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72
276화. 태풍의 눈(4)
“……?”
익숙한 음성.
민구는 자신의 이름이 발음된 지점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차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미친.”
민구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온다.
역시나 냄새를 데리고 이곳까지 달려온 게 다름 아닌 아들, 박정우였던 것이다.
문제는 놈의 머리맡에 적힌 숫자가 무려 67억이나 된다는 거였고, 본래도 정감이란 게 없던 눈빛이 더욱 싸늘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날 보러 온 게 아닌 건 확실하군.’
민구는 정우의 시선이 자신에게 잠시 닿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 와중에 대체 뭘 보고 있는가 싶어 시선을 좇았더니.
갸오옹…….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을 희번덕이고 있는 표범을 발견하게 됐다.
놈은 민구에게서 약 6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발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박정우의 정수량을 봤기 때문일 거다.
“저장고로 쓰기엔 부적합하겠는데.”
땅에 두 발을 디딘 정우가 표범을 보고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산 채로 마차에 태우고 다니기엔 관리가 까다로울 거라는 이야기다.
아무래도 인간에 비해선 덜 이성적이다 보니 이쪽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쿠데타를 감행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2번 채널의 구원자들과 함께 침식자 토벌에 내보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슥.
정우가 시계를 본다.
현재 시각, 오전 11시 25분.
그러곤 시선을 그대로 시계에 둔 채 입을 열었다.
“우선 넌 죽어라.”
문장에 담긴 의미와 달리 너무나도 일상적인 말투.
장내의 존재들이 박정우가 한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의 보호막에서부터 시퍼런 가시가 쏘아져 나갔다.
쫴애애애액!
정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푸른 선이 허공을 가로질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민구를 지나쳐 표범의 허리를 꿰뚫었다.
캬아악……!
13억 개짜리 짐승 구원자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나 마차에 타고 있던 아므라는 이 장면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그사이 마음이 바뀌셨나?’
박정우가 정말 표범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단번에 이마를 꿰뚫어 즉사시켰을 거다.
그런데 허리를 노렸다는 건…….
탓.
아니나 다를까, 정우가 가시를 회수하더니 갑자기 앞으로 걸음 하기 시작했다.
“……!”
이에 표범과 정우의 사이에 서 있던 민구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방금 정우가 보인 그 ‘가시’ 때문이 아니다.
녀석은 남양주의 성역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버지의 옆을 스쳐 가면서도 아무런 동요를 하지 않잖은가.
민구는 아들이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는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간 정우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놈은 대범하게도 표범의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손을 내밀었다.
스윽.
고통과 분노로 벌벌 떨리고 있는 맹수의 뺨에 말이다.
캬릉!
* 비켜!
표범은 어금니를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뺨과 턱을 감싼 정우의 손을 밀치지 못했다.
상대가 너무 강해 반항할 엄두를 못 낸 게 아니라…….
드드득.
박정우가 손아귀에 힘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게 생겼다. 대체 네놈이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지? 채널에선 청두라는 이름밖에 안 나왔잖아.”
“……!”
정우의 물음에 동공이 커진 건 표범이 아니라 박민구였다.
조금 전 자신이 가졌던 의문과 완벽히 똑같았으니까.
이걸 부전자전이라고 해야 하나.
애비를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갔고 박정우라는 정체성 자체도 뭔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이전과 같았던 것이다.
그건 바로 사고방식.
두 사람은 부자(父子)라는 관계로 엮여 있는 탓에 매우 유사한 삶을 살아왔다.
민구는 차 사고로 아내를 잃었고, 그 아들인 정우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왜인지 아내, 또는 어머니가 사실은 자살을 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삶이 고단했기 때문이다. 구성원 중 누가 하나 갑자기 자살했더라도 크게 놀랍지 않았을, 그런 삶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에 더해 몇 가지 특질을 더 얻게 됐다.
보통 이상의 침착함, 냉정함, 일종의 통찰력, 그리고 잔인함.
마지막 특질인 잔인함은 아마도 그날 얻었을 것이다.
채권자들에 의해 민구의 머리가 변기에 처박히던 날 말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민구가 정우와의 연결 고리를 끊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지금 박정우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끔찍한 삶을 살아온 민구와 거의 같은 특질을 지니고 있었다.
“대답해. 아니면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다.”
표범이 입을 열지 않자 정우가 녀석의 뺨을 쥔 손에 정수를 쏟아부었다.
그러자 손을 감싼 보호막에서 아주 작은 가시들이 촘촘히 솟아올랐다.
이것들이 표범의 뺨을 뚫고 들어간 건 당연한 일.
핏, 피핏, 핏…….
순식간에 뺨을 찢기게 된 표범이 전에 없이 애처로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캬아아앙!
마치 뭍으로 끌어 올려진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몸을 뒤튼다.
그러더니 이빨 사이로 침을 흘려 대며 혀를 구부렸다.
* 인간!
“구체적으로 말해.”
* 인간……! 날. 도와……!
표범의 어휘론 이게 최선일 거다.
정우는 놈의 뺨에서 손을 떼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길 돕는 인간이 있다는 건가?’
그사이 표범은 낮게 그르렁대며 잽싸게 뒤로 물러서 있었는데, 그렇다고 현장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눈앞의 존재, 박정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데리고 다니나? 길잡이로?”
정우의 물음에 표범이 자세를 더욱 낮추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가 구멍을 낸 왼쪽 뺨에서 피가 쉬지 않고 흐르는 탓이었다.
* 그래. 인간.
“놈은 지금 어디 있지?”
정우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이미 도시 광위안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표범은 정수를 13억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인 박민구부터 죽이기 위해 신체 강화를 사용해 달려들었다.
정수 파동을 쓰던가 해서 박민구를 태운 말부터 죽이면 일이 쉬웠을 텐데 말이다.
이건 인간에 대한 증오심 내지는 경계심이 상당하단 의미였고, 따라서 이 녀석이 사람을 길잡이로 쓰고 있었다는 건 정우로서도 의외였다.
아마도 동료라기보다는 일회용 도구 정도로 활용 중이었을 거다.
카학…….
피를 너무 흘렸는지 표범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무너뜨렸다.
결국 길잡이의 위치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정우로선 원하던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순위권까지 올라올 정도의 짐승들은 어느 정도 타협을 한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정우의 마음이 바뀐 건 아니었다.
“충분하다.”
그는 짧게 말하고선 그새 이삼 미터 물러선 표범을 향해 걸어갔다.
쉬아앗.
오른손에 시퍼런 칼날을 빚어내면서.
* 안 돼!
이를 본 표범이 입을 좌우로 길게 찢으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사실 이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두려움의 격렬한 표현이었다.
13억 개짜리 맹수가 완전히 겁에 질린 것이다.
쒸잇!
마침내 표범이 뱀 같은 소리를 내더니 정우를 뒤로하고서 달음질했다.
사망 선고가 내려진 이상 녀석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는 정우가 대번에 정수 장벽을 세워 퇴로를 막았다.
그러곤 번개처럼 다가가 표범의 목덜미를 잡고선 그대로 칼날을 찔러 넣었다.
쓰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시퍼런 정수 칼날이 표범의 목에 들어갔다가 도로 빠져나온다.
매우 신속하고 깔끔한 처리였지만 동시에 야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크릅…….
표범은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거품을 무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곧 축 늘어졌다.
다음엔 파란 정수 구체가 허공으로 솟으며 표범이 사망했음을 천명했다.
파팟, 팟, 팟.
정수 보유량이 13억 개나 됐던 만큼 구체의 수도 많았다.
그러나 정우는 구체를 바로 흡수하지 않았고, 이에 민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냐. 정수를 왜 바닥에 남겨 둬?”
“저장고가 필요한데.”
“저장고?”
“…….”
정우는 대답하는 대신 마차 안을 바라봤다.
1호 저장고인 송한령의 정수 보유량은 이미 6억 개나 된다.
만약 그녀가 표범이 남긴 것까지 흡수한다고 가정하면 정수 총량이 무려 19억 개나 되는 셈.
‘너무 큰 변수다.’
정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저 남자가 정말 내 아버지라면 정수를 맡기기엔 최적의 대상이겠지.’
아버지인 박민구란 존재에 대한 기억을 잃었을 뿐 ‘아버지’라는 관념마저 망각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숱한 가족을 도륙해 온 정우이기에 역설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남달랐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란 존재들은 하나같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었으니까.
처와 자식의 목숨을 구걸하려고 본인의 얼굴을 박살 냈던 ‘폭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대체 왜 내 기억이…….’
항상 그랬듯 정우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다가 답을 찾았다.
‘무한대.’
최근에 생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
정우는 무한대를 떠올리자마자 해당 상품의 툴팁을 띄워 올렸다.
[무한대]정수를 아무리 소모해도 20% 미만으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 가격: 중요한 기억 한 가지를 영원히 잃습니다.
* 비고: 유사한 기억조차 되찾거나 새로 저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을 느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랬군. 무한대의 대가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는가.’
슥.
정우가 민구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놀랍게도 냄새가 정우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민구의 옆에 바짝 섰다.
정우와 많은 일을 겪었던 녀석이기에 그의 눈빛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크릉!
* 죽어!
냄새가 털을 빳빳이 세우며 정우를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민구와 함께 죽을 거란 의미인지, 아니면 정신 나간 발상을 하는 정우에게 던지는 욕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켜. 지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정우가 이렇게 말하자 이번엔 민구가 질문을 던져 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이 녀석도 날 기억하는데 넌 왜.”
이 말을 들은 냄새가 민구의 허벅지에 옆구리를 비벼대며 아는 척을 했다.
크릉.
녀석 나름대로 민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반면 정우는 민구와 냄새의 관계가 일종의 장애물로 느껴질 뿐, 이것 때문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나진 않았다.
“거래의 대가로 너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뭐?”
“이제 내 정수는 2할 밑으로 떨어지지 않아.”
“…….”
이에 민구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정우의 대사에서 힘이 가장 들어간 부분은 ‘기억을 잃었다.’가 아니라 ‘내 정수는 2할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였으니까.
아들, 아니 이 남자는 이제 온전히 구원자가 돼 버린 것이다.
-제가 구원자예요.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알고요.
행운동에서, 녀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역할을 밝히던 그 대사.
민구는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방금 눈앞에서 증명됐음을 깨달았다.
“그럼 이제…….”
어렵사리 운을 떼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구는 턱 끝에 힘을 준 채 울긋불긋한 냄새의 발등에 시선을 놔뒀다.
그러자 정우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저 정수를 집어. 13억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