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68
272화. 망각(5)
‘이 녀석들을 도우라고?’
정우가 지금 보고 있는 문구는 분명 지구의 가이드라인이었다.
그리고 이 가이드라인의 유효 시간은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고 말이다.
즉, 사실상 이번이 지구의 마지막 지침인 셈.
그런데도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이게 다른 선택지보다 더 큰 이득을 가져올 거라는 건가?’
정우는 의식 속에서 지구에게 물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답변이 돌아오진 않았다.
“…….”
그래서 정우는 눈앞의 다섯 존재를 다시 훑어봤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그리고 개 한 마리.
우스꽝스러운 조합이지만 이들은 중국이란 이 거대한 나라에서 상위 100개체 안에 든 고수들이다.
2번 채널엔 구원자 50위부터 100위까지가 머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우가 보기엔 그저 길가의 돌멩이와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었지만 지구의 입장에선 소중한 전력 중 하나일 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우의 눈에 들어온 다섯 구원자의 평균 정수량은 6천만 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수가 서너 배로 늘어난다 해도 전력에 큰 보탬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살리라는 걸까.
“좋다. 광위안으로 가지.”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정우는 상대의 요청을 깔끔하게 승낙했다.
지구 폐쇄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구보다도 지구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놈이 이 방법을 권했다면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한 거다.
“저, 정말이십니까?”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내가 고개를 슬쩍 들더니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정우는 저 멀리서 천천히 접근 중인 마차를 가리켰다.
“마침 나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 * *
오전 7시 47분.
마차는 계속해서 광위안을 향해 북상했다.
다섯 승객을 추가로 태운 채로 말이다.
“…….”
덕분에 마차의 분위기는 더없이 어색했다.
꼭 박정우 때문만이 아니다.
승객의 상태를 보라.
정수 6억 개를 품고서 포로 신분이 된 송한령.
박정우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아므라.
정우의 승용물이자 절대적 아군인 ‘냄새’.
의사 2인방과 전직 마약 브로커 위양거, 마차 관리자 전태천.
여기에 2번 채널에서 온 4인방과 개 한 마리가 추가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정적 속에서도 왜인지 시끌벅적한 느낌이 들었고, 특히 상대의 정수량을 볼 수 있는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은 이 말도 안 되는 구성에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이 와중에.
크릉.
* 좁아.
냄새가 급격히 좁아진 공간에 불만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이에 골든 리트리버가 본능적으로 꼬리를 말아 넣었고, 구원자 4인방도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뒤쪽으로 밀착시켰다.
개나 말을 대동한 각성자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무려 호랑이를 끌고 다니는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마차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정수는 무려 67억 개.
이 때문에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은 틈만 나면 정우의 모습을 훔쳐봤다.
박정우란 사내가 1번 채널에 들어 있을 것은 분명한데, 그 안에서 몇 위나 하고 있을지가 도저히 가늠되지 않아서였다.
‘설마 1위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나라 최강자와 마주 보고 있다는 이야긴데.’
‘못해도 10위 안엔 들 것 같다.’
‘최소 3위 안쪽……. 저 사람보다 더 강하려면 정수를 67억 개 이상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산술적으로 몇 명 존재할 수가 없지.’
구원자들이 각자 속으로 속닥거리는 사이, 마침내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협께서는 어째서 광위안으로 가십니까? 역시 1번 채널에서도 회합이……?”
대협이라는 호칭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첫 만남 때 냅다 절을 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여기에서 회합 비슷한 걸 한 건 두 사람뿐이야. 그마저도 내일이면 다시 맞붙어야 할 테고.”
정우가 제법 너그럽게 대답해 준다.
그리고 그가 말한 ‘두 사람’은 정우 자신과 현재 2위인 종을 의미했다.
“조만간 광위안에 15위 안쪽의 구원자들이 모일 거다. 그래서 놈들을 잡으러 가는 길이지. 아무리 봐도 너희처럼 협력을 할 것 같진 않거든.”
“15위면…….”
대답을 들은 사내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계산했다.
1번 채널의 15위가 어느 수준의 괴물일지 가늠해 보는 듯.
그러더니 몸을 짧게 떨면서 정우를 다시 쳐다봤다.
“그렇다면 대협께서도……?”
너도 15위 안쪽이냐는 물음.
정확히는 네 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단 이야기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마차 안쪽에서 짤막한 기계음이 나는 바람에 대화가 끊어졌다.
삑. 삐, 삐, 삐, 삐.
마차 관리자 전태천의 손목시계에서 울리고 있는 소리였다.
오전 8시 정각을 알리는 알람 말이다.
“……!”
그렇지 않아도 다들 8시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리고 실제로.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곱 번째 날이 찾아왔습니다.」
지구가 7일 차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미, 미친.”
마차 벽면에 등을 바짝 붙이고 있던 2번 채널의 구원자 중 하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혼잣말을 한다.
구원자들이 임시로나마 연합을 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고비인 7일 차.
그 문제의 날이 진짜 오고야 만 것이다.
물론 정우는 지구의 인사 문구를 보고 있으면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학자를 통해 7일 차 광경을 직접 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강했으니까.
박정우는 강자, 그것도 현시점 최강자다.
반면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은 십여 명이 모여야 6일 차 침입자인 수도자 하나를 겨우 쓰러뜨릴 정도.
그러니 7일 차의 모든 게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들의 반응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먼저, 제가 통보받은 사안에 대해서 전달 드리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지구가 말을 계속 잇는다.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이 한 단계 낮아졌습니다.
|지구의 정수 총량이 9% 감소했습니다.
|행성 폐쇄까지 35일 남았습니다.
9%.
역대 최대치 경신이다.
어제 진입한 수도자에게 어마어마한 수의 각성자가 쓸려 나간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34%를 잃은 건가?’
고작 7일 동안 지구의 정수 총량 34%를 영구히 잃었다.
정우와 ‘종’의 합동 작전으로 일정량을 복구할 수 있긴 하겠으나, 내일 또 일정분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므로 기껏해야 하루 정도를 번 셈일 거다.
“…….”
침착함을 유지하던 정우의 표정이 서서히 굳는다.
오랜만에 쫓기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곧 선두 특혜가 발동됩니다. 인간, 박정우 님께서는 현재 소속 지역 내 1위 구원자이므로 특혜 내용을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평가관이 정우의 투표권에 대해 알려 왔고, 이를 들은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직 1위라고?’
가이드라인의 권고 때문에 여전히 정수를 쌓아 놓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8시가 되기 전에 ‘종’이 순위를 뒤집을 줄 알았으나…….
‘놈도 일부러 정수를 모아 놓고 있는 거였군.’
역시 한때 1위였던 자라고 해야 할까. 정우는 내심 감탄했다.
여신 거래의 해소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정수를 미리 모아 두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2위 입장에서 실천한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여신 거래 해소라는 것도 결국 박정우를 꺾어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2위인 종으로선 상대의 정수량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순위를 역전시키지 않고 정수부터 모으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대담한 선택이었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지구의 공지와 함께 정우의 의식이 잠겼다.
스릇.
이와 동시에 그의 신체가 보호 상태로 전환되며 사각형의 푸른 막에 감싸였다.
우주가 유권자를 보호하는 특유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를 본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입을 쩍 벌린 건 당연한 일.
“서, 설마 이건…….”
“세상에.”
지금 정우를 감싼 푸른빛의 막은 누가 봐도 정우 본인이 전개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무슨 의미겠는가.
“이 사람이 1위인 거잖아……?”
구원자 중 하나가 결론을 내렸고, 아므라를 포함한 정우의 일행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편 정우는 보호막의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의식 속의 문구를 읽고 있었다.
|특혜 선택을 위해서, 박정우 님에 대한 보호 조치가 개시됐습니다.
|특혜 선택에는 1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에 특혜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 특혜가 발동됩니다.
간만에 보는 듯한 문구.
그러나 벌써 다섯 번째 투표 참여였다.
‘파견’ 상태가 적용됐던 하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지역 최강자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공통 특혜부터 선택합니다.
|본 특혜는 행성 전체에 적용되며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1] 폐쇄 절차 기한 1일 감소. [2] 진입로 생성 속도 30% 증가. [3] 진입로 최대 개수 10% 증가. [4]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 1단계 하락.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1명 희생.7일 차 선두 특혜의 선택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7일 차 침입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진입로와 관련한 특혜는 가급적 피해야만 했다.
‘2번과 3번은 피해야 해. 4번도 마찬가지.’
정우는 4번 특혜를 보며 사학자를 통해 목격했던 8일 차 침입자를 떠올렸다.
놈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항상성이 빠르게 바닥나지 않았던가.
만약 이번 투표로 인해 4번 항목이 선택된다면 7일과 8일 차 침입자를 연달아 만나게 될 거다.
‘그렇다면 1번과 5번뿐인데.’
둘 다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1번 특혜인 폐쇄 절차 기한 1일 감소는 단순히 기한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
저 기한만큼의 모든 페널티가 한꺼번에 날아든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행성 폐쇄가 1/42만큼 앞당겨지는 셈이니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죽는 선택지인 셈.
‘하지만 진입로 생성 속도와 최대 개수가 더 늘어나. 2번과 3번보다야 낫겠지만 어쨌든 생존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 피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인 5번은 어떨까?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한 명 희생.
이 말인즉슨 각 지역의 최상위권 구원자 중 하나를 죽인다는 뜻이 된다.
유력한 행성 구원자를 잃는 셈이고, 그것 이전에 더 큰 문제는.
‘무작위 희생으로 사망하면 녀석이 가지고 있던 정수는 어떻게 되지?’
지구에서 5번 특혜를 선택했던 건 2일 차 투표가 유일했고, 당시엔 최상위권자들의 정수량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 희생자가 자신이 아니기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다르다.
각 지역의 최상위권자라면 못해도 십억 단위의 정수를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만에 하나 희생자의 정수가 그대로 영구 손실이 돼 버린다면 5번은 절대 선택해선 안 되는 거다.
물론 제자리에 떨어져도 문제. 근처를 지나던 침입자가 집어 갈 수도 있는 것이고, 운이 좋게 행성 주민이 흡수한다 해도 놈이 그 정수를 전임자처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즉, 5번을 선택하면 정수만 잃는 게 아니고 지난 7일에 걸쳐 검증된 인재를 잃는 셈인 것이다.
‘최상위권 구원자들은 대체가 어려워. 이런 식으로 소모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정우는 고민 끝에 1번을 선택했다.
틱.
그러자 특유의 바코드 소리가 났고, 의식이 까맣게 잠겼다.
다른 구원자들의 투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구간이었다.
그러더니.
팟.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서 새 문구가 나타났다.
|개별 특혜를 선택합니다.
|본 특혜는 선택자에게만 적용됩니다.
제대로 된 특혜를 선택할 때가 온 거다.
1. 확답
-현재 직접 폐쇄할 수 있는 진입로의 위치를 모두 표시합니다.
2. 강림
-지정한 대상과 함께 소속 지역 내 원하는 지점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3. 전시안
-원하는 조건에 맞는 존재를 총 2회 찾아냅니다.
4. 잠행
-침입자들에게 먼저 공격받지 않습니다.
5. 성역
-지정한 구역 내에서 외부인의 정수 사용을 금지합니다. 진입로를 직접 폐쇄한 구역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1번과 4번은 제외.’
그럼 남는 건 강림, 전시안, 성역이다.
‘…….’
구원자로서, 그리고 이 지역의 최강자로서 성역을 선택해야 할 의무 아닌 의무가 있긴 했지만 정우는 성역을 가장 먼저 제외했다.
7일 차 침입자를 막아 내지 못하면 어차피 성역도 큰 의미가 없을뿐더러, 종과의 대결에서 패배할 경우도 고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역은 불가침의 영역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주인이 소멸할 경우 성역도 함께 사라진다.
‘전시안도 당장은 크게 쓸모가 없어. 기껏해야 3위와 4위를 찾아내는 데 사용할 테니까.’
결국 정우는 2번, 강림을 선택했다.
유사시에 대륙 반대편으로 날아가 7일 차 침입자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개별 특혜로 강림을 선택하겠다.’
그러자 눈앞의 문구가 허공에 녹아들더니 한동안 대기 상태가 지속됐다.
그러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의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면서 잠겨 있던 시야가 풀리기 시작했다.
지구가 행성 내 모든 생물에게 송출한 문구와 함께 말이다.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 선택을 마쳤습니다.」
…….
「투표 결과에 따라, 금일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한 명을 살해합니다.」
…….
「살해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