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55
259화. 신임(2)
* * *
세계를, 아니 지구를 구원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현재 시각, 오후 10시 43분.
기차의 주인이 바뀐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나가는 시점.
두 남자는 1호 차 특실의 침대맡에 앉은 박정우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1호 차 보안 담당 진소룡과 3호 차 보안 담당 류채원.
기차에 대한 전수 조사와 결과 보고를 마친 직후라 두 사람 모두 피곤한 상태였지만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전수 조사에 동행했던 아므라라는 사내를 통해 박정우라는 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탑과의 거래.
그리고 그곳에서 가지고 돌아온 다섯 가지 ‘상품’.
아므라가 상품의 내용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으나, 그중 하나의 대가로 박정우가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지 만큼은 상세히 일러줬다.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고통, 서서히 부식 중인 신체…….
사실상 이미 망자인 존재라는 거다.
‘……대체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지?’
소룡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지구 존속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살아 있어야 의미 있는 일 아닌가?
“투약하겠습니다.”
정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위양거가 조심스러운 음성을 내며 주사기를 들었다.
박정우의 지시에 따라 미량의 약물을 추가 투약하기로 한 것이다.
현재 기차의 위치는 지안 시 부근.
그래서 장내 대다수는 조만간 보게 될 ‘새 도전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우가 다소 이르게 약을 투여하는 이유 말이다.
그러나 아므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또 뭘 하시려는 거지?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야 정우 씨에겐…….’
벌레 정도에 불과한 존재들일 것이다.
수십억 개나 되는 정수를 가진 박정우이지 않은가?
적어도 아므라가 보기에 정우가 약을 더 집어삼키면서까지 대비하려는 건 도전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음 정차역인 간저우에 머물고 있을 거란 ‘기존 주인’과의 대결을 미리 준비 중인 걸까?
‘아니야,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이르지.’
그사이 위양거가 정우의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매번 그랬듯 뒤편에 나란히 서서 참관 중인 의사들이 표정을 찌푸렸고, 나머지 일행도 영 거북한 얼굴로 박정우의 상태를 살폈다.
“앞으로 2시간 정도는 버틸 만하실 겁니다.”
위양거가 마치 의사처럼 짤막한 진단을 내린다.
이를 들은 정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되물었다.
“그럼 간저우에 도착할 때쯤엔 약 기운이 거의 빠져 있게 되나?”
이에 위양거가 뒤편의 의사들을 슬쩍 돌아봤다.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거다.
그러곤 다시 정우를 바라보며 사뭇 진지한 자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간저우에 닿기 전에 미리 추가 투약을 해야 할 겁니다. 원하시는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거기에 맞춰서 투여량을 정해 두겠습니다.”
이 기차의 기존 주인, 그러니까 중국의 1위 구원자 ‘종’과 결판을 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 거 같으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정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을 내놨다.
“간저우에선 약을 쓰지 않을 거다.”
“예……?”
위양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으나 정우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다들 이제 업무로 복귀해라. 잠시 쉬어야겠다.”
그가 손을 내젓자 다들 잠시 머뭇거리다가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룡은 기관실 근처의 근무지로, 채원은 다시 3호 차로, 정우 일행은 2호 차의 객실 칸으로.
다만 아므라는 꼬리 칸으로 가게 될 예정이었다.
5호 차 보안 담당 이태령을 도와 꼬리 칸을 잠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정우가 지안 시에서 올라탈 도전자들을 바로 정리하지 않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수억 개의 정수를 흡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는 의미.
그게 대체 뭘까?
드르륵.
꼬리 칸 방향의 출입문을 열던 아므라는 객실을 나서기 전에 정우 쪽을 흘깃 돌아봤다.
사람들을 돌려보낸 정우는 휑해진 특실을 슥 둘러 본 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이제 그의 곁을 지키는 건 냄새뿐이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아므라가 마지막으로 물었고, 정우는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눈을 감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 * *
5분 뒤.
정우는 매끈한 침대보의 촉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이쯤이면 됐다.’
스스로 휴식을 끝낸 것이다.
애초에 잠을 잘 생각은 없었다.
스윽.
정우가 깨어났음을 용케 알아차린 냄새가 묵직한 기척을 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왜?
어째서 벌써 깨어났냐는 물음.
정우는 말똥한 눈빛의 냄새를 잠시 어루만지고서 기관실 방향의 출입문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내가 한동안 정신을 잃을 수도 있으니 잘 부탁한다.”
그러자 냄새가 낮게 그르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때맞춰 차창 밖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기차가 도시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정우는 혹시 모를 상황을 고려해 한동안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수 표식은 기관실을 가리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안 시에 1호 차 보안 담당 진소룡보다 더 강한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좋군.’
정우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휴식을 하고자 감은 게 아니라, 의식 속으로 보다 깊이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간저우에 닿기 전에 ‘사학자’를 사용하고 싶었으니까.
[사학자]침입자와 관련된 정보에 한해, 폐쇄 절차를 거쳤던 타 행성의 기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가격: 행성 폐쇄가 끝나는 시점에 생존 중인 주민들이 거래자를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비고: 행성 기록을 들여다보는 동안은 거래자의 항상성이 15% 밑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우가 사학자를 지금 사용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어차피 간저우에서 패배한다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둘째, 사학자 툴팁의 ‘비고’란으로 미뤄 봤을 때 타 행성 기록을 열람하는 것만으로도 항상성이 떨어지리라는 점.
셋째, 간저우에선 약의 도움 없이 전투를 할 예정이라는 점.
‘통증과 항상성 하락을 동시에 버텨 낼 순 없을 거다. 기록을 보려면 지금뿐이야.’
정우가 간저우에서 약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다소 복합적이었다.
우선, 여신 거래를 놈과의 대결에서 쓰고 싶지 않았다.
[여신 거래]1회에 한 해 정수 총량의 30%가 지급됩니다.
*가격: 정수 지급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이내에 지급된 정수의 10배를 획득해야 합니다.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즉시 사망하고 보유한 정수 전량이 소멸합니다.
*비고: 반드시 행성 폐쇄 기간 내에 거래를 개시해야 합니다.
사용 타이밍을 적어도 하루 내지는 이틀 정도 유예하는 게 정우의 목표였다.
그래야 더 많은 정수를 ‘우주’로부터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
여신 거래로 얻는 정수는 지구에 흩어진 것들을 끌어모으는 방식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여신(與信) 거래.
우주가 조건을 걸고서 정수를 지급해 주는 개념이라는 거다.
지구 입장에서 보자면 유력한 행성 구원자가 외화를 벌어오는 느낌일 거다.
따라서 늦게 사용할수록 지구의 살림에 큰 도움이 된다.
정수 총량 50억 개인 지금 사용한다면 정우가 우주에게서 받아 낼 수 있는 정수는 약 15억 개.
하지만 정수 총량 100억 개일 때 사용한다면 30억 개나 되는 정수를 원조 받을 수 있다.
물론 24시간 안에 300억 개의 정수를 획득해야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일러. 더 버텨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단 한 번뿐인 ‘외화 벌이’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예정이라는 것.
‘나보다 10억 개 정도를 더 들고 있는 수준이라면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은 아닐 거다.’
이건 정수 총량의 20퍼센트를 항상 보전하는 ‘무한대’와 절대 부러지지 않는 칼날인 ‘충신’에서 기인한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약 기운이 빠지면 정수가 어마어마하게 기민해져. 이게 변수를 만들어 줄 거야.’
이것이 바로 정우가 간저우에서 약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유.
고통에 찌들어 정수가 아주 기민해진 상태에서 ‘종’과 싸우려는 거다.
어디까지나 여신 거래를 아끼기 위한 정신 나간 시도였지만 적어도 정우가 보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지구도 이 위험천만한 시도에 동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정우는 여전히 잠잠한 가이드라인을 바라봤다.
기차에 탑승한 이후로 지구가 더는 간섭을 해 오지 않고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지구 자신에겐 유리한 일이기 때문일까.
‘혹시 놈도 탑과 거래를 했나? 녀석은 가이드라인의 보조를 받고 있지 않잖아? 그런데도 탑과 접촉을 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겠군.’
그러나 지구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의식 속의 평가관만이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났는데, 이건 그저 정우가 사학자를 발동시키려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현재 시각 오후 10시 56분.
‘종’과의 결판을 지은 뒤 수면을 취할 것까지 고려한다면 사실상 6일 차가 다 지나가고 있다.
이제 7일 차에 들어올 침입자들과 중국의 남은 진입로를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종’을 꺾는다면 중국의 1위로서 선두 특혜에 참여할 수도 있을 테고.
‘일단 그 행성 기록인지 뭔지부터 보자고.’
정우는 더 이상 생각하길 그만두고 곧바로 ‘사학자’를 발동했다.
팟.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탑과의 거래에 응하고 진입로 너머로 빨려 갔을 때처럼 의식이 통째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다.
쏴아아앗!
‘설마.’
이번에도 시간이 다르게 흐를까 싶어 잽싸게 주변의 에너지를 감지하려 애썼으나, 이미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이게 무슨?’
조금 전만 해도 침대에 누워 있던 정우는 어느새 두 발로 서 있었고, 심지어…….
탁.
육체가 있었다.
목을 어루만지자 피부 안쪽의 힘줄이 느껴지는 게 그 방증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 공간이 바뀌었을 뿐이지 그가 느끼는 모든 게 실제와 같았다.
의식체로만 존재하던 이전의 ‘우주적 공간’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하고선 깜짝 놀랐다.
목 안쪽에서부터 뻗어 나온 음성이 자신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뿐더러 아득하게 울리기까지 했으니까.
이 공간이 무한하지 않고, 어딘가에 벽면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슥.
비로소 정우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그러자 군청색 바닥이 눈에 들어 왔다.
돌로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고, 팽팽하게 뒤집어씌운 가죽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지금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
명백히 육신을 갖춘 지금, 육안으로 바닥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어디엔가 빛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정우는 빛의 발원지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온통 칠흑 같은 어둠.
그러다 마침내 정우가 빛의 발원지를 찾아냈다.
다름 아닌 머리 위.
정확히는 머리 위 허공의 저편에서 옅은 불빛이 부드럽게 발산되고 있었다.
마치 안개에 가려진 달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후우우우욱…….
정우가 ‘달’을 쳐다보고 있자 무지막지한 기척과 함께 달이 서서히 커졌다.
아니, 달이 다가오고 있는 거였다.
“아…….”
비로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은 정우가 묘한 신음을 낸다.
스으읏.
때맞춰 바닥인 줄 알았던 발밑의 무언가가 통째로 들어 올려졌다.
부드럽고, 왜인지 우호적인 느낌이 드는 움직임이었다.
고급 엘리베이터에 탄 것처럼 정우는 매끄럽게 상승했다.
스으으.
정우를 들어 올리던 바닥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행동을 멈췄다.
‘달’ 역시 정우의 시야를 반쯤 채울 수준까지 다가와서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
달, 둥그스름한 빛 덩어리 속에서, 정우는 모종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467.”
정우가 4음절의 고유 명사를 발음하자 빛 덩어리가 일렁이며 반응을 보였다.
-인간, 박정우 님께서 사학자를 발동하였으므로 지금부터 행성 기록을 개방하겠습니다.
‘달’의 안쪽에서부터 음성…… 아니, 의미가 뿜어져 나온다.
첫째와 둘째가 사용하던 초월적 언어와는 또 다른 형태였다.
정우는 지금 담당 평가관 다467의 손 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