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67
271화. 망각(4)
* * *
“그러니까, 저 사람이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구원자라고요?”
제법 날카로운 느낌의 목소리가 허공을 찌른다.
송한령, 20세 한족 여성.
정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수 6억 개가 담긴 ‘저장고’ 역할을 맡은 존재.
이에 맞은편에 앉은 아므라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목소리 좀 낮추시죠. 지금 이 시간이 당신 목숨보다 훨씬 귀하니까.”
현재 시각, 오전 7시 8분.
지구의 7일 차 정산과 선두 특혜 선택까지 52분 남은 시점이었다.
이 말인즉슨.
“……”
마차 안쪽에서 자고 있는 정우의 휴식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의미였다.
“이 나라뿐만 아니라, 현 시점 이 행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아므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착잡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봤다.
반면 여자, 송한령은 숨을 세차게 내뱉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여전히 눈에 헝겊이 씌워져 있어 방향 감각이 없는 탓이었다.
아무리 포로 신세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정수 보유량은 마차 내 서열 2위.
이 때문에 정우 일행이 ‘쿠데타’ 시도를 억제하기 위해 눈을 가려놓은 것이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양팔과 발목도 묶여 있었다.
그래도 정우 정도라면 한령이 팔다리의 줄을 끊고 헝겊을 걷어내는 사이 사태를 정리할 수 있을 터.
따라서 아므라는 송한령에게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시한부인 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므라의 시선이 다시 마차 바깥으로 향한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스쳐가는 바깥 풍경은 더없이 밝았다.
그럼에도 왜인지 여전히 한밤중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적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적막한 도로, 멀찍이 보이는 유령도시들.
이 모든 환경이 어마어마한 위화감을 만들어 냈다.
두두두두…….
현재 이 마차의 목적지는 광위안.
이동 중에 각성자를 하나라도 더 만나기 위해 일부러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건만, 남부에서 수도자 무리와 교전한 이후론 그 어떤 생명체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산 자가 있을 리 없지. 수도자들이 눈에 보이는 걸 전부 도륙하며 내려왔을 텐데.’
억 단위 각성자들도 상대할 엄두가 안 나 도망쳐 내려와야 했던 괴물이 바로 수도자다.
만약 이 시점에 북부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아서 수도자들과 동선이 전혀 겹치지 않은 자거나, 다른 지역에 있다가 이제 막 북부로 넘어온 존재거나.
“…….”
아므라가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 한동안 잠자코 있던 송한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요?”
“광위안.”
“광위안……?”
한령이 헝겊 안쪽에서 눈을 굴린다.
그러더니 광위안의 위치를 떠올리고서 입을 쩍 벌렸다.
“여기서 북쪽으로 더 올라간다구요?”
“……소리 좀 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침내 아므라가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본래 성격을 드러냈다.
지금이야 박정우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몽골족 연합군 소속으로 한족들을 도살하던 그다.
아므라가 작정을 하고 살기를 내뿜자, 한령의 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미, 미안해요.”
“내게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 네가 사죄해야 할 사람은…….”
말을 잇던 아므라가 갑자기 입을 다문다.
혹시나 정우가 잠에서 깨진 않았을까 싶어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가 보고야 만 것이다.
“……아.”
깊은 침음.
정우가 말없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므라가 이 작은 소란에 대해 사죄하자 정우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그만 됐다는 뜻을 내비쳤다.
물론 그가 잠에서 깨어난 이유는 송한령의 언성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아므라가 뿜어낸 살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습니다. 마저 쉬시는 게…….”
아므라가 시계를 확인하며 이렇게 말했으나 정우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앞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부석 근처에 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 무슨 일이에요?”
여자, 송한령이 사뭇 긴장한 목소리를 낸다.
수 시간 전, 박정우에게 붙들린 채 수도자 십여 마리와 싸우는 경험을 한 뒤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그녀에게 박정우는 침입자 이상으로 두렵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전방에 뭔가가 있다.”
“……?”
정우의 말에 송한령이 몸을 꿈틀대며 마차 안쪽으로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로 아므라가 정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람일까요?”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하지만 이왕이면 마차를 끌 수 있는 생물이었으면 좋겠군.”
“지금 상태론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
두두두……!
쉼 없이 진동 중인 마차.
이 마차를 끌고 있는 건 각자 천만 단위의 정수를 품고 있는 말 세 필이었다.
유사시엔 냄새가 합류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정우의 고개는 여지없이 가로저어졌다.
“적어도 오늘은 기동력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어야 해.”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7일 차 침입자.
제멋대로 몸의 형태를 바꿔가며 행성의 공간을 대체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괴물이다.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 이상, 7일 차엔 마차가 계속 달릴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쪽으로 가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므라가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킨다.
티베트 자치구를 의미하는 거였다.
“고산지와 평원이 섞여 있어서 목장이 많습니다. 도심지보단 인구 밀집도가 낮으니 진입로도 많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제법 쓸 만한 짐승들이 살아 있을 거란 이야기다.
그러나 정우는 서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7일 차 침입자에게 조기 대응할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 지금 서쪽으로 가기엔 너무 늦었다.”
게다가 정우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단순히 7일 차 침입자만이 아니었다.
‘종’과의 대결을 대비해 충분한 양의 정수를 모아놔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 북부로 향하는 것이고 말이다.
두두두두…….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내달리는 마차.
그러다 이윽고 전방에 어떤 실루엣이 나타났다.
해가 이미 완전히 떠오른 상태라 상대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진 게 보였고, 그 형체는.
“음.”
정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소리를 낸다.
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32분.
7일 차 선두 특혜 선택까지 약 30분 남았다.
정우의 중국 내 구원자 순위는 아직 ‘1’.
그러나 이게 실질적인 순위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정우 자신이 잘 알았다.
‘일부러 모아두고 있군.’
2위인 ‘종’은 기차를 타고 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도시를 두 개 정돈 거쳤을 터.
그럼에도 여태 순위 변화가 없다는 건 놈이 도전자들을 바로 처리하지 않고 살려두고 있기 때문일 거다.
기존에도 둘의 정수 차이가 4억 개밖에 안 됐으니까.
‘투표권을 노리고 있나?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놈도 이쪽과 마찬가지로 결전을 대비해 저장고를 만들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지금껏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온 정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놈이라면 둘 중 무얼 선택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보입니다. 인간 넷, 그리고…… 짐승 하나.”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아므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해왔다.
“짐승?”
짐승이란 단어에 정우가 아므라의 시선을 좇았으나, 원하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
말이나 하다못해 대형 맹수라도 있길 기대했건만 정작 시야에 들어온 건 골든 리트리버였기 때문이다.
평균 체중은 약 32킬로그램, 체고는 60센티미터로 ‘개’치곤 덩치가 큰 편이긴 했으나 마차를 끌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대단한 재주가 있을 리도 만무하니 그저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빠르게 정리해야겠군.”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송한령의 눈에 감긴 헝겊을 풀었다.
이번에 떨어지는 정수도 네가 삼키란 의미다.
“또요……?”
보유한 정수량과 비례해서 두려움이 커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한령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전방의 4인조를 바라봤다.
안타깝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저들은 그저 사약이 담긴 그릇으로만 느껴졌다.
두두두두……!
마침내 저쪽도 마차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봤다.
그러곤 마차 방향으로 냅다 정수 창을 쏘아 보냈다.
쐐애애액!
견제 사격이 아니다.
마차를 끄는 세 필의 말 중에 정확히 가운데 녀석을 노리고 쏜 저격이었다.
“……!”
뒤늦게 이를 느낀 아므라가 보호막을 전개하려 했으나, 한 발 앞서 펼쳐진 정우의 보호막이 정수 창을 막아냈다.
파츳!
마차를 감싼 보호막 표면에서 마찰음이 난다.
‘위력은 낮지만 실력 자체는 상당하군.’
묘하게 꿈틀거리는 정우의 눈썹.
그는 보호막을 도로 거둔 뒤 아므라에게 물었다.
“광위안까진 아직 거리가 많이 남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아직 몇 시간 더 달려야 할 겁니다.”
이에 정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쪽과 삼검불의 대화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한 순위권 구원자들이라고 보기엔 장소와 때가 다소 일렀다.
게다가 여긴 얼마 전에 수도자들이 휩쓸고 간 지역.
저들이 이곳에 계속 머물고 있었을 린 없고, 필시 다른 지역에서 북부로 선회한 자들일 거다.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정우는 결론이 나자마자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물론 정수 6억 개를 보관 중인 송한령을 낚아채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홱!
“어?”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에서 튕겨 오른 송한령은 약 1초 뒤 땅에 닿고 나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다.
박정우란 미친 사내가 또 자길 끌고서 전장으로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마차 안에 있던 그녀는 이제 후텁지근한 공기가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아까처럼 그냥 눈을 가려두고 마차에 놔두면 되잖아요?”
한령이 자신의 멱을 쥔 정우를 쏘아보며 묻자, 일순 그녀의 시야가 빠르게 회전했다.
홰액!
정우가 그녀를 잡은 채 또 한 차례 도약한 거다.
쉬이이이잇!
거센 파공음이 송한령의 귓가를 스쳤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문제의 4인조와 누런 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송한령 만큼이나 경황없는 얼굴로 말이다.
특히 4인조 중에 하나는 두 번째 저격을 시도하려던 참이었는지 오른팔을 위협적으로 들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모습에 놀란 듯, 몸을 바르르 떨더니 팔을 천천히 내려놨다.
‘뭐야……?’
송한령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정우를 비롯한 장내 나머지는 이미 모든 걸 이해한 상태였다.
팍!
창을 던지려던 사내가 갑자기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곤 양팔로 바닥을 짚으며 사실상 무장해제를 했다.
“대…… 대협! 사과드립니다!”
이어서 흘러나온 다소 우스꽝스러운 말투.
아무리 무협의 본산지가 중국이라지만, 현대인이 ‘대협’이란 단어를 실제로 사용하는가?
정우가 듣는 저 대사는 결국 정수의 번역을 통한 것이다.
즉, 의미 자체는 정확히 전달될지언정 상대가 정말 저런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거다.
“너희는 뭐지? 삼검불을 잡으러 가는 놈들인가? 그런데 그런 것치곤…….”
정우의 말에 이번엔 사내를 비롯한 4인조가 일제히 의아하단 표정을 언뜻 비쳤다.
“아닙니다. 오해하고 계십니다.”
사내가 정우에게 극존대를 한다.
단순히 자신의 명줄을 쥔 상대에게 아부를 떠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어떤, 경외와 존경심마저 엿보이는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정우는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처음 대면한 순간, 저 녀석들의 시선이 이쪽의 머리맡으로 향하는 걸 본 탓이다.
4인조, 아니 저 골든 리트리버까지 포함한 다섯 개체 모두 구원자였다.
문제는.
“삼검불 때문에 북상 중이 아니라면 어딜 가는 거지?”
정우는 이렇게 물었다가 다시 질문을 바꿨다.
“몇 번 채널인가?”
그러자 사내가 감격에 찬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덕분에 정우는 슬슬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2번입니다.”
“2번?”
2번이면 최초의 채널에서 오간 대화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이들은 청두를 향해 남하 중인 삼검불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자들인 거다.
“그럼 너희가 여길 올 이유가 있나?”
“저희는…….”
사내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마음을 정한 듯 대사를 마저 읊었다.
“사학자로 인해 2번 채널에 7일 차 침입자에 대한 정보가 풀렸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연합 중입니다. 곧 다른 구원자들도 올라올 겁니다.”
“올라온다니? 어디로?”
“……광위안입니다.”
슥.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정우의 시선이 바로 허공으로 향한다.
|사내가 진실을 말합니다.
|사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간파는 상대가 진실을 말했다고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7일 차 침입자부터 해치우자고 뜻을 모았다는 이야기인가?”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합의를 했습니다. 물론 다른 의도를 가진 자들도 있겠죠.”
이 기회를 틈탄 배신을 의미하는 걸 거다.
그래서인지 사내는 정우를 향해 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함부로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으나, 사실 1번 채널도 사정이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도와주십시오.”
“…….”
이에 정우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여러 의미에서 기가 찼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큰 도움을 주긴 할 것이다.
이들의 정수를 양분 삼아 7일 차 침입자들을 쳐내고 ‘종’과의 결투에서 승리할 테니까.
슥.
정우는 슬슬 이 자리를 파하려고 정수를 끌어 모았다.
단번에 다섯의 몸을 가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광위안으로 이동해 나머지 구원자들을 흡수.
그러나.
팟……!
짤막한 위화감과 함께 그의 시야에 한 줄의 문구가, 아주 오랜만에 나타났다.
[권고]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을 도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