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힘을 가지고 있어도 더 나아가길 멈춰 버리면 결국 어떻 게 되는가에 대한 예시 말이다.
그리고 정우가 물건을 챙기기 위해 1층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어.’
미묘한 기척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평가관이, 갑자기 접촉을 시도해 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평가관 ‘다467’입니다.
‘……?’
정우는 녀석이 모종의 격식을 차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평가관이 자신의 이름올 직접 밝혀 온 게 여태 딱 한 번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에게 평가관의 배정이 확정되던 순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다시 나타나서는 두 번째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있구나.’
막연한 추측이지만. 녀석이 한동안 말을 걸어오지 않던 것과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앞에 익숙한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간 박정우 님에 대한 패스파인더 적용이 허가됐습니다.
「구원자J 소속 지역 내 3위
I폐쇄권능 보유자 [대량의 정수 흡수] [투지 가산점 2배율 초과] [처치한 대상 100개체 초과]
‘패스파인더?’
정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평가관이 내민 자신의 ‘성적표’를 유심히 살폈다.
하나같이 ‘많이 죽였음’을 의미하는 지표였다.
즉, 이번 조치는 정우가 본인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걸 치하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패스파인더’가 무엇이냐는 점일 터.
곧 평가관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패스파인더는 유력한 행성 구원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애드온입니다.
애드온.
이 단어에 정우의 눈썹이 실룩인다.
인간들조차 저 단어를 쓰기 시작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구 출신이 아닌 평가관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나오니 무척 낯설었던 것이다.
팟.
이어서 몸에 원가가 덧씌워진 느낌이 났다.
정우는 시야에 또 뭐가 추가됐나 보기 위해서 눈을 굴렸지만, 이전과 다른 게 없었다.
그러자 평가관이 다음 브리핑에 애드온 위치를 자연스레 집어넣었다.
-발치에서 확인할 수 있는 패스파인더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는 정수의 추적, 두 번째는 진입로의 추적입니다.
‘아.’
비로소 고개를 내려 발밑을 본 정우.
그가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원형 금테가 둘러졌고, 그 위에 푸른색 화살표가 놓였다.
푸른 화살표 밑엔 수십 개의 회색 화살표가 금테를 따라 둘러져 있었는데, 비활성화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이를 본 정우가 진입로 위치를 확인하려고 마음먹자 회색 화살표들이 일제히 붉게 물들며 제각기 다른 크기로 변했다.
‘붉은 게 진입로 방향 표시인 건가……. 화살표가 클수록 가까운 거고?’
이에 평가관이 그의 말을 받아서 부연했다.
-그렇습니다. 진입로 추적 모드에서는 거리가 가까운 순으로 최대 30개의 진입로 위치를 표시합니다.
다음엔 발치의 패스파인더가 정수 추적 모드로 자동 변환됐다.
수십 개의 적색 화살표가 일제히 쪼그라들며 회색으로 바뀌었고, 푸른 화살표 만이 최상단으로 떠올랐다.
-정수 추적 모드는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서 정수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정우는 평가관의 설명을 들으며 푸른 화살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북쪽.
예상대로 서초, 강남 등의 2호선에 걸쳐진 번화가 방향이다.
‘다행이다. 아직 털리지 않았구나. 빨리 가야겠어.’
이건 엄청난 소득이다.
헛걸음, 다시 말해 시간을 낭비할 확률을 크게 줄인 셈이 됐으니까.
이곳 사당역에서부터 강남역까지의 최단거리는 대략 5.5킬로미터.
휴대폰으로 접속한 포털 사이트 지도에선 1시간 22분이 소요될 것이라 보고 있었지만, 실제론 서너 배 이상 걸릴 거다.
대부분의 길목이 차량 따위로 막혀 있올 테니까. 거기에 더해 자경단이나 인간 사냥꾼들과의 마찰…….
게다가 정부가 예비군 소집령까지 내린 지금, 대법원이 있는 서초나 강남 같은 번화가엔 군 병력이 깔려 있을 가능성도 상당했다.
‘혹시 정수의 추적이 단일 대상을 가리킬 수도 있나요? 언젠가 추적 범위 내에 정수를 몇만 개씩 들고 있는 놈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정우는 1. 2위 구원자가 이미 이 애드온올 얻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 때문에 구원자 순위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패스파인더를 이용해서, 결코 만나선 안 되는 적도 피할 수 있을지를.
그러자 평가관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조건이 충족된다면 단일 대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패스파인더 가 지목한 것이 특정 범위인지, 하나의 대상인지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겠죠. 이제 막 목적지에 닿으려는 참인데, 화살표가 확 돌아가면 그쪽에 원가 나타났다는 뜻이 되는 거잖아요.’
어쨌든 이건 엄청난 지원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행선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정수의 추적과 진입로의 위치 표시…….
비로소 구원자로서 갖춰야 할 것들을 다 얻은 기분이 들었다.
***
약 1시간 30분 뒤. 방배역 근방.
드륵, 드르륵.
정우가 밀고 가던 카트를 제자리에 멈춰 세웠다.
“후.”
카트 특성상 제각기 따로 노는 4개의 바퀴는 본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노면이 아스팔트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고역이었다.
가는 길마다 온갖 장애물이 들어차 있어서 차도와 인도를 오가며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 오후 5시 43분.
하늘에선 아직도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었다.
정우는 번들거리는 얼굴을 닦아 내며 뒤를 돌아봤다.
“이거 미련한 짓이었네요. 카트는 버리고 가죠. 가능하면 소모품이나 식량 같은 건 그때그때 수급해야겠습니다.”
살인에 이어 약탈도 하겠다는 소리다.
정우가 카트 안에서 꼭 필요한 물건만 골라내고 있자 선웅이 맥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든지 시행착오가 있는 법이지요.”
그 역시 이곳까지 오면서 카트를 교대로 몰았기에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정우가 스타벅스 매장의 물품들을 보존한 게 다행이었다.
온갖 의약품과 파스. 붕대, 봉합용 바늘 같은 응급처치 용품을 잔뜩 챙길 수 있 었으니까.
매장 주방에서 생과일과 야채를 양껏 먹은 건 덤이다.
의외의 소득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현금이었다.
계산대에 보관되어 있던 현금 50만 원.
스타벅스의 경우 현금 없는 매장이 왜 많은데, 다행히 사당점은 아직 현금을 비치해 둔 상황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망해 버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의 화폐를 쓸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언제든지 전력이 끊길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 카드 결제를 받진 않을 테고요.”
당시 정우는 이렇게 말하며 계산대를 털었다.
비록 주장의 근거가 멸망류 소설이긴 했지만, 이 점에 대해선 선웅도 동의한 바다.
근방에 진입로가 없고, 치안이 잘 유지된 곳은 여느 때처럼 상점이나 기타 시설이 정상 운영 중일지도 모르는 일.
아무리 정우가 강하다고 해도 모든 일올 무력으로 해결할 순 없을 거다.
현금이 요긴하게 쓰일 일이 있을 거라고, 두 사람 모두 생각했다.
“차만 굴릴 수 있어도 정말 좋았올 텐데요.”
다시금 카트를 쳐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선웅.
“그러게요. 도로가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하필 월요일 아침에 일이 터져서 그렇죠.’’
정우도 차량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정수의 방출을 이용해 도로를 뚫어 가며 이동할 수 있긴 했지만, 이러면 거의 초 단위로 차에서 내렸다 오르길 반복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길을 막은 장애물 앞에서 매번 정수가 활성화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도 카트를 버린 이상, 열심히 걸으면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강남으로의 입성이 가능할 것이다.
“드디어 분기점이네요.”
정우가 휑한 교차로를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사태 발발로부터 시간이 좀 지난 뒤라 그런지,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멀찍이 몇 명이 보이는 것 같다가도 곧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
원가 이상해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살펴보니. 낯선 사람과 접촉하지 말라는 내용의 기사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수를 얻으려고 사람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거다.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경찰이 총동원됐다고 하는데, 정우가 보기엔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사당역만 해도 경찰이라곤 한 명도 없지 않았는가.
다 죽은 걸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이런 기사들 때문에 정부가 주도권을 잡고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정우는 적어도 정부의 영향권에 들어 본 기억이 없지만 말이다.
“이대로 쭉 가야겠지요?”
선응이 교차로의 한 방향, 동쪽을 가리키며 정우에게 물었다.
현 위치는 방배역 근처의 서울고교 사거리.
이대로 동쪽 직행을 택하면 서초동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최종 목적지가 강남역이라고 했을 때, 동쪽 직행은 시간올 조금 손해 보지만, 가장 안전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다른 선택지라고는 이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뒤, 대법원 입구 앞에서 서초역 방향으로 트는 것뿐이었으니까.
알다시피 대법원 뒤엔 대검찰청이 있고, 거기에서 좀 더 올라가면 서울지검과 서울지법, 서울 서초 경찰서 등등 온갖 ‘정의로운 것’이 다 모여 있다.
그러니까 이미 사람을 죽였거나 죽일 예정인 인간들은 결코 가까이 가선 안되는 구역인 셈이다.
하지만 선웅은 목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했 다.
“……”
박정우가 즉답을 해 오지 않고 휴대폰만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설마 법원으로 쳐들어가서 판검사 할 것 없이 다 죽이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아니겠지…….
“정우 씨?”
선응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다시 말을 걸자 정우가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대법원은 이미 털린 것 같은데요……?”
“아아…… 예? 뭐라고요?”
홱.
선웅이 황급하게 정우의 휴대폰을 낚아챈다.
그러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불과 12분 전, 포털 사이트 메인에 떡하니 올라온 속보.
「대법원에 사자 무리 난입…… 사상자 잇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