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대혼란 (3)
정우는 ‘영지’의 물음에 확답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방금 대화로 인해 모든 사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또한 1,131개나 되는 정수를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다만 궁금했다.
4위 구원자가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하는지 말이다.
정우가 행운동에 있을 때만 해도 정수 300개 정도면 순위권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이 지난 지금, 순위권 허들이 네 자릿수까지 올라갔다.
‘이 사람도 나처럼 광역 공격을 하나?’
그가 오른손의 만년필을 꽉 쥐자 낌새를 알아차린 사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영지와 경관들을 제외한 각성자의 머릿수는 열하나.
각각의 정수 보유량은 107개에서 221개까지 다양했다.
저마다 자기 동네를 제패하고 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다.
물론 모든 상황을 타개하려면 그거론 턱도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당장 1,131개짜리 각성자도 죽을 운명이지 않은가.
“시작해요. 살아 나가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전력을 다 보이란 이야기다.
정우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목숨을 담보 잡힌 영지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알고 있던 것이다.
본인의 순위와 닉네임조차 밝혀 오지 않은 저 구원자가 자비를 베풀 리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겨우 세 자릿수 초반대의 각성자들과 힘을 합쳐야 할까?
‘글렀어. 이미 분위기가 변했다. 내 편을 들어 줄 놈은 하나도 없어.’
게다가 상대의 정수는 무려 2,597개.
승산이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음.”
제안 받은 대로 잔챙이들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은 영지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에 정우도 서서히 정수를 예열했다.
만에 하나 영지가 열한 명의 각성자에게 패배할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저 구원자가 죽으면 1,131개짜리 정수가 떨어진다.
누군가 그걸 집어먹고 반격을 해 오기 전에 장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예상대로 영지가 각성자들을 궤멸할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어쩌면 저놈도 여기서 나온 정수를 먹고 나와 붙어 볼 생각인지 몰라.’
긴장감에 단전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위권 구원자는 모두 대량 학살을 거쳤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뢰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자기부터가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는 존재니까.
따라서 영지가 이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으리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놈이 먼저 싸우도록 요구한 것이기도 하고.
알다시피 소모된 정수가 재생되려면 약 3초가 걸린다.
‘개인 차가 있다고 해도 편차가 크진 않을 거야. 먼저 정수를 써 버린 쪽이 무조건 불리하다.’
이윽고 영지가 움직임을 보였다.
슥.
측면으로 이동, 그러니까 전투 대열로 흩어진 각성자들을 정면에 두면서도 경관들을 등지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
이걸 본 정우는 기시감을 느꼈다.
행운동에서 아버지가 자경단원을 베던 장면 말이다.
정우와 선웅을 등진 채, 전방 180도를 쓸어버리던…….
영지는 이 상황에서도 경찰들을 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여태 쭉 저래 왔던 걸까?
아니, 목격자 같은 걸 살려 둔 채로 마음 놓고 돌아다니는 게 가능한가?
휘이익!
이어서 영지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정우는 놈의 손에 아무것도 없는 걸 똑똑히 봤다.
그럼에도.
“헉!”
까무잡잡한 그의 손끝에서부터 시퍼런 칼날이 튀어나왔다.
검신의 길이는 대략 2미터.
일전에 스타벅스에서 본 바로 그 기술이었다.
푸아아악!
정수 특유의 파열음과 함께 영지의 앞에 서 있던 사내 둘이 동강 났다.
‘아니, 한 합에 겨우 둘씩 처리한다고? 저래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투 방식.
이건 스타벅스에서 죽인 상훈이란 사내가 그대로 살아서 더 성장했다면 어땠을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장기전엔 확실히 유리한 스타일이지만, 다수를 상대로 저렇게 싸웠다간 반격을 피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측면에서 대기 중이던 각성자 하나가 곧바로 정수의 파동을 뿜었다.
정면으로 널찍하게 뿜어져 나가는 직선형 파동.
‘미친, 4위라는 게 겨우 이 정도였나.’
영지의 최후를 예감한 정우가 만년필을 내뻗으려던 순간.
츠아아아악!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마찰음이 났다.
닉네임 ‘영지’, 국내 4위 구원자가 측면 기습을 막아 낸 거였다.
왼팔로 빚어낸 커다란 방패를 이용해서.
“억…….”
정우의 뒤편에서 이를 보고 있던 선웅마저 입을 쩍 벌렸다.
놈이 만든 방패는 세로 길이가 본인의 신장과 똑같은 직사각형이었다.
“어엇?”
영지에게 기습을 감행했던 사내는 자신의 공격이 막히는 걸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는 아주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상대의 검신 궤적에 휩쓸렸다.
이걸로 셋.
곧 사망자가 넷, 다섯으로 늘었고, 영지의 정수 보유량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근접전을 펼친 덕분에, 망자에게서 정수가 떨어짐과 동시에 흡수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와.’
이걸 본 정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영지가 미련해서 ‘검’을 뽑아 든 게 아니었다.
각성자들을 광역기로 일시에 정리하면 토사구팽당할 게 빤하니, 일부러 근접전으로 정수를 보존한 것이다.
아니, 보존을 넘어 오히려 불려 나간 셈이다.
놈의 정수는 이미 1,800개를 돌파하고 있었다.
소름이 쫙 돋은 정우가 잽싸게 만년필을 휘두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지의 방패가 다시 전개됐다.
이번엔 놈의 검이 보이지 않았다.
검을 빚는 데 사용한 정수까지 전부 방패에 몰아넣은 거다.
이어선 역(逆) 고깔 형태의 정수 파동이 영지와 근방의 각성자를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푸아악!
츠즈으으읏!
아까와 비슷한 소리가 또 났다.
정수와 정수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
방금 공격에 2천 개가량의 정수를 쏟았지만, 정우는 상대의 방패가 뚫리지 않았으리란 걸 직감했다.
방패의 정수 밀도가 훨씬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흡……!”
역시나 영지는 파동에 휩쓸리고도 제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대신 그가 빚은 방패엔 흰색 균열이 거미줄처럼 생긴 상태였다.
‘내구도가 떨어지면 저렇게 금이 가는구나. 검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이제 정우가 3초 이내에 사용할 수 있는 정수는 약 600개.
놈에겐 얼마나 남았을까?
저쪽도 방패가 박살 난 이상, 대략 3초는 무방비 상태다.
팟!
대범하게도 영지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정우를 향해 달려드는 게 아니라 방금 그의 공격으로 사망한 각성자들의 위치에 뛰어들고 있었다.
놈들이 남긴 정수를 노리는 것이다.
“거기까지입니다!”
정우로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상대의 정수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걸 보여 주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남은 정수를 전부 모아 만년필을 통해 뿜었다.
허공의 타격점에서부터 방사된 푸른색 정수.
푸아아악!
가족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던 중년의 구원자는 발치의 정수 덩어리와 접촉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팟.
발목 언저리만 남은 그의 신체에서부터 짙푸른 정수 덩어리가 세 개 떨어졌다.
각각 600개 이상의 정수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엔 나머지 각성자들이 죽으며 남긴 정수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얻은 정수를 전부 합치면 아마 삼천 개가 조금 안 될 것이다.
대법원의 사자들을 만나기도 전에 정수가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난 거다.
“…….”
정우는 색이 진한 정수 덩어리부터 하나씩 흡수하기 시작했다.
티틱, 틱.
구원자 3위가 4위를 살해.
랭커끼리 싸우다가 한쪽이 죽었다고 해서 공지 같은 게 뜨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초의 채널에 있던 모두가 이를 알 수밖에 없었다.
영지의 밑에 있던 구원자들의 순위가 한 단계씩 올라갔기 때문이다.
[42] 목동: 어……? [38] 기사도: 미친. [47] 정수왕: 아까 그분 죽은 건가요? [31] 매: 지금 4위가 간 거죠? 정신 나갔네. [19] 악몽: 놀랍다.이 사건을 통해 지금까지 조용히 관전만 하던 일부 구원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거다.
그러고는 순리대로 최초의 채널에 신입이 들어왔다.
|50위 구원자가 채널에 접속했습니다.
51위부터 100위까지가 보고 있었을 2번 채널에서 승격되어 온 녀석이다.
정우 덕분에 무료 이사를 하게 된 셈.
정수 보유량 역전에 의해 채널에 진입하면 저런 알림이 뜨지 않지만, 사망자로 인한 공석이 원인일 땐 알림이 발생한다.
이 때문인지 한동안 채팅이 멎었다.
운 좋게 넘어온 신입의 첫마디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놈은 간단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입이 좀 무거운 녀석일 수도 있지.’
정우는 채널을 주시하면서 정수를 마저 흡수했다.
일찍이 정수 총량이 4천 개를 초과했고, 이후로도 한참 더 올라갔다.
티틱, 틱, 틱.
마지막 정수 덩어리와 접촉한 뒤, 정우가 머릿속에서 보게 된 본인의 정수량은…….
‘5,458.’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네 자리의 숫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일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한동안 고정되어 있던 시야 속의 숫자가 변화했다.
|박정우 님의 소속 지역 내 순위는 ‘2’입니다.
|폐쇄 권능 보유자
구원자 3위에서 2위로 승급.
물론 현 시점 기준일 뿐이지만, 이젠 위에 한 명밖에 없다.
‘2위의 허들이 5천 개 근처였구나.’
정우는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쪽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던 만큼, 위와 아래에서도 비슷한 속도로 질주 중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영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기존 2위와의 차이가 현격하게 벌어졌을 터.
‘그래, 역시 다 죽이는 게 맞다. 쓸데없는 생각은 사치야.’
정우는 영지가 경관들을 남겨 두는 걸 보며 잠시 흔들렸던 자신의 마음을 떠올렸다.
그를 살려 주려던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이기 전에 묻고 싶었다.
무슨 생각으로 경찰을 살려 주려던 건지.
이전에도 사람을 가려 죽인 적이 있는지.
만약 그랬었다면 그 일이 본인의 발목을 잡은 적이 있진 않은지.
“음.”
정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영지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자 저 앞쪽에서부터 어떤 기척이 발생했다.
그건 다름 아닌 경관들이었다.
영지가 살려 둔 사람들.
계급과 나이가 들쑥날쑥한 네 명의 경관은 각자 권총을 들고 정우를 조준하고 있었다.
“기, 긴급체…… 포를!”
경관 중 하나가 정우에게 체포를 고지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턱이 벌벌 떨렸기 때문이다.
얼굴에 식은땀이 이슬처럼 맺힌 건 나머지 경관도 마찬가지였다.
총을 들었음에도 이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차라리 긴급체포고 뭐고 총부터 쐈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막 정수를 불린 상태라 정우도 자신이 실탄 네 발을 한꺼번에 받아 낼 수 있을지 알지 못했으니까.
‘하긴, 총부터 쏠 사람들이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여태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 사람들의 성향을 잘 말해 준다.
이들은 질서의 수호자다.
제대로 된 인간들.
어제까지만 해도 정우는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야 인류가 파멸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구의 성명문이 나타난 오늘.
실제 종말의 모습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세계의 초점은 인간에게 맞춰져 있지 않았다.
이쪽은 그저 소모품일 뿐이다.
기를 쓰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띡.
드디어 최초의 채널에 들어온 신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50] 냄새: 바뀌었다.환경.50위 구원자는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니었다.
‘……맙소사.’
신입의 첫 대사를 멀거니 바라보던 정우는 이내 경관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다음엔 만년필을 뻗으면서 말했다.
“세상이 개판이네요.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래도 고통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