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79
283화. 아버지와 아들(5)
아버지와 아들의 살인 공조.
“헉…….”
아직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마차의 민간인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지원량의 머리보다 이를 잘라 낸 민구에게 더 놀란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질됐다지만 부자(父子)가 살인을 함께하다니…….
“우어억!”
끝내 의사 중 하나가 바닥에 토사물을 쏟아 내며 본인의 도덕선이 붕괴됐음을 알렸다.
반면 이미 닳고 닳은 각성자들은 지원량의 시체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바빴다.
곧 놈이 뿜어낼 정수 구체 때문이었다.
고의든 실수든 단 하나라도 흡수했다간 강제로 ‘저장고’ 신세가 될 테니까.
파팟, 팟!
이윽고 바닥에 늘어진 지원량의 몸뚱어리에서 푸른 구체가 튀어 올랐다.
“비켜.”
이에 민구가 근처에 멀거니 서 있던 의사를 밀어냈다.
팍!
상당히 거친 동작이었지만 실은 의사의 목숨을 구한 셈.
상대도 이를 모르지 않았기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내가 전부 가져가면 되나?”
민구가 확인차 물었고, 이를 들은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흡수를 시작했다.
티틱, 틱, 틱. 스아아…….
정수 총량 23억 개에서 19억 개 추가 흡수.
솨아아아앗!
정수가 두 배 가까이로 불어난 만큼, 좌중의 각성자들이 느끼는 민구의 존재감도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미친.”
6억 개짜리 저장고 송한령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친다.
마치 아주 날카로운 칼이 눈앞에 들이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
민구의 기세에 압도된 건 아므라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켰다.
이러한 위압감에 비교적 익숙한 덕분이었다. 정우와 제법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오지 않았던가.
“흐으읍……!”
민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정수를 흡수한 탓이었다.
정수 총량이 23억 개에서 26억 개로, 다음엔 28억, 그러더니 순식간에 30억 개를 돌파했다.
‘……!’
머릿속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일련의 숫자만큼이나 민구의 의식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영혼을 고속으로 회전 중인 세탁기에 집어넣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 이게 뭐야?’
단순히 힘만 강해지는 게 아니던가?
민구가 의식 속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의 담당 평가관이 보고를 해 왔다.
-인간, 박민구 님의 그릇이 보다 많은 정수를 수용하기 위해 확장 중입니다.
‘뭐?’
민구의 반문은 계속될 수 없었다.
곧이어 의식 속에서 마치 힘줄이 끊어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그가 육성으로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시퍼런 입김이 뿜어져 나갔고, 이에 뒤를 돌아본 정우의 눈에 묵직한 숫자가 들어왔다.
「4,361,208,544」
43억 6천만 개.
민구의 최종 정수량이었다.
“……몇 위입니까?”
새우처럼 구부러진 민구의 등 위로 정우의 질문이 떨어진다.
“흐학!”
그러나 민구는 아들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바닥을 양팔로 짚었다.
그러곤 한참 뒤에야 거친 호흡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 근본 없는 자식이 됐구만.”
“…….”
정우의 얼굴엔 여전히 한 올의 동요도 없었고, 민구는 그런 아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3위다.”
“……!”
이 대답에 오히려 정우를 제외한 나머지가 크게 놀랐다.
“사, 삼 위시라고요? 지금?”
아므라의 물음에 민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이 마차 안에 중국의 구원자 1위와 3위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견의 여지 없이 사상 최강의 전력일 터.
다들 멍한 얼굴로 두 사내를 번갈아 보고 있자 정우가 여느 때처럼 건조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제 이 나라의 정수가 동났다는 뜻이겠군요.”
* * *
삐빅, 삐빅, 삐빅.
작지만 충분히 거슬리는 소리.
“으움…….”
위양거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 중인 무언가가 보였다.
다름 아닌 전태천의 손목시계.
그러고 보니 매번 저 시계의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별일 없는 거지요? 몇 시쯤 됐습니까?”
위양거가 눈을 껌뻑이며 속삭이듯 묻자 전태천이 차창 밖을 내다봤다.
“새벽 2시입니다.”
“2시요……? 굳이 왜 2시 알람을.”
위양거는 이렇게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에 채 깨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내의 모든 각성자가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던 건 이쪽인 듯.
“정우 씨 지시였습니다.”
전태천은 짤막하게 대답한 뒤 정우 쪽을 바라봤다.
굳이 직접 가서 보고하지 않아도 될 거다. 방금 알람을 같이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우는.
[2] 인간: 다 됐나?최초의 채널을 통해 ‘종’을 호출 중이었다.
밤사이 그의 순위는 한 단계 하락한 상태였고, 이는 종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최후의 결전을 위한 준비 말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놈의 정수 총량이 63억 개였으니 최근 몇 시간 동안 최소 4억 개의 정수를 흡수했다고 봐야 할 거다.
‘일부러 차이를 크게 벌리진 않았을 거야.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짓이니까.’
정우는 2위로 밀려났음에도 조급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유력한 행성 구원자의 사고방식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종이 단순히 이기는 데만 혈안이 된 자였다면 당연히 마주치는 정수를 족족 흡수해서 진즉에 1위를 탈환했을 거다.
그러나 종은 지난 수 시간 동안 계속 2위를 지켜 왔다.
여신 거래의 페널티를 키우지 않기 위해 몸집을 일정하게 유지해 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1위 자리를 다시 가져갔을까?
‘…….’
이유야 얼마든지 있다.
정수량을 거의 같게 맞추려 다가 순위를 추월해 버린 걸 수도 있고,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정우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놈은 결코 이 경쟁을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나와 정수 차이를 크게 벌렸을 리 없다.’
이건 1위를 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과 같은 괴물들의 원칙을 믿는 것이다.
“어, 잠깐. 네가 왜 2위야?”
정우가 종의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 채널의 채팅을 본 민구가 눈을 크게 떴다.
조만간 2위 구원자인 종이란 놈과 아들이 싸운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막판에 와서 그놈이 1위가 되고 아들이 2위로 밀려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8일 차가 오기 전에 놈과 싸우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이제 약속을 잡아야죠.”
“그럼 정수는?”
“……?”
“다시 1위를 찾아야 할 거 아니냐. 정수를 더 구해서 가야지.”
이에 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제가 정수를 또 늘려 버리면 파국입니다. 놈도 제가 룰을 깼다고 생각해서 보유한 정수를 전부 먹어 치울 거예요.”
“무슨 개소리야. 놈이 이미 1위로 올라갔잖아? 룰을 깬 건 저쪽이라고.”
“본래 자기 자리를 회수한 것뿐이죠. 자리를 바꾸기 위한 최소한의 정수만 흡수했을 겁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제 입장을 확인했겠죠.”
기존 1위, 박정우의 정수량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같음을 알고서 종도 정수량을 동결시켰을 거란 이야기다.
“……미친놈.”
말도 안 될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에 민구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래서 2위인 상태로 놈과 싸우겠다고?”
“예.”
“결국에 네가 지면? 그럼 난 생면부지의 구원자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거냐?”
“저보다 더 뛰어난 구원자에게 힘을 보태 주는 겁니다.”
“뛰어나고 자시고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 주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네가 아버지 노릇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웬 중국놈을 위해 죽을 생각까진 없어.”
민구가 단호한 자세를 풀지 않자 정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놈을 꺾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가 죽으면 놈에게 협조하세요. 그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일 테니까.”
그리고 이때 드디어 구원자 채널에 놈이 나타났다.
2위…… 아니, 이젠 다시 1위에 올라선 구원자 ‘종’ 말이다.
[1] 종: 넌 지금 어디에 있지? 난 이미 북상 중이다.예상보다 훨씬 빠른 종의 진척도.
정우는 현재 내몽고자치구 남부를 훑는 중이었고, 따라서 대륙 중부까지 가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종을 호출했던 것이다.
“…….”
그는 중국 전도를 펼쳐서 적절한 도시를 찾았다.
[2] 인간: 지금은 북단이야. 4시간 뒤면 난양 시까진 닿을 수 있을 거다. [1] 종: 난양?그러더니 종이 다시 말했다.
[1] 종: 적당하군. 그럼 오전 7시까지 난양으로 와라. 워룽구에서 시청 건물을 찾을 수 있을 거다.오전 7시면 지금으로부터 5시간 뒤다.
그리고 8일 차 개시까지 1시간 남게 되는 시점.
이건 누가 살아남든 간에 대결이 끝난 뒤 바로 ‘업무’를 시작하자는 의미였다.
[2] 인간: 좋다. 7시, 난양 워룽구.이렇게 해서 중국 최강자를 가릴 대결 장소가 정해졌다.
최초의 채널에 머무는 모든 구원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 때문에 정우는 대다수 구원자가 난양 시를 피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47] 불태: 혹시 관전도 가능합니까? 대체 어느 경지까지 가야 이 나라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데.곧 자신이 1번 채널 구원자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 * *
허난성 난양 시.
지금은 큰 의미가 없긴 하지만 한때는 1,10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상주하던 대도시다.
따라서 그만큼 대지 면적도 큰 건 당연한 일.
종이 구 단위까지 특정을 해 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워낙 거대한 도시라 패스파인더를 사용하는 구원자들조차도 서로를 찾기 어려울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 지리에 빠삭한 위양거가 정우 일행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약속 시간이 오전 7시, 해가 뜬 이후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정우 일행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난양 시의 청사가 있는 워룽구 진입부에 닿을 수 있었다.
이때 시각이 오전 6시 36분.
약속한 것보다 다소 이르긴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상대도 일찌감치 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 청사 앞에서 종을 만나게 되면 바로 싸우시는 겁니까?”
아므라가 청사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흘깃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에 정우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야지. 8시 전엔 모든 게 정리되어야 하니까.”
그가 말한 ‘정리’엔 각자 끌고 온 저장고의 처리와 기타 잡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민간인이나 물자 배분, 이동 수단 확보 등등.
“싸움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정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자신의 구원자 순위를 확인했다.
정수 총량 67억 개로 2위.
아마 종의 정수량도 67억 개 근처일 것이다.
즉, 이번엔 정말 맞수끼리의 싸움인 거다.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자신을 쓰러뜨릴 여지가 있을 정도로 잘 정련된 존재.
그런 존재와의 만남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이다.
‘날 실망시키지 마라.’
이제 남은 과제는 과연 종이 정말로 1위를 탈환하자마자 정수를 동결시켰을 것이냐는 점.
스르륵.
이윽고 발치의 정수 표식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정우가 품은 67억 개의 정수도 서서히 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