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69
273화. 태풍의 눈(1)
“……!”
정우는 살해 개시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이건 마차 안의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금일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한 명을 살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잘 알았으니까.
“저, 정우 씨.”
아므라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정우의 이름을 불렀고, 몇몇은 이 와중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차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 박정우가 소멸할 경우 입지가 모호해지는 인물들.
‘저장고’ 송한령과 2번 채널 소속의 구원자들이 여기에 속했다.
‘만약 일이 터지면 우린 저쪽으로 붙어야 하나?’
상대의 정수량을 읽을 수 있는 구원자들이 주목 중인 건 단연 송한령이었다.
박정우를 제외하면 마차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정작 송한령은 상대의 정수를 읽을 수 없었기에 ‘쿠데타’를 일으키려면 누구부터 꺾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우의 심복으로 보이는 몽골족? 아니면 호랑이부터 노리는 게 옳을까?
“…….”
저마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시뮬레이션을 해 보는 사이,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앞쪽으로 나아갔다.
-타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소멸됐습니다.
평가관으로부터 결과 보고가 들어온 탓이었다.
희생 확률이 정확히 얼마나 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그럼 누가 죽은 거지? 현시점 정수 손실량이라도 알 순 없나?’
정우가 이렇게 물었지만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두두두두…….
마차는 계속 나아가는 중이었고, 한동안 정우의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날을 세우고 있던 쿠데타 후보들이 하나둘씩 기척을 죽였다.
“다 끝난 겁니까?”
일찍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던 아므라가 일부러 정우에게 묻는다.
현 상황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다.
이에 정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발치를 내려다봤다.
패스파인더의 진입로 표식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게 보인다.
아마도 지금쯤 문제의 7일 차 침입자가 진입로를 몸속에 품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다.
‘이제 시작이군.’
지구의 존폐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중대한 날.
그럼에도 당장 마차 주변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동쪽으로 더 틀어. 근처에 진입로가 하나 있다.”
한동안 패스파인더를 살펴보던 정우가 북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 눈치를 봤다.
“지, 진입로……?”
“사람이 좀 더 모인 뒤에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앞에 67억 개짜리 구원자를 두고도 헛소리를 한다.
이건 이들이 정우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겁이 나서였다.
이 나라 최강자인 박정우야 진입로 앞에서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자신들은 아니었으니까.
“네놈들이 약속한 집결지는 광위안이라고 하지 않았나? 거기에 닿은 뒤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면 늦어.”
정우는 이렇게 말한 뒤 자신을 ‘대협’이라고 부르던 사내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2번 채널에 현재 위치를 공개해라. 사람이 제법 모였으니 진입로를 지우며 올라가겠다고 해.”
“예……?”
예상치 못한 주문에 사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우와 시선을 맞댔다.
그러다 이내 허공의 구원자 채널을 향해 눈을 돌렸다.
대륙 최강자의 주문이지 않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구원자들을 더 끌어들이실 생각입니까?”
이건 2번 채널 소속의 또 다른 구원자.
흙먼지에 시달려 뿌옇게 변한 안경을 쓴 남자였는데, 말투에서 상당한 불신이 묻어나왔다.
박정우가 결국엔 자신들을 다 집어삼킬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너희가 정말 재앙을 막기 위해 협력 중이었다면 날 만난 걸 큰 행운으로 여겨야 하는 거 아닌가? 어마어마한 화력을 얻은 셈이잖아. 그 대가로 목숨을 지불하게 될지언정 그만한 가치는 하겠지.”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사이 정우가 뒷말을 이었다.
“어차피 광위안에 닿는 자들은 다 죽게 될 거다. 내 쪽에 붙어 있는 게 그나마 수명을 연장하는 길이야.”
“……어째서입니까?”
이에 정우는 대답 대신 전방을 바라봤다.
“진입로가 저기 있군.”
슥.
정우가 손가락을 들어 마차 밖을 가리키자 일동의 고개가 그리로 홱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엄밀히 말해 진입로가 아니었다.
사아아아…….
체고가 무려 수백 미터에 달하면서도 기척을 전혀 내지 않으며 움직이고 있는 7일 차 침입자였다.
“헉.”
“저게 진입로라고요?”
“뭐지……?”
구원자들의 반응을 보니 적어도 이 자리엔 사학자를 가진 자가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정우 역시 이번 침입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다467의 행성 기록을 통해 본 괴물의 모습과는 또 달랐으니까.
새까만 공간 그 자체로 이루어진 이 괴물은 사족보행 중이었다.
두꺼운 다리와 육중한 몸체가 코끼리를 연상케 했으나 코와 귀는 물론 머리 자체가 붙어 있질 않았기에 사실상 생명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하지만 문제는 놈의 외형이 아니지 않은가.
스으으…….
놈이 거대한 다리를 교차해 가며 움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면적의 공간이 지워졌다.
그리고 그 공간을 다른 차원이 대체했다.
8일 차 침입자가 머물고 있는 그 시커먼 영역으로 말이다.
“……!”
정우의 동공이 커진다.
행성 다467도 이 일을 겪은 뒤 하루 만에 멸망했다.
지구 역시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는가?
정우는 뒤를 돌아보며 2번 채널의 구원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행성 기록을 직접 보고 온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무슨 근거로 저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그러자 한 구원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탑에서 사학자를 구매해 온 자에 따르면 저 침입자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라고 합니다.”
“두 가지?”
“예, 첫 번째는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어서 침입자와 진입로를 한꺼번에 지우는 것이고…….”
그러더니 녀석이 나머지 일행을 훑어봤다.
“두 번째는 쉬지 않고 상처를 내서 놈의 회복 속도를 추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공격자의 머릿수가 많아야 하죠. 사방에서 공격을 해야 할 테니까.”
다시 말해서 작은 화력을 끊임없이 퍼부어서 진입로를 감싼 몸체를 천천히 깎아 낸다는 뜻인 거다.
‘그런 방식으로 침입자를 잡아낸 행성이 있었나 보군.’
정우는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아주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니었으니까. 이론적으론 가능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저게 사실이라면 침입자를 잡아낼 그룹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야.’
7일 차 침입자의 수를 빨리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한 지금, 2번 채널 구원자들을 흡수해 봐야 실질적인 이득은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침입자를 처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살려 둘 가치가 있지. 적어도 8일 차 아침 전까지는.’
정우가 여기까지 생각하는 동안에도 침입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미 마을 두어 개 규모의 공간이 사라졌고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 주장을 검증해라.”
결론을 내린 정우가 곧바로 입을 열어 지시하자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저마다 입을 쩍 벌렸다.
“예? 아무리 그래도 지, 지금은…….”
골든 리트리버까지 포함해 총원 5. 아직 머릿수가 부족하단 이야기였다.
그러자 정우가 대번에 손가락으로 마차의 몇 곳을 천천히 가리켰다.
“화력을 지원해 줄 테니 합공해. 만약 너희가 저 녀석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하면 당장 놔주겠다.”
“……!”
정우의 파격적인 제안에 구원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고, 정우 일행 중 일부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화력 지원’이란 발음과 함께 손가락으로 가리킨 대상이 다름 아닌 아므라와 냄새, 그리고 송한령이었기 때문이다.
“저더러 저 괴물하고 싸우라고요?”
송한령이 어림없다는 목소리를 내자 정우가 순식간에 그녀에게 다가가 목을 움켜쥐었다.
“케, 켁!”
“그럼 이 자리에서 뒈져. 네 정수는 잠시 마차에 보관하도록 하지.”
* * *
비슷한 시각, 시안과 광위안 사이에 위치한 도시 한중(&x27721;中)의 외곽지.
논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 이곳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두두두두……!
다름 아닌 민구와 아홉 마리의 말이 내는 소리였다.
‘너무 일러. 이대로는…….’
민구는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냈다.
시안 시에서 이 말 떼와 조우한 지도 벌써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당시 민구는 빛을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는 게 말 떼인 걸 확인하고서 곧바로 싸울 준비 중이었다.
일단 개체 수가 많았고, 등에 아무도 태우지 않고 있었기에 인간에게 적대적일 거라고 판단한 거다.
그런데 막상 마주친 녀석들은 민구를 공격하기는커녕 그를 보자마자 머리를 돌려 우회하려고 했다.
머릿수가 훨씬 많음에도 굳이 피해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민구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저 속에 정수를 읽을 줄 아는 녀석이 있는 것이다.
구원자.
정확히는 이 시점까지 구원자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짐승…….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민구는 왜인지 냄새를 떠올렸다.
8억 4천만 개나 되는 정수를 가지고 있던 그가 평균 정수량 3천만 개에 불과한 말 떼를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던 것도 냄새 때문이었다.
녀석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그의 손속에 정이 실리도록 만든 거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고, 곧 민구의 입에서 정수 실린 음성이 쏘아져 나갔다.
「기다려! 멈추지 않으면 다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 거의 같은 순간에 말 한 마리가 달음질을 그만뒀고, 이를 본 나머지도 연이어 제자리에 섰다.
가장 먼저 멈춘 녀석이 구원자였던 것이다. 민구를 지나쳐 가며 그의 머리맡에 적힌 숫자를 읽었던.
그리고 그 녀석이 지금은 민구를 직접 태운 채 달리고 있었다.
시안 시와 한중 시를 거쳐 이제는 광위안을 향해서 말이다.
두두두두……!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발굽 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다.
민구는 이 녀석들에게 속도를 늦춰 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달리도록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공교롭게도 이 말들의 목적지 역시 광위안이었기 때문이다.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구원자인 ‘모래’가 2번 채널 소속인 덕분이었다.
정말로 여러 구원자가 한데 모일 조짐이 보이자 이 녀석도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힘을 보태러 가는 길이었던 거다.
문제는 광위안으로 오고 있는 게 2번 채널의 구원자뿐만이 아니라는 거.
정우는 물론 1번 채널의 순위권자들도 오고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광위안에 너무 일찍 도착하면 놈들에게 도륙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봐.”
민구가 모래의 목을 툭 건드리자 녀석이 귀를 쫑긋 세웠다.
* 왜.
“너무 빠르지 않나? 이대로라면 2시간 안에 도착할 거 같은데.”
* 빠르면. 좋다. 북쪽. 위험해.
“……그야 그런데.”
민구는 이 녀석들에게 광위안의 복잡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냄새와 대화하던 걸 생각해 보면 최대한 직관적으로 이야기해야 의미가 전달될까 말까 할 것이다.
‘제길.’
이 와중에도 모래와 그의 무리는 고속으로 질주 중이었고,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민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자식이 뒤따라오고 있어. 천천히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