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70
274화. 태풍의 눈(2)
파아아앗!
허공을 가르는 푸른 빛줄기들을 보면서, 정우는 생각했다.
‘……왜지?’
어째서 효과가 있는가.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주장하던 방법 말이다.
작은 화력을 끊임없이 퍼부어서 진입로를 감싼 몸체를 천천히 깎아낸다…….
이 말도 안 되는 가설이 지금 정우의 눈앞에서 검증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침입자의 몸집이 눈에 띄게 작아진 것이다.
물론 여전히 하늘을 다 가릴 정도의 몸집이긴 했으나 분명 효과가 있었다.
“조, 조심해! 놈이 방향을 튼다!”
“옆쪽으로 빠져나와!”
2번 채널 소속의 구원자들이 서로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침입자가 갑작스레 선회를 시작한 탓이었다.
쿠구구구구…….
신장이 수백 미터에 이르는 사족보행 괴물체.
놈은 자신의 몸체를 조금씩 깎아내는 방해꾼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문 자리를 ‘검은 공간’으로 대체해버리는 이 괴물의 특성상,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큰 위협이 됐다.
“헉!”
“도망쳐!”
놈의 앞발 근처에서 공격을 하던 두 구원자가 기겁을 하며 각자 뒤편으로 몸을 날린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침입자의 거대한 다리가 그들이 있던 허공을 갈랐다.
스으읏.
그러자 그 다리의 궤적을 따라 까만 공간이 나타나면서 지구의 일부분을 대체했다.
그저 어둠만이 담겨 있어서, 원근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공간.
“……!”
모두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지구가 풍경화라면, 저 거대한 침입자는 시커먼 먹을 머금은 붓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저 붓이 움직일 때마다 풍경화의 일부가 영구히 훼손되는 것이다.
쿠웅!
방향을 틀기 위해 무게 중심을 비튼 침입자의 앞발에서 커다란 발소리가 났고, 이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구원자들이 정신을 차렸다.
“죽여어어! 쉬지 마라!”
누군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시퍼런 빛을 뿜어냈다.
이 전투가 길어질수록 지구라는 행성의 존재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탓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말이다.
“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요, 정우 씨가 도와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차 안쪽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 정우는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
그러자 제법 거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위양거. 42세, 남성, 한족. 박정우의 약물 관리자.
그는 정우와 전장을 쉼 없이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시선이 전장 쪽에 닿을 때마다 동공의 일부가 파랗게 번쩍였다.
침입자를 향한 정수 파동의 푸른빛이 반사되고 있는 것이다.
팟, 팟…….
빛의 반사. 이곳이 여전히 지구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다는 증거.
정우는 번쩍거리는 위양거의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다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으음.”
7일 차 침입자가 움직임을 시작한지 갓 1분이 지났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 동안 침입자가 지워버린 지구의 면적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에 각성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위양거조차 조바심을 느낀 것이다.
더는 1분이란 시간을 짧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1분이면 도시 하나가 지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파아아앗!
촤아앗!
방향을 비튼 침입자를 쫓으며 공격 중인 존재의 수는 총 여덟.
화력의 총합은 정수 10억 개가 좀 넘는 수준이었으나, 분명히 지금 이 순간에도 침입자의 몸집이 계속 작아지고 있었다.
저러다 더는 진입로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넝마가 되면, 그땐 즉사시킬 수 있을 거다.
‘지금 기세로 보면 5분쯤 걸리겠군.’
머릿수 여덟, 정수 총합 10억 개로 5분 내에 침입자 격퇴.
정우의 생각엔 저 정도가 최소 요구치였다.
저것보다 화력이나 머릿수가 더 모자라면 침입자의 회복속도를 추월하기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저만한 그룹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일단 광위안으로 2번 채널의 다른 구원자들이 집결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땅 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인 탓에 다들 대륙 사방에 흩어져 있을 테니까.
‘광위안으로 다섯 명 정도가 오고 있다 해도 팀을 하나 더 만들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물론 광위안으로 향하고 있는 건 2번 채널의 구원자뿐만이 아니다. 삼검불을 노리고 오는 1번 채널의 순위권자들도 있다.
하지만 놈들이 2번 채널 녀석들처럼 자발적으로 연합을 꾸려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내 앞에서야 어떻게든 말을 듣는 척 하겠지만…….’
각지의 침입자들을 잡기 위해 길을 떠난 이후론 와해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연합할 수 있던 이유는 스스로 ‘2군’임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6일 차 침입자조차 혼자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도태된 실패작.
이를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던 와중에 무려 7일 차 침입자를 쓰러뜨리는 데에 일조할 방법이 있다는 이야길 듣게 됐고, 앞뒤 잴 것 없이 연합에 응한 거다.
그러나 광위안으로 향하고 있을 1번 채널의 구원자들은 다르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유력한 행성 구원자의 자질이 있다고 여기는 중이고, 실제로도 입지를 반등시키기 위해 광위안으로 가고 있다. 16위 구원자 삼검불을 죽이고 정수를 불리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않는 게.’
쿠웅, 쿵!
정우는 그새 마차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 7일 차 침입자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의식 속에서 평가관 다467이 기척을 냈다.
-‘침식자’입니다. 행성의 공간을 먹어치우고 그 자리에 다른 세계의 일부를 불러옵니다.
거리가 이렇게 가까워진 뒤에야 정우가 침입자와 조우했다고 판단하고서 설명을 시작한 것이다.
‘침식자? 저게 분명 7일 차의 침입자일 텐데 어째서 저런 방식으로 격퇴가 가능한 거지?’
정우가 말한 ‘저런 방식’이란 수준 이하의 화력 다수가 모여서 공격을 하는, 지금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수행 중인 작전을 뜻했다.
물론 저런 방식이 유효하다는 사실 자체는 다행이었다.
덕분에 침식자들을 보다 빠르게 몰아낼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약자’도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정우가 견지해온 입장과 배치됐기 때문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강해지는 것만이 지구를 구원하는 방법이다, 라는 입장 말이다.
행성 폐쇄가 시작된 이래, 매일 새로 등장하는 침입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건 바로 마주치는 모든 약자를 흡수해 대량의 정수를 확보하는 것.
실제로 매일 강화되는 진입로를 닫고 침입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정수량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약육강식이란 법칙에 정당성이 부여됐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끔찍한 변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때로는 ‘약자’가 부족해서 행성 구원에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정우에게 어마어마한 혼란을 안겨다줬다.
‘우주에게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보통 변덕이 아니라고 전해주고 싶군.’
쿵, 쿵…….
그사이 아까보다 훨씬 더 작아진 침식자는 벌써 정우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공간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잠시 뒤.
콰아앙……!
규모가 상당한 굉음이 현장 쪽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움직여.”
정우의 지시에 세 필의 말이 마차를 끌고서 현장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에 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야트막한 언덕 정도의 크기. 다름 아닌 땅바닥에 엎어진 침식자였다.
마침내 2번 채널의 구원자들이 놈의 다리까지 소멸시킨 거다.
파아아앗!
현장에선 여전히 시퍼런 정수 파동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가는 중이었고, 침식자의 몸집 역시 빠르게 작아졌다.
그러다가.
“……!”
점점 가까워지는 침식자의 모습을 살피던 정우가 눈을 크게 떴다.
놈의 몸 안쪽에 진입로가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의 ‘레이더’에 탐지된 것이었고, 조만간 구원자들의 공격이 진입로에 닿을 상황이었다.
「동작 그만!」
정우는 음성에 정수를 실어 내보낸 뒤,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곧장 침식자가 품은 진입로를 향해 정수 창을 쏘아 보냈다.
쐐애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시퍼런 빛줄기가 허공을 갈랐고, 이내 침식자의 검은 몸뚱어리를 꿰뚫으며 진입로를 가격했다.
콰직!
진입로가 파열할 때 나는 특유의 소리.
이때까지만 해도 침식자를 포위한 구원자들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침식자의 몸 중앙부가 일렁이더니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박정우가 침식자의 몸 속에 숨겨진 진입로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엇?”
“왜 갑자기…….”
그러면서도 저마다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자신들에게 기회를 준 줄 알았는데 어째서 끝을 보기 전에 난입했냐는 거다.
이에 정우는 마차에서 내린 뒤 일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요동치고 있는 진입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마무리를 자처한 것은 어디까지나 방주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있는 자들 역시 구원자인건 마찬가지지만, 높은 확률로 하루살이 아닌가?
침식자를 이 정도까지 밀어붙였으면 그 ‘가설’은 검증된 거나 마찬가지. 따라서 진입로 파괴까지 양보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 내린 거다.
콰드드듯!
이윽고 진입로가 심하게 팽창하더니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파아앗…….
고농축의 에너지가 사라지면서 그 여파로 일대의 공기가 날카롭게 변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야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던 침식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진입로도 마찬가지.
그러나 놈의 동선을 따라 시커멓게 남은 이계의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행성 기록을 통해 본 것과 똑같은 현상.
‘5분당 도시 하나 꼴인 셈이군.’
정우의 미간이 구겨진다.
자신과 종, 그리고 2번 채널의 연합체가 최선을 다해 침식자들을 잡아낸다 해도 상당량의 행성 손실을 피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내가 너희들을 놔준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동할 셈이지? 마차 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않잖나.”
정우가 드디어 운을 떼자,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구원자들이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대협! 광위안이나 그 근처 도시에서 연료와 차량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아쉬운 대로 도로를 따라 이동해야지요.”
정우를 보자마자 대협이란 칭호를 썼던 사내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조아린다.
나머지 구원자도 사내와 같은 생각이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결정권자인 정우의 승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만약 박정우가 이들을 활용하기로 결정한다면 각자 수천만 개의 정수를 지닌 존재가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와 맞닥뜨리고도 전부 살아서 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들을 기용하지. 광위안까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 뒤, 그곳에서 인원을 재정비한다.”
그러자 2번 채널의 구원자 중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슥.
“여, 여쭐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이 일이 모두 끝나면 저희는 어떻게 됩니까?”
사실상 ‘죽일 것이냐?’라는 물음이었다.
이에 정우는 잠시 고민한 뒤 답을 내렸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군. 행성 기록이 너희의 앞날을 결정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