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65
269화. 망각(2)
* * *
‘애비……?’
정우는 두 음절의 단어를 되뇌었다.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다.
이 시점, 이 상황에 중국의 구원자 채널에서 ‘내가 네 애비다.’라는 문장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탓이었다.
[1] 인간: 네가 내 아버지라고?정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자 상대가 또 한동안 말을 않더니 조금 다른 질문을 해 왔다.
[16] 삼검불: 너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지극히 ‘아버지’다운 멘트.
그럼에도 정우는 상대와의 그 어떤 접점도 느낄 수 없었다.
‘내게 아버지가 있다고?’
여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의문이 비로소 든다.
아버지.
태생이 인간인 이상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
정우는 자신에게도 아버지가 있었으리란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게 누구일진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1] 인간: 어떻게 된 거지? 내겐 아버지가 없을 텐데. [16] 삼검불: 미친 새끼.두 사람이 대화 중인 이 채널엔 48개체의 구원자가 더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이 기묘한 상황을 숨죽인 채 관전 중인 것이다.
[16] 삼검불: 북쪽에서 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쫓기듯 남하 중이다. 오늘 오후쯤엔 청두에 도착할 거야. 네 애비가 누군지 궁금하면 그리로 와라.“…….”
정우는 삼검불이란 자의 통보에 잠시 생각을 했다.
‘오늘 오후면.’
몇 시간 뒤면 7일 차 ‘정산’이 시작된다.
여느 때처럼 지구가 정수 총량 점검을 하고 선두 특혜 투표를 진행할 거란 이야기다.
‘……아.’
정우가 자신의 입지를 새삼 깨달은 것도 이때였다.
더는 2인자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지금은 이 나라의 1위 구원자다.
선두 특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아므라.”
“예.”
정우의 부름에 아므라가 곧장 답을 해 왔다.
“청두가 어디쯤에 있지?”
“그것이…….”
스륵.
아므라가 마차에 놓인 배낭 안에서 중국 전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1,500킬로 지점입니다.”
“북서쪽?”
“예.”
두두두두…….
마침 마차가 이미 북서쪽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남녀 한 쌍을 쫓던 수도자들이 기어 나온 진입로 방향으로 말이다.
“물론 지금보단 좀 더 서쪽으로 틀어야 합니다만…… 어쨌든 청두로 이동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달리면 7시간쯤 걸리겠군.”
“예, 지금까지의 속도로 보면 그럴 겁니다.”
자칭 아버지라는 자가 내일 오후 중으로 청두에 도착한다.
정우로선 가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상대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16위 구원자의 위치를 확보한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정보는 채널의 모든 구원자가 알고 있다.
‘분명히 남하 중이라고 했지. 그렇다는 건 지금 청두 기준으로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고.’
이 말인즉슨, 오늘 오전 중에 북부에서 청두로 향하는 길목에서 매복을 하고 있으면 삼검불을 한발 빨리 만나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머리 회전이 빠른 놈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겠지.’
게다가 삼검불의 채널 내 순위는 16.
정우를 제외하더라도 놈과 대결해 볼 법한 존재가 최소 열넷이나 된다.
물론 ‘종’은 지금쯤 기차에 몸을 싣고 홍콩을 향해 내달리고 있을 테니 최종적으론 열셋.
‘놈들이 이런 기회를 포기할 리 없다.’
6일 차 침입자인 수도자들의 전투력은 10억대 각성자 수준이다.
따라서 현시점 살아 있는 구원자 대다수는 수도자를 피해 도주 중일 게 분명했다. 정수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라는 거다.
그리고 정우의 생각엔 삼검불이란 자도 북쪽의 진입로를 피해 남하 중인 것 같았다.
“청두 위쪽으로 도시가 몇 개나 있지?”
정우가 묻자 아므라가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청두 자체가 산악 지대를 두르고 있는 곳이라 주변에 도시가 많지 않습니다. 정북쪽도 마찬가지로 산맥에 막혀 있고, 북동쪽으로 가야 도시가 두 개 나옵니다. 여길 지나서 한참 더 올라가면 광위안이란 도시가 있고요.”
“여기서 광위안으로 바로 가면 얼마나 걸리겠나?”
“직선 거리상으론 청두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 진입로 정리를 끝낸 뒤 광위안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갑작스런 지시였으나 아므라는 별다른 질문 없이 수긍했다.
대신에.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다고요?”
여태 죽은 듯이 기척을 숨기고 있던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살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 왔는데, 이 마차가 북쪽으로 향한다고 하니 당황한 것이다.
“북쪽에 진입로가 많다.”
“그러니까 남쪽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북쪽은 지금쯤 괴물들 천지일 거라구요……!”
“넌 남쪽에 뭐가 있는지 알고는 있나?”
정우는 ‘종’을 말하고 있었다.
“……네?”
당연하게도 여자는 정우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남쪽으로 가도 넌 어차피 죽어.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 내도 죽는다.”
“…….”
이에 여자의 입이 꽉 물렸다.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눈빛이긴 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처지임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정우가 더 말을 않자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하더니 또 입을 열었다.
“저는 왜 살려 주신 거죠?”
20대 초반. 심지어 앱으로 조건 만남을 하던 여성.
그녀는 자신의 ‘쓸모’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살려 준 것이냐고 물으면서도 두 눈은 이미 정우를 비롯한 마차의 사람들을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차의 구성원이 전부 남성이란 걸 알아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넌 저장고다.”
“네?”
독특한 표현에 여자가 화들짝 놀란다.
“때가 되면 널 정수로 환전할 거야. 그때까진 살아 있어도 된다.”
“정수로 환전…… 한다구요?”
정수로의 환전. 여자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을 지은 끝에 깨달았다.
저게 죽음의 이음동의어라는 걸.
“그때가 언제인데요?”
“아마도 내일. 빠르면 조만간.”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시야 상단의 구원자 순위를 봤다.
|인간, 박정우 님의 소속 지역 내 순위는 ‘1’입니다.
여전히 1위.
그러나 2위 ‘종’과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녀석에게 계약금으로 꼬리 칸의 도전자들을 건네주고 오지 않았던가.
놈이 도전자들을 즉시 해치웠다면 지금쯤 정수 총량이 63억 개 정도 될 거다.
‘나와는 4억 개 차이…….’
그리고 저 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기에 언제든지 순위가 역전될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정우가 여자를 계속 살려 놓고 있는 이유는 여신 거래 때문이었다.
현재 그의 정수 총량은 67억 개.
지금 상태에서 바로 여신 거래를 사용할 경우 약 20억 개의 정수를 더 얻게 된다.
그리고 이 거래를 완전히 마무리 짓기 위해 24시간 이내에 획득해야 하는 정수의 양은 200억 개.
내일 종과 다시 만나서 결투에 승리하게 되더라도 최소 100억 개 이상을 더 흡수해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정수를 다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
정우의 시선이 허공을 떠나 다시 여자에게 닿는다.
‘미리 모아 두는 수밖에 없지.’
「620,531,927」
여자의 머리맡엔 정수 6억 2천만 개를 의미하는 기다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제 앞으로 최소 94억 개의 정수를 더 모아야, 아니 더 태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산 채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일단 한시라도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은 확실했다.
“저, 전…….”
정우의 시선을 받던 여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운을 뗀다.
“전 어떻게 해야 계속 살 수 있죠?”
이에 정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정수 6억 개의 가치를 대체할 순 없을 거다.”
“…….”
단호한 시한부 선고에 여자의 동공이 흔들렸고, 그사이 덜컹거리며 질주하던 마차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두두드드득…….
바퀴에서 일정하게 나던 소리가 불규칙하게 바뀌었고, 이를 느낀 정우는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커다란 진입로가 하늘에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저기였군.”
정우가 침착한 소리를 낸 반면 진입로를 함께 보고 있던 여자는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일종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네 파트너를 죽이는 걸 보고서 내심 감탄했다만, 진입로를 닫고 다닐 수준의 강단은 아니었나 보군.”
정우의 이 말은 네가 운 좋게 순위권 구원자가 됐어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거란 이야기였다. 역시 저장고로 써야 옳다는 말인 거다.
물론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는 자신이 방금 들은 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손발을 꽉 말아 쥔 채 벌벌 떨다가.
파아아앗!
정우가 마차에서 쏘아 보낸 빛줄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걸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다음엔.
콰드득!
그 무시무시하던 진입로가 간단히 조각나는 것도 보게 됐다.
“아……!”
여자의 입에서 비명과 탄성 사이의 무언가가 흘러나왔고, 때맞춰 정우의 팔이 허공을 한 번 더 갈랐다.
쐐애애액!
마차 기준으로 남쪽, 수백 미터 거리에서 고속으로 접근 중인 수도자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이 근처에 진입로가 적어도 하나 이상 더 있는 것이다.
‘이쪽은 놈들에게 완전히 먹혔군.’
정우는 발치의 진입로 표식들을 하나씩 점검하면서 전신을 파랗게 태웠다.
침입자들이 바이러스라면 구원자는 백신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기존 백신으론 막아 낼 수가 없게 된다는 점.
이에 백신도 계속 진화할 필요가 있었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이 시점에 변종을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진화한 백신은 몇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몇 배로 일하는 수밖에 없겠지.’
다행히 ‘종’이 남쪽 끝으로 갔고, 이쪽은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둘 다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면 대륙의 외곽 지역 일부를 제외하곤 정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을 가려.”
정우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수도자들에게 시선을 붙들어 둔 채 입만 움직여 말했다.
그러자 아므라가 되물었다.
“저희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럼…….”
“저 녀석.”
슥.
여전히 시선을 바깥에 둔 정우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여자.’
아직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은 6억 개짜리 정수 덩어리였다.
“네? 왜 저를.”
“그럼 내가 널 여기 놔둔 채 마차를 비울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그건…….”
그사이 아므라가 어디선가 헝겊을 가져와 여자에게 들이밀었다.
이에 여자가 본능적으로 6억 개나 되는 정수를 활용해 보호막을 빚었다.
파아앗!
거의 곧바로 정우의 손짓 한 번에 깨져 버렸지만 말이다.
“널 끌고 저 안으로 들어갈 거니까 눈을 가리는 게 네게도 좋을 거다. 겁에 질려서 발광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
정우가 이 말을 하는 사이 아므라가 잽싸게 여자의 머리에 헝겊을 감았고, 곧 세찬 파공음이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애애액!
수도자들이 공격을 해 오고 있는 거였다.
“시간이 조금 걸려. 그동안 너희는 마차 정비를 해 둬라.”
정우는 왼팔로 보호막을 전개하면서 오른팔론 여자의 멱을 움켜쥐었다.
다음엔.
타아앗!
정말이지 번개 같은 속도로 수도자 무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마차 바깥에 흩어져 있는 수도자들의 수는 무려 열하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입로가 더 없는 걸로 봤을 때 다들 제법 먼 곳에서 온 손님인 게 분명했다.
즉, 일대에선 그 누구도 진입로를 닫지 못한 거다.
‘개판이군.’
정우는 이제 정말 순위권자들이 ‘밥값’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