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77
281화. 아버지와 아들(3)
* * *
빠아아앙……!
뱃고동 같기도 하고 거대한 금관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정우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새까만 수평선이 보였다.
‘……?’
시커먼 하늘과 맞닿아 있는 새까만 바다.
정우는 그제야 자신이 검은 바다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여긴?’
눈을 떴다는 기억은 없으나, 언젠가부터 시야가 있었다.
사아아아아…….
어디선가 파도가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릎 쪽에 무언가 느껴져서 고개를 내려보니 검은 바닷물이 한쪽으로 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철퍽, 철퍽.
바닷물 속에서 발을 떼자 지구의 바다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정우는 바닷물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잊고 있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행성 폐쇄, 구원자 전형, 진입로, 침식자 그리고.
‘8일 차.’
정우는 8일 차 침입자를 떠올려 보려 했으나 왜인지 놈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콰아아아아……!
바닷물이 향하고 있는 전방에서부터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폭포라도 있는 걸까.
철퍽, 철퍽.
그는 이계에서 온 바닷물과 함께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곧 문제의 광경을 보게 됐다.
콰아아앗!
정말로 폭포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싱크홀이라고 봐야 했다.
바다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리로 검은 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눈대중으로 봐도 직경이 500미터 이상이다. 싱크홀의 맞은편이 간신히 보일까 말까 했으니까.
그러다가.
빠아아앙……!
아까 그 뱃고동이 또 들려왔다.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웠다.
이에 정우는 조심스럽게 싱크홀의 끄트머리로 발을 가져갔다.
그러곤 천천히 상체를 기울여 이 거대한 구멍의 안쪽을 내려다봤다.
‘……!’
어둠 속의 어둠.
검은 도화지 위에 먹으로 그림을 그린 듯한 장면이었지만 정우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싱크홀만큼이나 몸집이 커다란 존재가 저 밑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아……!
놈은 쉬지 않고 내려치는 검은 바닷물에 대항해 양팔을 휘두르며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아.’
왜인지 처절함마저 느껴지는 대상체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정우가 일순 깨닫는다.
‘……넌.’
저건 다름 아닌 지구였다.
그리고 이때 구멍 속의 존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사위가 어두워 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시선이 마주쳤다는 건 확실했다.
정우가 녀석의 머리 쪽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별안간 모든 게 흐려졌기 때문이다.
쏴아아앗!
‘……!’
의식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고 있었다.
‘곧 깨어나겠군.’
이 와중에 정우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미 탑과의 거래까지 경험한 정우에게 불가사의한 공간으로의 의식 이동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스앗!
흐려지다 못해 완전히 일그러졌던 시야가 순식간에 복원됐다.
여전히 주변이 어둡긴 했지만 조금 전 봤던 그 풍경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였다.
적어도 폐를 통해 들어오는 이 공기는 분명 지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흡.”
정우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부릅뜨자 이를 느낀 냄새가 몸을 움찔했다.
캬릉!
* 정우!
냄새의 성대가 진동하는 게 정우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둘의 몸이 밧줄로 단단히 묶여 있는 탓이었다.
‘내가 좀 늦잠을 잤나 보군.’
스스스슷, 스슷.
아까부터 아주 거슬리는 기척이 난다.
정우는 냄새에게 몸을 맡긴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천 개의 다리로 대지를 밀어내고 있는 벌레형 침식자가 눈에 들어왔다.
문제는.
스스슷, 스스슷!
두 마리라는 거.
‘어떻게 된 일이지?’
다른 일행에게 물어봐야 마땅한 대답이 나올 리 없고,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시간 낭비다.
게다가 냄새를 제외한 나머지는 지금 정우가 깨어난 것도 모를 정도로 바빴다.
두 마리나 되는 침식자가 서로 경로를 바꿔 가며 공간을 먹어 치우고 있는 탓에 공격은커녕 자기 몸 간수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
밧줄이 제법 귀한 자원인 건 맞지만 그보다 더 귀한 건 지구의 공간.
정우는 즉시 밧줄을 끊어 내고는 냄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파앗!
그러곤 곧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침식자에게 먼저 정수 창을 던졌다.
쐐애애애액!
정수 67억 개가 담긴 투창.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른 그의 창은 침식자의 외피에 닿자마자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퀴이이잉!
이명과 흡사한 소리가 나면서 푸른빛이 번쩍였고, 이때가 돼서야 나머지 일행이 정우의 귀환을 알아차렸다.
“……!”
“저, 정우 씨!”
한편 필살의 일격을 맞은 첫 번째 침식자는 기괴한 외마디를 뱉으며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기아아앙…….
쿵!
몸통에 깔려 분질러진 수천 개의 다리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그 상태에서 놈의 몸속에 있던 진입로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쿠드득, 쿠득.
일대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침식자의 몸뚱어리를 빨아들인다.
그러나 정우는 저 광경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두 번째 침식자를 가리켰다.
“쫓아. 숨통은 내가 끊을 테니 다리만 박살 내라. 2초 뒤에 재장전이다.”
* * *
오후 7시 14분.
두두두두……!
정우 일행은 각자 말에 나눠 탄 채 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정우의 도움으로 두 번째 침식자까지 빠르게 해치운 뒤 복귀 중인 거다.
천만 단위 정수를 가진 여섯 필의 말과 23억 개짜리 구원자 박민구, 6억 개짜리 각성자 송한령, 그리고 1억 2천만 개의 아므라.
이 구성원이 전부 덤벼도 쉽게 쓰러지지 않던 괴물이 박정우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덕분에 이들로선 박정우의 존재 의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는 지구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아무리 잔혹한 생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자리의 모두보다, 박정우 하나의 가치가 훨씬 높다…….
“…….”
민구는 무리의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정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조금씩 그의 뒤편으로 말을 몰아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민구의 말이 방향을 살짝 틀자마자 정우가 건조한 음성을 냈다.
“뭡니까.”
물론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발음한 대사다.
그는 지금 ‘레이더’로 민구의 정수 흐름까지 전부 꿰뚫었고, 간파로 인해 상대의 속까지도 훤히 보고 있었다.
|박민구가 질문을 할 것입니다.
|박민구가 거짓을 준비합니다.
|박민구는 진실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뭐지?’
간파의 보고에 의하면 박민구의 내면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대개 이건 배신이나 기습을 준비하는 자가 보이는 양상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박민구에 대한 간파 보고에선 공격과 관련된 내용이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란 존재의 특수성일 것이다.
박민구는 여전히 아버지로서 기능 중인 거라고, 정우는 생각했다.
“음.”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민구가 헛기침으로 운을 뗐고, 실제로 정우의 간파 보고도 일관성을 띠기 시작했다.
|박민구가 거짓을 준비합니다.
|박민구가 거짓을 이야기합니다.
“마차에 남겨 놓고 온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지? 중국에도 성역을 세울 생각이냐?”
“……?”
‘거짓’이라고 진단된 것에 비해선 상당히 평범한 질문.
정우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간파의 보고 내용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깨달았다.
여태 그가 타인과 해 온 대화는 전부 일방적이었다.
정확히는 정우가 상대의 목숨을 쥔 채로 무언가를 묻는 취조 내지는 협박이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간파가 거짓이라고 알려 온 내용들은 정말 거짓이었던 것이다.
상대가 정우를 속이기 위해 둘러댄 대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민구가 건네 온 ‘거짓’은 지금까지 들어온 거짓말과는 전혀 달랐다.
‘진심이 아닌 거군. 정말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건가.’
일반적인 사람끼리 으레 나누는 형식적 대화.
간파는 이것 또한 거짓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장은 그럴 능력도 없고.”
정우의 이 말은 간파라 해도 진실로 판별했을 거다.
정말로 그에겐 성역을 세울 능력이 없었으니까.
7일 차 개별 특혜로 성역 대신 강림을 고른 탓이다.
그러자 민구가 또 뭔가를 고민 중인지 간파가 보고를 해 왔다.
|박민구가 거짓을 준비합니다.
|박민구가 거짓을 이야기합니다.
“8일째에 온다는 그 괴물이 그렇게나 강한가?”
또 진심이 아닌 질문.
그러나 8일 차 침입자는 적어도 정우에겐 중요한 화제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예, 누군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날부로 이 행성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이 지역은 궤멸하겠죠.”
어디까지나 행성 기록의 시야 제공자의 눈을 빌려 봤을 뿐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항상성이 바닥났을 정도로 놈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그리고 그런 괴물이 조만간 이 행성에 나타난다.
따라서 정우로선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이를테면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라든지.
그러다 마침내.
|박민구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박민구가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만약 이 일을 다 해내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지?”
아버지 박민구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이 날아들었다.
“뭐?”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풀었다.
그러곤 이내 답을 준비해서 내보냈다.
“성역에 안착한 녀석들이 알아서 잘하겠죠. 그걸 대비하기 위해 방주가 있는 게 아닙니까?”
“아니, 네놈이 어떻게 되냐고 물은 거다.”
“……아.”
이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
왜냐면 그 누구도 정우 자신의 안위를 물어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태 마주쳐 온 자들의 세계관에선 박정우가 최강자였으니까.
따라서 이건 박민구, 박정우의 아버지가 아니고선 감히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안 중요하나? 적어도 네 결말은 알고서 이 짓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이 행성의 결말이 아닌 나 자신의 결말.
정우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고민조차 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유력한 행성 구원자 말이다.
자신의 결말을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면 탑과의 거래에서 다섯 개나 되는 상품을 집어 들 순 없었을 테니까.
“그런 건 제게 독입니다.”
정우는 자신의 입장을 대사 한 줄에 함축했다.
“행성의 결말이 나야 제 결말도 있는 셈이죠.”
“등신 같은 새끼. 행성만 결말이 나고 네 삶은 박살 날 수도 있어.”
박민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정우는 그런 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다.
“씨팔.”
정우의 눈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 내지 못한 민구가 바닥에 침을 뱉는다.
그러더니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며 다시 물었다.
“어찌 됐든 이 땅은 어떤 식으로든지 결말이 날 거 아니냐? 그럼 그다음엔 어디로 갈 생각이지?”
“글쎄요.”
이 화제는 방금 것과 달리 정우도 고민 중인 차였다.
‘이봐.’
정우가 의식 속에서 말을 건네자 머릿속에 큰 기척이 일어났다.
담당 평가관 다467이다.
물론 정우가 부르고 싶었던 건 녀석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가이드라인은 완전히 끊겼나?’
-그렇습니다. 인간, 박정우 님께서는 더 이상 가이드라인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저번에 봤던 그 안내문도 더는 볼 수 없는 건가?’
파견 여부를 결정할 때 봤던 주요 지역 현황을 말하는 거다.
이에 평가관이 바로 답을 해 왔다.
-파견 후보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팟.
「미국」
| 견고합니다. 최소 수백 단위의 개체가 각지에서 결집하여 침입자에 맞서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응한 새로운 체계가 발생했습니다. 이 국가를 첫 파견지로 선택한 존재가 극히 적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체계에 순응하거나 소멸당할 것입니다.
「브라질」
| 무질서합니다! 먹이사슬이 수시로 뒤틀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그 어떤 체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이 국가를 첫 파견지로 선택한 존재 대부분이 6시간 이내에 사망했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수면을 취하기 어렵습니다.
「이집트」
| 점거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의 파견자들이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있습니다. 광기와 신념이 넘쳐흐릅니다. 파견자께서는 이 지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면 희생당할 것입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정신적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러시아」
| 폭풍전야. 시베리아라고 불리는 넓은 공간에 생성된 진입로 하나가 장기간 방치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여파가 곧 러시아 전역을 덮칠 것입니다. 많은 질서가 파괴되었지만 그 자리를 새로운 질서들이 채웠습니다.
| 이 지역을 파견지로 선택한 구원자는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침입자와 맞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