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62
266화. 구원자식 거래 논리(3)
* * *
덜컹.
기차 바퀴가 잠기면서 객실이 짧게 흔들렸다.
현재 시각, 오전 12시 20분.
정우는 손목시계에서 눈을 뗀 뒤 천천히 출입문으로 향했다.
레이더에 따르면 ‘그놈’은 아직도 승강장의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탑승 시도를 하지도,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당황한 걸까?
‘……그건 아닐 거다.’
정우는 자신의 시야 상단에 떠 있는 문구를 빤히 바라봤다.
|박정우 님의 소속 지역 내 순위는 ‘1’입니다.
터키인이 남기고 간 정수를 흡수하자, 예상대로 순위가 역전됐다.
중국의 2위에서 새로운 1위로.
다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당사자’ 두 사람뿐이었다.
[14] 한기 : 어? [6] 북도 : ……? [37] 평야 : 기가 막히는군. [10] 서마 : 어느 구간이지?지금 구원자 채널이 들썩이고 있는 이유는 그저 순위 변동 때문이었다.
터키인이 사망하면서 공석이 생긴 탓에 대다수 구원자의 순위가 한 단계씩 상승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망으로 인해 이 나라의 최강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리라.
‘녀석이 적어도 6위는 됐었나보군.’
정우는 구원자 채널의 반응을 슥 훑었다.
터키인의 사망에 동요하는 자들의 순위만 봐도 생전의 그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럼 순위권이라고 할 만한 녀석들의 정수량이 10억 초반이라고 보면 되나.’
얼마 전까지 이쪽의 정수량이 38억 정도였으니, 현재 3위가 아무리 바짝 쫓아오고 있다 해도 기껏해야 30억 개 수준일 거다.
그리고 4위부터 6위까진 높은 확률로 10억에서 20억 사이.
이 말인즉슨.
‘이 땅에서 7일 차 침입자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셋 정도겠구나.’
정우 자신과 직전 1위였던 ‘종’, 그리고 현재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
‘놈을 반드시 설득해야 해.’
정우는 ‘종’과의 회합을 위해 객실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평가관을 호출했다.
‘적어도 지금 내 눈엔 타이머 같은 게 보이지 않는데……. 여신 거래가 발동되지 않은 상태라고 봐도 되는 건가?’
만약 지금 정우에게 터키인이 발동했던 여신 거래가 그대로 전이된 거라면, 그의 시야엔 24시간을 표시하는 타이머가 나타났어야 했다.
이건 행성 다467의 기록을 살피는 과정에서 직접 확인한 것이기에 확실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박정우 님의 이력엔 여신 거래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침내 평가관의 공식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즉, 여신 거래를 개시한 상대를 죽이더라도 그 대가를 대신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훌륭하군.’
정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조차도 소멸한 존재에겐 채무를 강제하지 않는 셈.
어쩌면 죽음이라는 상태 자체로 이미 ‘대가’를 치렀다고 보는 걸지도 모른다.
정우가 문간의 자그마한 버튼을 누르자, 기차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그러자 저 멀리 3호 차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
탑승 희망자 무리로부터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어떤 소년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
왜소한 몸집, 상당히 유약해 보이는 인상.
‘종……?’
정우는 소년이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걸 재차 확인한 뒤, 상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특별히 어떤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상대의 모습은 정우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주 강렬한 독기를 풍기는 사람이거나 반대로 아주 평범한 느낌의 인물일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정말 녀석이 맞나?’
정우는 상대와의 거리를 계속 좁혀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자문했다.
너무 어리다. 잘해야 고등학교에 갓 진학한 상태일 것이다.
물론 행성을 구원하는 일에 나이 따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구원자 채널에서 대면했을 당시 느낀 위압감을 떠올려보면…….
‘아무리 구원자가 되는 과정에서 단련됐다지만, 그렇게까지 될 수가 있나?’
저벅, 저벅.
드디어 정우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지,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이에 정우도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맞군.’
구원자 특유의 잠잠한 눈빛.
정우는 이 소년이 ‘종’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소년도 때맞춰 담배 연기를 뿜으며 입을 열었다.
“전형적이네.”
“뭐?”
“네 타입 말이야. 전형적인, 강한 놈이라고.”
변성기가 끝난 지 오래 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앳된 티가 났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이 소년이 중국의 구원자 채널을 휘어잡던 바로 그 ‘종’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정우는 말을 하다 말고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약 기운이 거의 다 빠져나가면서 통증이 커지고 있는 탓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종’의 정체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츠즉.
정우가 휘청거리자 그의 발을 감싼 운동화가 승강장 바닥을 거칠게 긁었다.
그는 지금 소년에게서 정확히 21미터 떨어진 지점에 서 있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녀석의 정수량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정말 종이라고?”
정우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붙든 채 말하자, 소년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본래 군사 외교와 내정의 화법은 다른 법이지.”
군사 외교. 구원자 채널을 의미하는 걸 거다.
“어쨌든 축하한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엔 네가 제일 강하잖아.”
그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운 ‘종’은 꽁초를 바닥에 튕겨내고서 품을 뒤졌다.
아마도 한 대를 더 태우려는 듯.
그러다가.
슥.
빈 담뱃갑을 찾아내고선 정우를 쳐다봤다.
“……?”
설마 담배 좀 빌려달란 뜻일까?
정우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으윽……!”
드디어 시작된 거다. 충신으로 인한 극도의 고통이.
화아앗!
고통으로 인해 기민해진 그의 정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레이더’의 밀도를 높이는 거였다.
그러자 종이 이를 살짝 드러내며 불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예의는 좀 없군. 그게 충신의 단점이지.”
이렇게 말하는 종의 눈은 이미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레이더의 탐지에 맞서 그 역시 반항력을 높인 것이다.
“싸울 생각도 없으면서 왜 날 찾아왔지? 묫자리를 찾아 온 거라면 환영한다만.”
“……!”
종의 말에 꽉 감겨 있던 정우의 두 눈이 일순 뜨였다.
놈이 ‘간파’를 통해 이쪽의 의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놈의 의도는.
|종이 강력한 살의를 갖습니다.
|종이 곧 공격을 시작할 것입니다.
“기, 기다려……!”
간파를 보고를 확인한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기다려 달란 말을 내뱉었다.
“네 말대로 충신이 곧 내 이성을 마비시킬 거다. 조만간 제대로 된 대화도 하기 힘들어져. 하지만 시간은 충분할 거다.”
서로 간파를 통해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있으니 길게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만에 하나 이 대화의 결론이 사생결단으로 맺음 된다면 정우는 충신의 고통으로 매우 기민해진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할 테고 말이다.
심지어 이젠 정수 총량도 이쪽이 우위.
슥.
마침내 정우가 종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성이 더 박살 나기 전에 녀석의 정수량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맙소사.’
여전히 태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종의 머리맡에 거대한 숫자가 나타났다.
「6,031,452,477」
60억 개.
정우는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여신 거래를 발동한 터키인을 죽이고 오는 길인 데도 종과의 격차를 크게 벌리지 못한 것이다.
현재 정우의 정수 총량은 67억 개.
사실상 터키인이란 ‘기연’ 덕분에 앞선 셈이다.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을 대체하기 어려우리란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형적일 뿐만 아니라 굉장히 순진하네. 너 같은 녀석이 1위에 오르다니 놀라운 일이다.”
정우의 내면을 대번에 간파하고서 내뱉은 말이었다.
“이 경쟁에서 편법이란 건 존재할 수 없어. 결과가 모든 걸 말해준다. 적어도 지금은 네가 나보다 더 유력한 존재지.”
‘적어도 지금…….’
정우는 종이 벌써 두 번째 입에 올린 ‘적어도 지금’이란 표현을 곱씹었다.
놈의 입버릇이자 기본적인 사고방식인 것 같았다.
현 시점 들이닥친 상황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표현. 그러면서도 곧 이 상황이 바뀌리란 걸 암시하는, 이중적인 표현.
“나와 당장 싸워도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군.”
정우가 이렇게 묻자, 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경험적으로 아는 거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들어 정우를 가리켰다.
이때 정우는 ‘주어진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눈이 완전 감긴 상태였다.
조만간 어마어마한 악기가 그를 휘감을 테고, 그때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눈앞의 구원자와 싸우게 되리라.
“본론부터 말하지. 우리는 싸워선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정우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힘겹게 단어를 내뱉자, 종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왜지?”
“그건…….”
숨을 몰아쉬는 정우.
그러자 종이 정우 대신 말을 이었다.
“곧 보게 될 침입자 때문인가?”
“……!”
여전히 레이더엔 종이 감지되지 않았고, 따라서 정우는 녀석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다.
놈의 낮은 웃음소리가 고막을 통해 들려왔으니까.
“승부를 8일 차로 미루자는 이야길 하러 온 거 아닌가?”
“……사학자를 가지고 있군.”
정우는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종 역시 사학자를 구매하지 않았을 리 없던 거다.
게다가.
|종이 아무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의를 가지고 있다던 종의 의도가 그새 백지로 바뀌어 있었다.
‘……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
터키인이 이쪽을 ‘간파’하고서 놀라던 그 순간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순위권 구원자를 간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구나.’
의도를 아예 가지지 않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초월자들이다.
그리고 종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서 정우를 가지고 논 셈이었다.
그렇게 해도 박정우가 당장 칼날을 들이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았으니까.
그의 표현에 따르면 정우는 강하지만 순진한 타입의 존재가 아니던가.
물론 이 ‘순진함’도 어디까지나 초월자들의 기준일 테지만.
“그럼 네놈은 애초에 모든 걸 예상하고서 날 기다린 거군.”
“엄밀히 말해서 모든 걸 예상하진 못했다. 네놈이 1위가 돼서 나타나는 건 내 예상에 없었으니까.”
그러더니 종이 제법 잘 보존된 기차를 바라봤다.
“네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야. 구원자라면, 네 제안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겠지.”
“…….”
정우는 왜인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종이 자신의 대사를 마저 읊었다.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만약 이 자리에서 자살한다면, 네놈이 무척 곤란해지지 않겠나?”
“말이 모순 돼. 네 말에 따르면 너 역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래서 묻는 거다. 내 자살을 막기 위해, 넌 무엇까지 양보할 수 있지?”
“……뭐?”
“난 순진한 타입이 아니야. 그래서 유리한 위치에 서는 걸 선호한다.”
슥.
급기야 종이 자신의 턱에 손을 갖다 대기까지 했다.
정우는 이 장면을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감지되지 않는 공간의 실루엣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기 위해 자살을 하겠다고?”
“못할 것 같나?”
정우는 종의 음성을 듣자마자 의식 속에서 ‘간파’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종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종이 자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