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85
289화. 갈림길(2)
* * *
회랑.
각지의 유력한 구원자들이 지구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그러나 입장 자격을 얻었다 해도 지구의 ‘윤허’가 없으면 감히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지구의 필요에 의해서만 열리고 닫히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
지금 회랑에서 실루엣으로나마 존재하고 있는 건 오로지 정우뿐이었다.
온갖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던 수십의 유력한 행성 구원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마도 이 밀회를 위해 지구가 잠시 내보낸 것이리라.
놈은 이전에 봤던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거대한 구체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원형으로 축조된 회랑 중앙에 홀연히 떠오른 채 말이다.
지구가 자신의 형태로 설정한 ‘구체’는 정수 구체의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눈앞의 구체는 직경이 20여 미터나 돼서 존재감이 한참 크다는 점.
이 때문에 정우는 놈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며칠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 달리 당혹감이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우주에서 네놈의 서열은 어떻게 되지? 아니, 행성들에게 서열이나 권리 같은 게 있기는 하나?”
정우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서 내심 놀랐다.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었으니까.
지난번 경험에 따르면 회랑에서의 발언은 지구가 허락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즉, 녀석은 이곳으로 정우를 부르면서 일찌감치 그의 발언권을 모두 열어 둔 것이다.
스으으…….
이윽고 정우의 질문을 받은 ‘지구’가 원형 몸체를 천천히 회전시켰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회전 중인 녀석의 몸체 바깥에 어떤 무늬 같은 게 서서히 생겼기 때문이다.
“…….”
그건 다름 아닌 행성의 표면에 새겨진 섬과 대륙의 형상이었다.
다만.
스아아앗.
이번에 녀석이 보여 주려는 건 단순히 세계 지도가 아니었다.
정우가 파견 후보지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던 대륙, 러시아의 형태만이 유난히 또렷하게 양각되고 있었으니까.
“직설적이라 좋군.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지구는 정우의 두 번째 질문에도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각 자료를 제공했다.
팟, 팟, 파팟, 팟.
온통 진회색이던 러시아 대륙 위로 자그마한 별빛 같은 걸 박기 시작한 거다.
‘……정수.’
지구가 보여 주고 있는 ‘빛’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마치 행성 시야를 얻은 것처럼 각각의 빛을 볼 때마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수량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문제는 주 활동지가 될 시베리아 전역엔 단 하나의 빛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족히 수천 킬로는 될 광대한 영토가 온전히 방치되어 있었다.
그 어떤 각성자도 저곳에서 활동 중이지 않다는 뜻이다.
‘툴팁의 내용 그대로군.’
지구가 보여 준 지표에 따르면 러시아의 대다수 각성자는 대륙 서부의 모스크바 일대에 모여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지표상으로만 판단하면 러시아는 겨우 전체 영토의 20%만을 사용 중인 거다.
‘그럼 나머지는 전부 빼앗긴 건가? 도시 근처로 오는 침식자는 저 녀석들이 어떻게든 해결을 했겠지만 시베리아 안쪽에 있는 놈들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을 거 아닌가.’
이에 지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 영토에 변화를 일으켰다.
스르릅…….
마치 찐득한 기름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러시아 대륙의 동부와 북부 전체가 까맣게 물들었다.
“…….”
별다른 설명이 붙진 않았지만 정우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침식자가 뿌려 대는 이공간.
그것이 시베리아 전역을 전부 먹어 치워 버린 것이다.
“……잠깐.”
새까맣게 물든 시베리아를 응시하던 정우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럼 저곳에 발을 디딜 공간은 있나? 아무도 침식자를 견제하지 않았다면 땅이라곤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자 지구가 정우의 눈앞에 어떤 문자를 띄워 올렸다.
팟.
그런데 인간의 문자가 아니었다.
‘아.’
마치 뱀 두 마리가 서로를 옭아맨 것처럼 보이는, 생경한 형태의 문자.
탑과의 거래에서 마주쳤던 ‘첫째’와 ‘둘째’가 사용하던 초월적 문자와 얼핏 닮았지만 그 기능은 다소 떨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함축적인 의미가 전해지긴 했으나 초월적인 문자와 달리 완벽히 이해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초월적 문자의 하위 호환.
어쩌면 ‘우주에서의 네 서열은?’이란 질문에 대한 완곡한 답변일지도 몰랐다.
“…….”
지구가 띄워 올린 문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16%」
그러나 단순히 비율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방치된 시베리아 땅에 남은 지구의 대지 비율임과 동시에 최상위권 구원자라면 충분히 뭍을 밟아 가며 이동할 수 있을 거란 의미도 담고 있었다.
물론 저 남은 대지가 조만간 사라질 테니 서두르란 경고와 함께.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모자라잖아.”
정우가 육성을 내어 지구에게 따진다.
놈이 러시아 위에 뿌려 둔 ‘빛’을 모두 검토했으나 아무리 계산해 봐도 정수 112억 개를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에 남은 정수 총량은 기껏해야 70억 개였다.
저것도 아마 타국의 파견자를 포함한 양일 터.
여신 거래 종료까지는 앞으로 약 23시간이 남았고, 러시아로 파견을 가게 되는 건 못해도 10시간 뒤일 테니 사실상 13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과연 저 짧은 시간 안에 시베리아에 방치됐다는 진입로를 닫고 미국으로 파견을 갈 수 있을까?
‘불가능해. 심지어 땅이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수 불모지에 침입자들밖에 없고, 구원자로선 유배지나 다름없…….’
여기까지 생각한 정우는 비로소 지구가 자신을 불러들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우더러 러시아로 가라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박민구? 내 아버지가 정말 적격자인가?”
이 물음에 지구의 몸체가 순간 일렁였다.
그러곤 몸체 바깥 면에 띄워 올렸던 러시아 대륙을 소멸시켰다.
자리를 정리하는 거다.
“이 자리까지 왔으면 정확히 대답을 해. 박민구를 러시아로 보내면 되나? 그자가 가진 정수도 80억 개가 넘는다고!”
정우가 지구의 뒤를 쫓듯 외쳤으나 녀석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대답할 수 없는 걸지도.
“한심한 새끼.”
지구의 존재감이 도로 흐려지는 걸 느낀 정우가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곧장 그의 의식이 회랑에서부터 떨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앗!
‘제길……!’
놈과의 거리가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정우는 왜인지 지구가 겁에 질려 있다는 인상(印象)을 받았다.
구원자와 평가관과의 연결을 강제로 끊어 낸 일 때문일까?
정우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딘가로 빠르게 곤두박질한 그의 의식은 어느새 매우 익숙한 공간 안에 들어와 있었고, 이에 눈을 뜨자 거칠게 흔들리는 까만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두두두두…….
대지를 갈가리 찢어 놓은 이공간을 피해 달리는 중인 마차 안이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거다.
“어딜 다녀온 거냐?”
묵직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 박민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구에요.”
“……뭐?”
민구가 되물었으나 정우는 이에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많아서 답을 할 수가 없고,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회랑에서 이쪽을 맞이하던 지구도 똑같은 입장이 아니었을까?
태생이 우주의 일원인 녀석 또한 나름대로의 큰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을 거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59분.
8일 차 정산이 시작되기 전까지 1분 남았다.
“아버지가 러시아로 가셔야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모스크바로 가서 모든 각성자를 죽이세요. 놈들의 정수를 가져가지 않으면 시베리아에서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에게 우호적이진 않을 거예요. 보아하니 연합체가 있는 것 같던데.”
“모스크…… 뭐라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민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선 갑자기 호흡을 멈추고 의식을 잃었던 아들이 다시 깨어나선 헛소리를 지껄이는 상황이었으니까.
급기야.
삑. 삐, 삐, 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전태천의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리기까지 했고.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곱 번째 날이 찾아왔습니다.」
여느 때처럼 지구가 8일 차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행성 폐쇄 8일 차 오전 8시가 된 거다.
「먼저, 제가 통보받은 사안에 대해서 전달 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지구가 전날 입은 피해를 보고할 차례.
이를 모를 리 없는 마차 안의 모두가 안색을 굳혔다.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이 한 단계 낮아졌습니다.
|지구의 정수 총량이 2% 감소했습니다.
|행성 폐쇄까지 34일 남았습니다.
“2퍼센트?”
누군가 혼잣말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이내 깨달았다.
정수 손실이 적었던 건, 침입자들이 각성자를 사냥하는 대신 이 행성의 대지를 먹어 치우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란 사실 말이다.
‘현재까지 36퍼센트.’
정우는 매일같이 되뇌고 있던 지구의 정수 손실량을 갱신했다.
영구적인 손실량이다. 종과의 공조 덕분에 일정량을 복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많이 입었다는 건 명백했다.
게다가 문제의 시베리아.
만에 하나 이 행성이 존속에 성공하더라도 러시아 영토의 대부분은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을 포함한 다수의 2차 지역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대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건 한국, 터키 등 빠르게 파견자를 배출한 극소수 지역뿐.
이후로 터전을 다시 세울 ‘2세대’들은 이전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짐승이든 말이다.
-곧 선두 특혜가 발동됩니다. 인간, 박정우 님께서는 현재 소속 지역 내 1위 구원자이므로 특혜 내용을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평가관 다467이 정우에게 특혜 선택 권한이 있음을 알려 왔다.
조금 전 지구의 간섭에 대해선 달리 할 말이 없는 듯.
「각 지역의 최상위 구원자가 특혜 권한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시작된 선두 특혜.
유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수 보호막이 정우의 몸을 감쌌고, 곧 특혜 선택자만이 볼 수 있는 문구가 그의 의식 속에 나타났다.
|특혜 선택을 위해서, 박정우 님에 대한 보호 조치가 개시됐습니다.
|특혜 선택에는 1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에 특혜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 특혜가 발동됩니다.
정우는 이번이 무려 여섯 번째 참여였기에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출력되는 모든 문구를 완벽히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안내문을 보자마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뭣?’
|귀하가 소속된 행성이 법규를 위반했습니다.
|이에 따른 징계 조치로 인해, 공통 특혜의 일부 항목이 삭제되었습니다.
|새로운 특혜가 추가되었습니다.
|본 특혜는 행성 전체에 적용되며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소속된 행성의 법규 위반.
이에 따른 징계 조치.
이건 필시 정우와 지구의 밀회 때문일 것이다.
‘…….’
정우는 전에 없던 불안감에 휩싸였고, 이어서 나타난 특혜 항목은 그 불안감을 실체화했다.
[1] 지구에 대한 진입 제한 1단계 하락. [2] 해방된 지역의 불가침 상태 해제. [3] 패스파인더 삭제. [4] 더는 구원자가 정수를 읽을 수 없음. [5] 특혜 선택자 중 무작위 3명 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