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56
260화. 신임(3)
* * *
‘엄청나군.’
정우는 평가관의 거대한 모습을 보고서 감탄했다.
‘다467’의 외형은 5일 차에 만났던 관찰자 다홉과 매우 흡사했다.
그렇다면 같은 종족일 것인가?
‘글쎄, 그건 아닌 것 같고.’
정우는 은은하게 빛나는 평가관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확실히 다르다. 다홉의 머리통에 해당하던 ‘흰 구멍’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구성 물질 역시 다른 것일 거다.
군청색을 띠는 피부도 또 하나의 차이점.
스으윽.
그사이 평가관의 반대편 손이 허공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어둠으로 찬 허공에 밝게 빛나는 표식을 만들어 냈다.
팟.
“……!”
이를 본 정우의 동공이 커진다.
다름 아닌 ‘초월적 문자’였기 때문이다.
진입로 너머에서 만난 첫째와 둘째가 상품을 보여 줄 때 사용했던 그것 말이다.
“네가 어떻게 저 문자를 사용할 수 있지?”
저 문자가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 두루 주어진 게 아니라는 건 지난 경험들을 통해 잘 알았다.
고등 침입자이던 관찰자들조차도 저런 문자는 사용하지 못했고, ‘지구 안에서’ 저 문자를 사용한 건 탑과 함께 나타났던 ‘벌레’가 유일했다.
즉, 지금까지 접한 정보에 따르면 저 문자는 우주에서도 상위에 있는 존재거나 그러한 존재의 대리 역할을 맡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행성 폐쇄라는 우주 차원의 작업에 ‘평가관’이란 직함을 가지고 나타난 녀석들이 하등한 존재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월적 문자를 사용할 정도의 신분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다.
대체 뭘까? 정수 총량이 25개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내내 함께해 온 이 존재의 정체는.
“넌, 누구지?”
정우가 음성을 내어 묻자 다467이 다시 얼굴을 일렁였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질문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답을 주진 않았다.
항상 그랬듯 묵비권을 행사한 거다.
대신 허공에 떠오른 표식을 가리키며 의미를 뿜어냈다.
-행성 기록이 준비되었습니다. 접촉하여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에 정우는 고개를 돌려 표식을 바라봤다.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바로 이해되는 초월적인 문자.
정우는 저 표식과 직접 접촉할 것도 없이 의식적으로 승인하면 곧바로 ‘열람’이 시작될 거란 걸 깨달았다.
“좋다. 열람하지.”
정우가 승인을 하자 평가관이 빚어낸 표식이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다음엔.
화아앗…….
허공에 에너지 덩어리가 나타났다.
원형을 이룬 윤곽 안쪽으로 고밀도의 에너지가 나선형을 그리며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게 보인다.
‘저게 행성 기록이구나.’
정확히는 행성 기록의 원형, 데이터 뭉치.
잠시 뒤 평가관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손으로 무언가를 했다.
아마도 행성 기록을 열람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기 위한 동작이었을 거다.
평가관의 움직임이 끝난 직후 원형의 에너지가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파앗!
“흡.”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운 모종의 인터페이스에 정우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행성 기록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열람 가능한 행성 개수 : 14,245,282개
[가] 2,771,526 [나] 2,304,175 [다] 3,642,588 [라] 1,531,065 [마] 2,516,412 [바] 1,479,516‘1,400만 개?’
행성 개수 표시 밑으론 ‘가’부터 ‘바’군으로 분류된 카테고리가 쭉 늘어져 있었다.
각 카테고리 오른편의 숫자 역시 행성의 개수를 뜻하는 걸 거다.
이를테면 ‘가’군에 속한 행성의 숫자는 2,771,526개라는 의미.
다만 일부 군은 행성의 개수가 유난히 많거나 적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바’군 밑으로도 한글순으로 카테고리가 더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고, 글자 역시 반투명하게 표현되어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럼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섯 개 항목뿐인가.’
물론 충분히 많았다. 행성 개수만 해도 14만 개에 이르니까.
만약 나머지 카테고리가 개방되어 있었더라도 다 살펴볼 수 없었을 거다.
“이걸 어떻게 다 보지? 이곳에서의 시간은 좀 느리게 흐르나?”
정우가 다시 평가관에게 질문한다.
그러자 평가관이 거대한 머리를 살짝 틀었다.
아마 녀석도 정우를 따라 행성 기록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사학자의 시간은 체류 중인 공간의 질서에 예속됩니다.
그러더니 정우가 알아듣기 쉽도록 부연했다.
-인간, 박정우 님께선 현재 지구의 질서 안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럼 기차에 남은 내 육신은?”
-사학자의 권리에 따라 보호 중입니다.
“……그렇군.”
마지막 설명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이곳에 있는 동안은 몸이 상할 우려가 없다는 뜻이리라.
정우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행성 기록을 살폈다.
약 270만 개의 행성이 편성된 ‘가’군을 활성화하자, 기록 인터페이스가 어딘가로 접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셀 수 없이 많은 별빛이 깨알처럼 흩어졌다.
“허…….”
까만 배경에 각양각색의 불빛들.
우주의 한 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다.
각각의 별빛이 ‘가’군의 행성인 것이다.
“이게, 그러니까.”
정우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별빛을 하나씩 바라보자 그때마다 그의 머릿속에 일련의 문자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가2632, 가8, 가18003, 가47, 가2084129…….
뒤에 붙은 숫자가 제멋대로다. 어떤 건 한 자리, 어떤 건 일곱 자리.
“그렇군.”
정우는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숫자가 행성의 일련번호인 거다.
그리고 ‘가’군엔 가1부터 가2771526까지 존재할 테고.
“…….”
여기까지 생각한 정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흐릿한 달처럼 보이는 평가관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467.”
이곳에 와서 두 번째로 발음하는 평가관의 이름.
그러나 첫 번째와는 조금 다른 의미라는 걸, 녀석도 아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일렁이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거칠게 출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군 행성들을 보여 줘.”
정우가 주문하자 행성 기록이 평가관의 조작 없이 스스로 움직였다.
스르릇.
사위를 가득 채웠던 별빛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곧 또 다른 별빛들이 공간 곳곳에 들어섰다.
[다] 3,642,588360만 개의 행성이 편성된 ‘다’군이었다.
‘멀쩡한 검색 기능이 있었군. 당연한 일이다만.’
정우는 반짝이는 별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다’군의 467번째 행성, 다467을 바로 불러내고 싶었지만 그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행성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행성 폐쇄를 겪었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않은가?”
이건 행성 기록에 검색을 주문한 게 아니었다.
평가관에게 던진 질문이었고, 이에 녀석이 답을 해 왔다.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군.”
정우는 답변을 받은 뒤 다시 행성 기록에 검색을 주문했다.
“‘다’군에서 존속에 성공한 행성만 보여 줘.”
360만 개의 행성 중 행성 폐쇄를 끝까지 견뎌 낸 케이스.
정우의 주문에 행성 기록이 짧게 명멸하더니 ‘분류’를 시작했다.
팟, 팟, 파팟, 파팟.
아주 짧은 텀을 두고 한 번에 수백, 수천 개의 별이 사라졌고, 이 작업은 사위가 도로 휑해질 때까지 계속됐다.
‘맙소사.’
정우는 별들이 사정없이 계속 소멸하는 걸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마침내.
팟.
마지막 소거를 끝으로 분류 작업이 멈췄다.
정우가 어딘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 별빛을 찾아 고개를 돌리려 하자 행성 기록이 그의 시야 안쪽으로 남은 것들을 끌어모아 줬다.
사아앗.
“아.”
정우가 짧게 침음한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불빛은 고작 세 개였다.
3,642,588개.
약 364만 개의 행성 중에 고작 세 개만이 존속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601, 다1745103, 다46517…….’
존속한 행성 중에 다467이란 이름은 없었다.
평가관의 호칭과 행성 표기의 유사성이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이 녀석의 행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넌 누구야?”
정우가 다시 질문한다.
그 스스로 어느 정도 답을 내정해 두고 있긴 했다.
평가관의 정체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467이란 행성의 유력한 구원자.
또는 행성 그 자체. 지금의 지구처럼 말이다.
폐쇄 조치를 버텨 내지 못한 행성이 다른 행성의 폐쇄 과정을 기록하는 평가관으로서 재활용되는 것이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여러모로 끔찍한 일.
쿵, 쿵…….
지구에서 사용되는 육신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는 탓에 정우의 심장은 아주 거세게 뛰었다.
‘기록을 보고 있군.’
정우는 다467의 시선이 검색으로 걸러진 ‘다’군의 세 개 행성에 닿아 있는 걸 느꼈다.
“대답할 의사는 없나? 어차피 내가 네 행성의 기록을 열어 보면 그만이야.”
-…….
그럼에도 평가관은 말이 없었고, 정우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다음엔 세 개의 별빛만이 반짝이고 있는 행성 기록을 향해 재주문을 했다.
“다467의 기록을 보여 줘.”
그러자 장내가 다시 어두워지더니 어디선가 별빛 하나가 별똥별처럼 날아들었다.
쏴아아앗……!
제법 날쌘 기척과 함께 등장한 별빛은 정우에게서 약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더니 일련의 문구를 흩뿌렸다.
[다467]상태: 폐쇄
항거 일수: 8
아주 간단한 설명문이었지만 그만큼 아주 강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뭐……?”
항거 일수, 8.
현재 지구는 행성 폐쇄 6일 차를 지나 7일 차로 접어들고 있다.
즉, 행성 다467은 지구로 치면 이틀 뒤에 폐쇄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진입로에서 건너온 무언가에 의해, 8일 차의 어느 시점에 모든 정수를 빼앗겼다.
다467을 무려 8일 동안이나 지켜 온 유력한 행성 구원자들조차 그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전부 죽은 것이다.
왜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지척에서 느껴지는 평가관의 기척은 잠잠했다.
녀석도 정우와 마찬가지로 행성 기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어.”
정우가 짧게 지시하자 다467의 설명문 밑으로 일련의 목록이 펼쳐졌다.
[1일 차]|폐쇄 조치 개시.
[2일 차]|정수 총량 6% 감소.
*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
[3일 차]|정수 총량 7% 감소.
*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
[4일 차]|정수 총량 9% 감소.
* 진입로 생성 속도 30% 증가.
[5일 차]|정수 총량 3% 감소.
* 진입로 생성 속도 30% 증가.
[6일 차]|정수 총량 11% 감소.
* 진입로 생성 속도 30% 증가.
‘11퍼센트? 정신이 나갔군.’
정우는 지구와 같은 구간인 6일 차 정보까지 들여다보고서 잠시 숨을 골랐다.
행성의 정수 총량 정산은 항상 익일에 진행되므로 6일 차에 잃어버린 정수 11%는 5일 차에 발생한 손실로 봐야 했다.
그리고 5일 차의 침입자는 바로.
‘……관찰자.’
다홉, 도르, 테르가.
정우의 머릿속에 관찰자들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다시 말해 행성 다467은 관찰자가 진입하던 구간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거다.
다음은 지구 입장에선 미래에 해당하는 7일 차.
[7일 차]|정수 총량 8% 감소.
* 폐쇄 절차 기한 1일 감소.
선두 특혜 투표만큼은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구도 비슷한 시기에 폐쇄 기한 감소를 선택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다음, 다467의 마지막 날.
[8일 차]|정수 총량 56% 감소.
*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
* 행성 폐쇄.
“……?”
정우를 놀라게 한 건 정수 총량 56% 감소가 아니었다.
최후의 날이었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를 놀라게 한 건 다름이 아니라 8일 차 아침에 진행된 마지막 투표에서 구원자들이 고른 항목이었다.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한 명 희생.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저걸 고르게 될 정도로 다른 선택지가 두려웠단 말인가?’
진입로 생성 속도나 최대 개수 증가, 기한 감소 등의 선택지를 놔두고 최상위권 구원자 하나를 죽이기로 결정한 거다.
이윽고 정우가 모든 항목을 읽었다고 판단했는지 행성 기록이 다시 명멸했다.
그러곤 한 줄의 문구를 띄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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