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52
256화. 달리는 성역(5)
치익.
-진심입니까?
규성이 호출을 하자마자 무전기 너머에서 날 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관실이 포함된 1호 차의 보안 담당자는 특급 위험 상황이 아닌 이상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이를 모를 리 없는 규성이 꼬리 칸으로 와 달라고 하자 귀를 의심한 것이다.
“예, 당장……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규성이 객실 중앙에 서 있는 정우를 곁눈질하며 말했고, 이에 상대가 도리어 다른 질문을 해 왔다.
-나머지 둘은?
3호와 5호 차의 보안 담당자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산 채로?
“……예.”
-그럼 대체 무슨 상황이죠? 두 사람이 여태 살아 있다는 건 문제가 해결됐거나 제압당했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런데 나를 왜 부르는 겁니까?
대화가 묘하게 흘러간다. 두 합 만에 규성이 대화의 주도권을 뺏겨 버렸다.
“그, 그것이…….”
말을 더듬던 규성은 끝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러곤 비참한 눈빛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자신이 일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정우는 오히려 감탄하는 중이었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군.’
과연 기관실을 맡고 있는 인물답다고 해야 할까.
통찰력이 있는 건 물론 강단도 보통이 아니었다.
슥.
정우가 손을 내밀자 규성이 눈을 껌뻑거리다 무전기를 건넸다.
“이봐, 그럼 내가 그리로 직접 가면 되겠나?”
1호 차를 향한 정우의 첫마디.
이를 들은 상대는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을 다 정리했는지 천천히 대사를 읊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뭡니까?
치익.
“목적?”
정우는 상대의 질문을 받고서 간만에 고민을 하게 됐다.
목적이라고 한다면 행성 폐쇄 중단뿐이었으니까. 이 기차에 오른 것 역시 그 과정의 일환에 불과했고 말이다.
그러나 상대가 물은 건 그런 의미가 아닐 터.
“가장 강한 자에게 기차를 통째로 주겠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기차를 접수했을 뿐이다. 대신 운행에 필요한 자들은 가급적 살려 놓도록 하지.”
정우가 말한 ‘가급적’이란 표현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를테면 끝까지 저항하는 자는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더라도 죽일 수밖에 없다는 등의.
-기차의 주인을 정하는 건 앞으로 세 번째 역…….
“개소리하지 마. 이미 놈도 내가 여기에 탄 걸 알고 있을 거다. 본래 주인이 마음에 들었다면 녀석이 날 꺾을 수 있길 기원해.”
-…….
정우가 자신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천명하자 마침내 상대가 쓸데없는 말을 전부 치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얼굴이나 보자고 기관실을 비울 순 없습니다.
“좋다. 그럼 내가 그리로 가겠다.”
정우는 이 말을 끝으로 무전을 끝냈다.
그러곤 여전히 긴장한 기색의 규성을 향해 지시했다.
“넌 저 녀석을 데리고 의료실로 가. 처치가 끝나면 업무로 복귀시켜라.”
‘저 녀석’이란 허벅지에 구멍이 뚫린 3호 차 보안 담당자 류채원을 뜻했다.
“아, 알겠습니다.”
규성이 벌벌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숙이며 움직였고, 이를 본 5호 차 보안 담당 이태령과 꼬리 칸 응접 실무자 우화량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왜 자신들에겐 별말이 없느냔 말이다.
이에 정우가 태령을 가리켰다.
“넌 나와 함께 기관실로 간다.”
그러자 태령이 대번에 우화량과 여전히 객실에 가득 찬 ‘도전자’들을 바라봤다.
“여긴 실무자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곳입니다. 저 또한 자리를…….”
어설프게 1호 차 담당자 흉내를 내는 것이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꼭 살려 둬야 하는 자인가?”
“……?”
갑작스런 정우의 물음에 태령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무슨.”
그러다 정우의 손가락이 우화량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태령은 망설였다.
5호 차의 꼬리 칸 응접 실무자 우화량.
별다른 기술 없이 2천만 개라는 어중간한 양의 정수만 가지고 있는 자.
그러나 처와 자식을 기차에 태우기 위해 꼬리 칸 배정을 자처했고, 태령 역시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살리고 싶었지만 육중한 존재감을 가진 박정우 앞에서 거짓을 고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닌가 보군.”
태령의 눈빛을 본 정우가 우화량을 향해 손을 펼친다.
숱한 선택을 거쳐 온 그였기에 태령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린 거다.
그다음 간파의 보고를 읽은 건 순전히 확인 차였다.
|이태령이 우화량을 살리고 싶어 합니다.
|이태령이 거짓을 준비 중입니다.
“어차피 여길 더 이상 ‘감당’할 필요는 없을 거다. 같이 지우는 게 깔끔하겠군.”
마침내 정우가 눈을 파랗게 태우자 멀거니 서 있던 태령이 화들짝 놀라며 팔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최소한 당분간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가 주장한 ‘우화량’의 가치는 절박함.
가족들을 보전하기 위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사이에서 업무를 보아 온 사람이다.
그러니 계속 살려 둔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기차가 돌아가는 형편도 잘 알고, 험한 일을 시키기에 최적화된 인재입니다. 이 기차를 계속 운용하실 거라면 반드시 쓸데가 있을 겁니다.”
험한 일을 시키기에 최적화된 인재…….
나쁜 말로 막 굴리다 버려도 되는 자원이라는 의미.
실제 처지가 정말 그랬기에 태령의 ‘변호’를 듣는 우화량의 표정은 처참했다.
그럼에도.
“살려만 주십시오.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는 납작 엎드린 채 정우에게 절을 하며 사정했다.
|이태령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화량은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간파 또한 두 인물의 대사를 검증해 줬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럴싸하군.”
정우는 우화량이 객실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는 걸 보면서 그대로 가시를 뿜어냈다.
쫴애애애액!
이태령과 우화량,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를 향해서 말이다.
“……!”
꼬리 칸엔 피라미도 있었지만 수준급의 대어도 있었다.
대어들은 가시가 뿜어져 나온 걸 용케 감지하고서 모든 정수를 보호막에 쏟았고, 덕분에 첫 공격을 버텨 냈다.
“이, 이 미친 새끼! 우릴 한꺼번에 다 죽일 생각이었어!”
“닥쳐! 그럴 시간에 달려들어!”
“전부 덤비면 한두 놈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제길.”
생존자는 넷. 각자 다른 대사를 뱉으면서도 행동만큼은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정우에게 몸을 날린 것이다.
“벽 쪽으로 붙어! 이 자식, 기차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죽음의 예감 덕분에 매우 현명해진 누군가가 상대의 특징을 브리핑했으나 너무 늦은 때였다.
이젠 목표물이 넷뿐이지 않은가.
수백의 목표물도 정확히 저격하는 정우에게, 근처 사물을 건드리지 않고 네 사람만 해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
정우는 눈을 감고 있었다.
레이더에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약 기운이 거의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그의 정수를 아주 기민하게 만들었고, 정우는 장내를 휘감은 공기의 결을 한 올씩 세어 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쫴애애애액!
여지없이 뿜어져 나간 두 번째 가시.
이번엔 아까보다 가시의 밀도가 훨씬 높았기에 생존자가 있을 수 없었다.
콰악, 콱!
각자 네 방향에서 달려들던 도전자들은 꼬챙이에 꿰뚫린 쥐새끼처럼 제자리에 축 늘어졌다.
이번에도 객실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지만 보안 담당자들을 제압할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흩뿌려졌다.
파팟, 팟.
이윽고 최후의 4인에게서 정수 구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이를 본 태령이 황급히 외쳤다.
“이리로 굴러요!”
여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우화량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횡령이지 않겠는가? 만약 우화량이 허공에 솟은 구체와 닿아 버린다면 말이다.
“헉……!”
태령의 말을 바로 이해한 우화량이 잽싸게 취한 행동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펐다.
다다닥!
보유한 모든 정수를 신체 강화에 부으면서 네발로 기어 움직였으니까.
지금 그에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거다.
“…….”
우화량이 구체를 피해 기어 오는 걸 본 태령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고, 그사이 정우가 객실 안에 수북이 쌓인 정수들을 흡수했다.
티틱, 틱, 스아아…….
전투 난이도에 비해 그 보상이 말도 안 될 정도였다.
바닥에 흩어진 정수의 총량은 약 13억 개.
이만한 정수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정우는 정수들을 흡수해 나가면서 1위 ‘종’의 수완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변함없는 구원자 순위에 주목했다.
「5,162,188,305」
현재 정수 총량 51억 개.
그럼에도 여전히 2위였다.
‘믿기지 않는군.’
물론 납득이 아예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 기차를 오래전부터 운용해 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래도 나와 차이가 아주 크진 않을 거다. 지금만 해도 물리적 한계에 거의 도달한 상태니까.’
아무리 기가 막힌 정수 수급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없는 정수를 만들어 낼 순 없는 법.
기차가 억 단위의 정수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일 거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천만 단위 각성자면 지역 하나를 평정할 정도였으니까.
“움직여.”
정우가 태령을 향해 기관실로 안내하란 제스처를 취하자 우화량이 정우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럼 저는 뭘 할까요?”
전장 한복판에 있던 우화량은 도전자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였다.
덕분에 지금도 옷소매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이를 본 정우는 객실을 눈으로 훑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단 씻어. 그리고 여길 최대한 원상 복구시켜 놔라. 조만간 사람을 태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 * *
“어……?”
“누, 누구신…….”
아이러니하게도, 기차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이 기차에서 중요도가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다름 아닌 사무국 직원들.
이들은 꼬리 칸에서 올라온 웬 사내가 5호 차 보안 담당을 앞세워 걷는 걸 보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패닉에 빠지진 않았다. 어쨌든 보안 담당이 살아 있지 않은가?
불청객이 난입한 전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기차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한 거다.
“…….”
태령은 적당히 불안해하는 사무국 직원들을 뒤로하고서 계속 걸었다.
5호 차를 지나 4호 차의 화물칸으로, 그리고 화물칸을 지나 4호 차의 객실 칸으로.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선 4호 차 객실 칸엔 민간인이 가득했다.
기차 운용에 참여 중인 자들의 일행이었다.
우화량의 가족이 여기에 속했고, 이태령의 아내도 이곳에 있었다.
물론 태령의 직급이 더 높은 만큼 그의 아내는 좀 더 앞쪽 칸에 있었지만 말이다.
“무슨 일 있나요?”
“헉…….”
민간인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아까 사무국보다 더 심하게 동요했다.
몇몇은 심상치 않은 기운의 정우를 보더니 몸을 숨겼고, 먹던 음식을 배낭 사이로 감추는 자들도 있었다.
“별일 아닙니다. 다들 일 보십시오.”
태령이 애써 웃으며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 왔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정우를 이르는 거다.
이에 태령은 답을 하지 않고서 다음 칸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4호 차엔 총 세 개의 객실이 있었고, 모두 민간인을 수용 중이었다.
두 번째 객실 역시 조금 전 들렀던 곳과 반응이 같았으나, 마지막 세 번째 객실은 좀 달랐다.
그곳엔 태령의 아내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이태령이 걸음 내딛자 대번에 어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중을 나왔다.
처음엔 웃고 있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야. 일단 자리에 앉아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별일 아니긴. 겁에 질렸잖아, 당신.”
그러더니 시선을 옮겨 정우를 쳐다봤다.
“……아.”
여자가 침음한다.
직감적으로, 이 불청객이 자신의 남편을 겁에 질리게 만든 원인이란 걸 안 거다.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냐.”
태령은 아내를 천천히 옆으로 밀어내고서 빠르게 걸었다.
그러곤.
드르륵.
3호 차로 이어지는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후끈한 공기가 밀려 나왔다.
3호 차의 꼬리 칸에 해당하는 차량은 조리실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었는지 요리사로 보이는 자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문이 열린 걸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사람이 드나드는 일이 잦다는 방증이리라.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배식하나 보군.”
5호 차를 떠난 이래 처음으로 정우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전문화, 조직화 된 구성에 놀라서였다.
기차의 형태를 띠고 있다뿐이지 여긴 하나의 성역이나 다름없었다.
1위가 단순히 정수만 많이 모으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엿보게 된 순간이다.
텁.
이윽고 조리실의 맞은편 출입문에 다다른 태령이 정우를 돌아봤다.
“여기부턴 많이들 당황할 겁니다. 그러니…….”
“네 관할 구역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정우는 이미 이 기차의 운용 방식을 어느 정도 알아 가고 있었다.
4호와 5호 차의 사람들이 정우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태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령의 관할지였으니까.
그러나 이곳 3호 차는 아니다.
5호 차 담당인 그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다들 이상 징후를 감지할 터.
“3호 차부턴 객실 등급이 높습니다. 결코 해쳐선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내가 결정한다. 열어.”
정우가 눈을 파랗게 밝혔고, 결국 태령이 3호 차 객실 출입문을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