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83
287화. 한 사람, 두 존재(4)
* * *
“우리를 꺾는 게 문제인가? 방금 당신이 정수를 다 먹어치웠잖아.”
전신을 뒤덮은 유막 때문에 종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놈이 지금 격분했다는 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승자의 여신 거래 마감을 위해 애써 모아두었던 수십억 개의 정수.
이걸 결투 당사자도 아닌 박민구가 전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
물론 이론상으론 달라진 게 없었다.
그저 여러 저장고에 나눠져 있던 정수가 한데 모였을 뿐.
그러나 그렇게 모인 정수가 박정우의 아버지라는 건 큰 문제였다.
게다가 방금 보지 않았는가?
저 중년 사내의 공격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종의 입장에선 삽시간에 적이 둘로 늘어난 셈인 거다.
“…….”
이에 정우도 한동안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잠시 뒤 민구에게 짤막한 질문을 던졌다.
“구원자가 될 겁니까?”
“……뭐?”
“저 녀석과 절 죽이고 이 행성의 구원자가 될 생각이라면 당신을 인정하겠습니다. 누가 됐든 가치를 증명한다면 그자는 생존할 자격이 있죠.”
“…….”
당연히 민구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이를 본 정우의 얼굴이 곧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라면 죽어.”
“……!”
순간 민구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쫴애애애액!
정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에서부터 수십 갈래의 가시가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 민구부터 죽이려는 거다.
“미친 자식!”
설마 아들이 종을 놔두고 자신부터 노릴 거라곤 생각을 못한 그였기에, 얼굴에 당혹감이 짙게 배어 나왔다.
홰액!
전방을 향해 번개처럼 휘둘러진 민구의 양팔.
그러자 그의 열손가락 각각에서부터 정수 실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물을 짜듯 서로 교차하면서 말이다.
쉬아아앗!
순식간에 화망(火網)을 구축한 정수 실은 민구를 향해 날아들던 가시들을 아주 간단히 동강 냈다.
츠츳, 츳, 츳!
그리고 이걸 본 종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박민구는 한 올의 보호막도 사용하지 않은 채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
가시가 모두 소멸하자 찰나의 소강 상태가 찾아왔다.
정우는 자신의 공격이 일시에 막힌 것에 조금 놀랐고, 민구는 차마 아들을 공격할 순 없으니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
따라서 이 와중에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채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는 건 종 하나뿐이었다.
‘둘 중 누가 이기든 어차피 내게 도움은 안 돼.’
룰이 이미 어그러졌으니 이제 자신이 택해야 하는 방식은 ‘무조건적인 생존’이라고, 종은 생각했다.
그래서.
타앗!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현 시점 정수 총량은 고밀도의 가시를 쏘아냈던 정우 쪽이 더 작은 탓이었다.
‘제길.’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정우는 이내 종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상대는 정수 손실이 전혀 없는 상태로 다가오는 중이다.
따라서 놈의 촉수를 똑같이 가시로 막아내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의 정수가 먼저 바닥날 터.
‘잘못하면 팔 한 짝 정도는 날아갈지도 모르겠군.’
정우는 이번 합에서 예상되는 최악의 피해를 생각하면서 정수 칼날을 빼들었다.
정수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충신’으로 영구 유지되는 칼날을 활용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종이 여지없이 전신에서 촉수를 뽑아 올렸다.
찌르르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정우의 위로 수십 갈래의 그림자가 내리 뻗친다.
끄득.
정우는 이를 악물면서 종의 정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곧 쏜살같이 날아들 촉수들을 칼날 하나로 쳐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물론 사력을 다하고 있는 건 종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약화된 상태라지만, 박정우는 파견자 신분으로 순식간에 1위를 가져갔던 괴물이다.
게다가 절대 부러지지 않는 칼날까지……. 얼마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이번엔 반드시 죽인다!’
팔팔 끓는 정수.
그러나 두 괴물 모두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
“이 새끼가……!”
민구는 종이 정우에게 달려드는 걸 보고서 곧장 정수 장벽을 뽑아 올렸다.
다름 아닌 정우의 바로 앞에 말이다.
그로선 종을 먼저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정우의 생존을 보장할 수가 없어서 보다 확실한 방법을 택한 거였다.
콰아아앗!
시퍼런 장벽이 종과 정우 사이를 가르자 두 괴물 모두 깜짝 놀라며 민구 쪽을 바라봤다.
“……?”
이들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어쨌든 종의 공격은 민구의 장벽에 가로막혀 정우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콰콱, 콰앗!
푸른 장벽이 정우의 몸뚱어리를 대신해 넝마가 됐고, 이에 정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민구를 바라봤다.
“……왜지? 나라면 저 녀석부터 쳤을 거야. 머리를 하나 줄일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정우의 시야에 들어온 민구는 아까보다 정수량이 한참 줄어들어 있었다.
장벽을 빚어내기 위해 대량의 정수를 소모했던 거다.
“불쌍한 새끼……. 이 행성이 널 고른 이유가 다 있었구나.”
민구가 착잡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그러곤 아직 유막에 싸여 있는 종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화앗!
팔의 동선을 따라 매끄럽게 쏘아져 나가는 정수 실.
“……!”
종은 저 실의 면적대비 정수 밀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련하게 방패를 빚어 막아내려는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잽싸게 신체 강화에 정수를 쏟아 부은 뒤, 몸을 비틀어 회피 기동을 했다.
사선으로 날아든 정수 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낸 것이다.
그러자.
쉬잇!
민구가 갑자기 주먹을 쥐더니 팔을 몸 쪽으로 끌어 당겼다.
마치 줄을 잡아당기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때 종의 ‘간파’가 보고를 해왔다.
|박민구가 기습을 시도합니다.
“뭣……?”
이를 본 종이 두 눈을 번뜩 떴고, 거의 동시에 푸른 실선이 그의 머리를 가로로 베고 지나갔다.
삿.
아주 짤막하지만 확실한 절삭음.
민구가 날려 보냈던 정수 실이 방향을 바꿔 주인에게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이게 바로 그의 정수 변이였다.
‘……극공형이군.’
정우는 자신이 방금 본 장면을 머릿속으로 몇 번씩 재생시켰다.
이제 곧 저 실과 자신이 다퉈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민구는 종의 몸뚱어리가 바닥에 처박히는 동안에도 정수를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을 뿐.
저벅, 저벅.
그가 걸음을 멈춘 지점은 종의 시체에서부터 약 1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파팟, 팟, 팟!
이윽고 종이 87억 9천만 개나 되는 정수를 토해냈고, 민구뿐만 아니라 정우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리로 옮겨갔다.
파아앗…….
일대가 파랗게 물들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담긴 수십 개의 정수 구체.
민구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정우에게 물었다.
“내가 이걸 다 흡수하면 넌 다시 2위가 되겠지. 정수 차이도 압도적으로 벌어질 테고 말이야.”
종이 사망하면서 정우가 다시 중국의 1위가 됐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민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존대를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아무리 봐도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내 덕분인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이제 내가 가장 유력한 행성 구원자인가?”
“지금 발 앞의 정수를 전부 흡수한다면…… 그렇게 됩니다.”
정우의 말대로 민구와 ‘정수 밭’의 거리는 채 10센티미터가 안 됐다.
그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억 단위의 정수가 흘러들어올 거란 이야기다.
“그럼 넌?”
“256억 개.”
“뭐라고?”
“아버지는 정수 256억 개를 가지게 될 겁니다.”
256억 개.
민구는 한참 뒤에야 저 수치의 의미를 깨달았다.
저건 민구가 종의 정수와 정우의 것까지 모두 흡수했을 경우의 정수 총량이었다.
‘……아.’
민구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다.
그다음엔 입가의 근육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이 새끼야!”
얼마나 진노했는지, 육성에 불과한 그의 소리가 광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정우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확인했다.
슥.
현재 시각, 오전 7시 8분.
“52분 뒤에 특혜 선택이 시작되고, 새 침입자가 나타날 겁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일을 진행하라는 거다.
이에 민구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일부가 이탈하긴 했지만 여전히 기차 측 인원들이 광장을 에워싼 상태였고, 저 맞은편엔 정우의 마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안에선 아므라가 정우의 복귀를 대비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당장 급한 건 8일 차 침입자입니다. 여길 빠르게 정리하고 남아 있는 진입로를 찾아서 이동해야죠.”
이제 와서 진입로 숫자를 더 줄일 순 없을 거라고, 정우는 덧붙였다.
현재 남아 있는 진입로 숫자만큼의 8일 차 침입자와 싸워야 할 거란 뜻이다.
“침입자를 다 해치우고 나면 파견을 선택해서 이 지역을 떠나게 될 겁니다. 그러니 곧 있을 선두 특혜에서 성역 선택 여부를 미리 정해놔야 하고.”
마치 후임자에게 근무 현황을 인계하듯, 정우는 자신의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던 향후 계획을 풀어놨다.
물론 민구로선 이것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비로소 박정우가 왜 그렇게 종과의 단독 대결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이해가 됐다.
두 괴물은 단순히 대량의 정수를 보유한 구원자가 아니었다.
장기간 각 지역의 최강자 역할을 수행해오면서 수많은 노하우를 쌓은 실력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저 정수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만으로 유력한 행성 구원자가 될 수는 없는 거였다.
여기에 더해서.
“아버지는 탑에서 상품을 사오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구원자보다 정수가 많아야 합니다. 그러니 파견지로 미국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민구의 물음에 정우가 미국과 러시아의 특수성을 부연했다.
대량의 정수가 묶여 있는 미국.
훗날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 거듭날 여지가 있는 러시아.
그러나 파견은 한 곳으로만 갈 수 있다.
“미친.”
정우의 설명을 듣고 난 민구는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정수 구체들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너 이 새끼.”
아들, 박정우가 지금까지 했던 말이 실은 후임자를 위한 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정우가 여태 쭉 해온 말은 사실상 ‘당신 능력으론 이 행성을 구원할 수 없다.’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민구의 기세가 꺾이자, 마침내 정우가 움직임을 보였다.
스윽.
제자리를 벗어나더니 종이 남긴 정수 구체들을 향해 걷기 시작한 거다.
“절 죽이지 못한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가치 증명에 실패한 겁니다. 아버지는 이 행성을 살리지 못할 거예요.”
“적어도 아버지로서의 가치는 증명했지. 애초에 행성 구원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민구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 정우는 이미 정수 밭 앞에 서 있었다.
“…….”
정적.
간파를 가지지 않은 민구로선 아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녀석이 앞으로 무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정수 총량 256억 개.
그것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리라.
‘흠.’
그럼에도 민구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원한 바를 이뤘기 때문이다.
민구는 정우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구원자를 위해 자살까지도 할 수 있는 존재란 걸 잘 알았다.
놈이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기억마저 지워버렸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말이다.
그래서 민구로선 종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정우가 본인의 생존 외에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없게끔 해야만 했으니까.
“…….”
이 와중에 또 시간을 확인하는 정우.
민구는 그런 정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굳이 내게 네 머릿속에 든 걸 이야기해준 거지? 어차피 널 죽이지 못할 거란 걸 잘 알았잖아. 불필요한 시간 낭비 아닌가?”
그러자 정우가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 봤다.
아마도 패스파인더의 진입로 표식을 보고 있는 걸 거다.
그러더니 다시 민구에게 시선을 줬다.
“본래라면 목을 바로 벴어야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뭘?”
“강력한 파견자가 하나 더 필요한 이유 말입니다. 절 위해서 조금 더 살아 계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