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84
288화. 갈림길(1)
8,791,291,478 / 20,113,503,687
87억, 그리고 200억.
“…….”
정우는 시야에 또렷하게 박혀 있는 이 두 개의 숫자를 한동안 거듭 읽었다.
이게 바로 향후 23시간 이내에 해결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여신 거래의 정리 조건.
정우는 총 200억 개의 ‘빚’ 중에 이미 87억 개를 정리한 상태였다.
다름 아닌 종이 남기고 간 유산으로 말이다.
따라서.
‘112억 개.’
그가 앞으로 더 흡수해야 하는 정수는 약 112억 개였다.
엄청난 양이다.
물론 정우의 현재 정수 총량은 무려 175억 개에 달했지만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67억 개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정우의 구원자 순위가 1, 2위를 오갔다는 걸 고려하면…….
‘이 나라에선 여신 거래를 종결할 수 없어.’
정우는 고개를 돌려 까만 이공간으로 가득 찬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두두두두…….
현재 시각 오전 7시 51분.
정우를 태운 마차는 대륙 북동쪽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7일 차였던 어제 미처 닫지 못한 진입로들이 저 방향에 분포해 있는 탓이다.
마차 안엔 민구에게 흡수당한 송한령을 제외한 기존 일행이 전부 남아 있었고, 아마도 한참 뒤편에선 종의 또 다른 유산인 기차 측 사람들이 차량에 나눠 타고 이동 중일 터였다.
녀석들의 말에 따르면 7일 차가 시작되면서 더는 기차를 운용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침식자들이 뿌려 둔 이공간이 주요 철로를 전부 먹어 치웠다는 거다.
따라서 저들로선 새로운 정착지와 새 보호자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당연히 박정우뿐이었다.
수십 분 뒤에 찾아올 선두 특혜를 통해 ‘성역’을 만들 수 있는 게 정우뿐이라 기차 인원 입장에선 그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어쩔 거냐?”
맞은편 창가에 앉아 있던 민구가 정우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수 총량 81억 개. 중국 내 구원자 2위.
“…….”
이제 정우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살인 충동을 참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민구를 죽이기만 하면 현시점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여신 거래 종결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과의 대결에서 드러난 그의 전투력으로 봤을 때 이만한 인재를 바로 소모해 버린다는 건 장기적으로 큰 손실이었다.
무엇보다도 박민구는 아들인 이쪽을 지키기 위해 본인의 목숨까지도 내놓지 않았는가?
신뢰성이 완벽히 검증된 아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아군.
“중국을 구제한다 해도 산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겠죠.”
정우가 운을 떼자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중국에 남게 될 자들을 위해 성역을 지을 거란 암시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오늘 선두 특혜에선 성역을 고를 겁니다.”
정우가 확답을 내놨다.
그러자 의사 2인방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뭐지? 말해라.”
“그럼…… 저희도 이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성역에서 머물게 되는 겁니까?”
사실상 정우의 곁을 이제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정우가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될 거다. 고생 많았다.”
“아……!”
의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절대자에게서 공식적으로 퇴직 승낙을 받은 거다.
단 하루,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더는 이계의 침입자들을 볼 일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괴물 같은 박정우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정우가 갑자기 뒷말을 덧붙이며 고무됐던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
“둘 중 하나는 쉴 수 없을 거다.”
“왜, 왜지요?”
“러시아로 가는 쪽에게 주치의가 하나 필요하지 않겠나? 도처에 침입자가 널린 지역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는 건, 산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거겠지. 의사를 구하는 게 결코 쉽진 않을 거다.”
“…….”
이 말에 의사들은 무어라 항변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하나라도 성역에 남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걸 잘 아는 탓이었다.
“그럼 주치의는 누가…… 아니, 그 이전에 러시아로는 어느 분이 가시는 겁니까?”
“그건 이제부터 고민을 해 봐야겠군.”
“……아.”
정우와 의사 2인방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민구가 질문을 이어 갔다.
“아직 누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거냐?”
“예, 솔직히 지금도 아버지를 죽일지 말지 고민 중이거든요. 미국이든 러시아든, 아버지가 그곳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문젠데?”
“아버지는 약해요.”
“…….”
약하다.
단순히 정수의 절대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인간적인 민구이기에 다른 경쟁자와의 싸움은 물론 수준급 침입자들과의 대결에서도 약점을 보일 여지가 많다는 거다.
“미국으로 가면 사람과 싸우고, 러시아로 가면 괴물과 싸우게 된다……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예.”
“당장 정수가 많이 필요한 건 너라면서? 네가 미국으로 가면 되는 문제 아니냐.”
“아버지가 러시아의 문제를 완벽히 해결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죠.”
“그러는 넌 러시아로 가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고?”
“예, 제가 실패한다면 애초에 그 누구도 성공할 수 없는 과제였던 겁니다.”
“…….”
민구는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말도 안 되는 자기 확신이 놈을 이 자리까지 끌고 올라온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종과의 대결에서 널 살린 건 나다. 어쩌면 네 여정은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어. 건방 떨지 마라.”
“정말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아버지한테 있는 겁니다. 더 유능한 구원자를 죽여 버렸으니까.”
“놈이 그 정도로 유능한 자식이었다면 너와 호각으로 다투지도 않았겠지.”
각자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부자의 대화.
정우는 더 언쟁하길 관두고 의식 속의 평가관에게 물었다.
‘지구는 더 이상 이 일에 개입하지 않나? 이번 선택으로 놈의 생사가 갈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실로 오만한 대사였다.
일개 인간이 무려 지구를 상대로 ‘살고 싶다면 날 도와라.’라고 말하는 중인 것이다.
그러자 정우의 의식 속에서 거대한 기척이 서서히 일어났다.
-인간, 박정우 님의 가이드라인 유효 기간은 만료되었습니다.
‘…….’
주제넘는 짓 하지 말란 이야길 돌려 말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우는 자신이 결코 분에 넘치는 말을 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민들에게 구조 요청을 보낸 건 지구였잖아. 따라서 놈은 그 어떤 구원자보다도 구원자답게 사고할 의무가 있지. 내가 지구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선택에 개입을 했을 거다.’
대륙의 1, 2위 구원자가 절대적인 신뢰 관계에 놓이는 상황은 행성 단위로 검색해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일 거라고, 정우는 확신했다.
다시 말해서 지구는 박정우라는 존재 덕분에 다른 행성이 갖기 어려운 기회를 손에 쥔 셈인 거다.
폐쇄 절차를 정말 막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주 유력한 구원자 말이다.
정확히는 구원자‘들’.
‘행성 기록에서 내가 본 걸 지구가 모를 리 없잖아? 다군의 행성 364만 개 중에서 존속에 성공한 건 불과 세 개 행성뿐이다. 행성 폐쇄는 그냥 사망 선고야. 기적이 벌어진 극히 일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고.’
-…….
평가관은 아무런 코멘트를 하지 않았고, 정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기적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박민구와 내가 미국과 러시아를 각각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내가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해.’
-…….
여전히 답을 하지 않는 평가관.
그럼에도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론 평가관과 대화 중이었지만 실제론 지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놈은 이 행성 자체다. 그러니 행성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인지하고 있을 터.
‘지금 날 죽일 수 있는 건 여신 거래뿐이야. 그래서 러시아행이 망설여지는 거다. 그곳에 내가 빚을 갚을 만한 양의 정수가 남아 있나? 없다면 난 미국을 택하겠다. 그리고 박민구를 러시아로 보낼 거야.’
그러자 마침내 평가관이 침묵을 깼다.
물론 정우의 요청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애초에 평가관은 폐쇄 절차를 지원하기 위해 외부에서 파견 온 일종의 근무자.
따라서 평가관에겐 월권을 해 가면서까지 일개 구원자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럴 능력조차 없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반면에.
-인간, 박정우 님과의 공간 연결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뭐?’
공간 연결이 끊어진다.
평가관과 만난 뒤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사였다.
그러더니 정말 정우의 의식 속에서 평가관의 기척이 지워졌다.
뭔가가 이 통신 채널 안에서 녀석을 밀어낸 거다.
그러곤.
쿠드드드드…….
이 의식이 하나의 공간이고, 벽면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 강제로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통이 따르거나 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침범을 시도 중인가.’
정우는 불청객의 정체를 알 것 같아 가만히 기다렸고, 곧 그의 의식이 통째로 솟구쳐 올랐다.
‘윽……!’
쏴아아앗!
탑과의 거래를 위해 진입로 안으로 빨려 들어갈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적어도 이번엔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있었다.
의식을 조이는 이 압박감의 유형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직접 초대했군.’
정우는 지금 지구의 회랑으로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 * *
오전 7시 51분.
8일 차 개시까지 9분 남은 시점.
러시아 서부의 코브로프라는 작은 도시에서 한 사내가 어떤 메시지를 받았다.
[권고] 최대한 많은 각성자를 대동하고 동부로 이동하십시오.‘……뭐?’
사내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다른 것도 아닌 지구의 가이드라인이 보내온 경고였기 때문이다.
사내의 이름은 다니엘 올브리츠키.
폴란드 태생의 구원자로, 현재는 러시아에 파견 와 있는 상태였다.
본래는 러시아에 살고 있는 형을 찾기 위해 이곳을 파견지로 고른 것이었지만 더는 그를 찾고 있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민간인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자신처럼 각성자 또는 구원자의 길을 택했다 해도 마찬가지로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라에선 불가능한 일이리라.
‘동부로 이동하라면, 대체 어디로 가라는 소리지?’
슥.
다니엘의 고개가 서쪽으로 돌아간다.
‘시베리아뿐이잖아.’
이 도시에서 동부로 더 나아가면 시베리아 구역에 들게 된다.
산지와 평야, 그리고 괴물밖에 없는 지옥 같은 공간.
게다가 침식자들이 활개 치고 다니던 곳엔 발을 디딜 자리조차 없을 거다.
하지만 방금 받은 메시지는 지구의 조언이 아니던가. 결코 무시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최대한 많은 각성자를 대동하라니.’
러시아 특성상 크렘린 궁의 지휘를 받지 않는 파견자들은 산 것을 만나기 어려웠다.
그가 그나마 생활 인프라가 남아 있는 모스크 일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변두리 도시에 머물게 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동부에 뭐가 나타날 예정이기에 이러는 거지? 진입로 때문인가?’
정확한 좌표를 찍어 둔 것도 아니고, 그저 동부로 가라는 지시뿐.
따라서 다니엘로선 일단 동부로 이동하면 패스파인더가 세부 위치를 정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밖에 산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정수 표식은 볼 필요가 없을 거고, 아마도 가장 가까운 진입로를 향해 움직이게 될 거다.
문제는 다른 각성자들을 어디서 끌어올 거냐는 점.
“…….”
굳이 방법을 찾자면 다니엘에겐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43] 목성: 이봐, 친구들. 믿기지 않겠지만 지구가 내게 조언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