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89
293화. 붕괴(1)
정우는 레이더를 통해 봤다.
“그아아……!”
격렬한 함성과 함께 마차 안에서부터 커다란 정수 덩어리가 뛰쳐나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다름 아닌 민구였다.
정우는 ‘어머니와의 대면’으로 인해 항상성이 급격히 하락하는 와중에도 목을 꽉 조이며 외쳤다.
“박민구! 마차부터 지켜! 저건 내가 처리한다!”
마차 안에 아직 산 자가 있음을 감지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리를 이탈한 민구는 광역 보호막을 회수한 상태였다.
마차 보호고 뭐고 눈앞의 끔찍한 존재부터 지워 버리겠다는 거다. 아마도 항상성이 빠르게 바닥을 치고 있어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이리라.
“멍청한 새끼.”
박정우는 이를 악문 채 민구가 내버린 자리로 몸을 날리며 보호막을 전개했다.
파아아앗!
그가 레이더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직경 3킬로 이내의 산 것 대부분이 죽었다.
마차 관리자 전태천은 물론 수 시간 뒤 이쪽에게 약을 투여해 줘야 할 위양거와 의사 2인방까지 말이다.
기차 측의 민간인들도 몰살됐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대다수 각성자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아므라와 냄새, 마차를 끌던 말들과 기차의 보안 담당자들.
특히 이동 수단은 여전히 필요했기에 그로선 남은 자원이라도 최대한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문제의 궤멸자를 제때 해치울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
“흐아아아악!”
멀리서부터 아버지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박민구가 엄청난 기세로 궤멸자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에 정우는 민구를 향해 정수 실린 음성을 쏘아 보냈다.
「오른쪽!」
레이더와 ‘간파’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궤멸자가 곧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콰악!
실제로 정우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궤멸자의 왼쪽 팔뚝이 꿈틀댔다.
그러더니 민구를 향해 마치 휘둘러진 채찍처럼 달려들었다.
쐐애애애액!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결코 대응조차 할 수 없을 속도였다.
그러나 민구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대번에 오른팔을 휘둘러 정수 실을 뿜어냈다.
쉬리릿!
육중한 기척과 함께 날아들던 궤멸자의 잿빛 팔뚝에 푸른 실선이 그어졌고, 그대로 토막 났다.
콰드드득!
두 동강 난 잿빛 팔뚝이 각각 민구의 좌우측으로 비스듬하게 굴러간다.
“……?”
정우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깔끔한 민구의 대응에 잠시 눈을 의심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민구의 정수 총량이 불과 수 시간 전의 중국 1위보다 많다는 사실 말이다.
아버지는 객관적으로 현시점 강자가 맞는 것이다.
게다가 방금 그 대응은 이쪽의 경고를 듣고 반응했다고 보기엔 너무 빨랐다.
다시 말해서.
‘온전히 자기 능력으로 싸우는 중인 건가.’
그것도 항상성 급락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말이다.
다만 궤멸자의 회복 능력도 민구의 빠른 대응만큼이나 놀라웠다.
쉬르릅.
민구를 덮치지 못하고 동강 났던 팔뚝 토막이 허공에 녹듯이 사라지더니 본체의 팔뚝 절단면에서 새 팔이 즉시 돋아난 거다.
그러곤 절을 하듯 엎드렸던 자세로 고개를 까닥이며 민구를 쳐다봤다.
이미 이성이 반쯤 사라진 민구로선 머릿속이 까뒤집히는 기분이었을 거다.
이계에서 온 괴물이 사별한 아내의 얼굴을 무단으로 가져다 쓰고 있으니까.
“이 씹……!”
대번에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고, 이 장면을 보던 정우의 레이더에도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됐다.
‘이런 멍청한.’
민구가 필요 이상의 정수를 끌어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앗!
이윽고 궤멸자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나간 정수 실.
민구가 보유한 정수 대부분이 투자된 필살의 일격이었고, 이 사실은 궤멸자도 잘 아는 것 같았다.
휘익!
민구가 실을 휘두름과 동시에 놈의 양어깨가 뒤로 슬쩍 접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여전히 민구의 정면에 가만히 있었다.
“……!”
정우는 그걸 보고서 궤멸자에겐 머리라는 부위가 별 의미 없음을 직감했다.
‘함정이다……!’
정우의 눈이 번뜩 뜨인다.
그러곤 곧장 민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벌써 두 사람의 거리는 5백 미터 가까이 벌어져 있었지만 175억 개의 정수는 그가 원하는 걸 실현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콰아아아앗!
고층 빌딩에 견줄 만한 크기의 정수 장벽을 각각 민구의 좌우측에 솟아오르게 할 정도로 말이다.
타아앙!
예상대로 궤멸자는 민구의 실에 머리를 내준 뒤 양손으로 민구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정우가 세운 장벽을 뚫어 내진 못했고, 오히려 장벽의 반탄력에 양팔이 튕겨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손가락이 전부 볼품없이 문드러져서 잿빛 살점 안에 숨겨져 있던 새까만 뼈가 훤히 드러났다.
‘내구성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군.’
정우가 각 장벽에 투입한 정수는 30억 개.
그리고 놈의 공격을 막아 낸 직후엔 장벽이 머금은 정수량이 10억 개까지 떨어졌다.
즉, 궤멸자의 통상 공격력은 정수 20억 개 수준이었던 거다.
놈의 주먹 하나를 받아 낼 때마다 정수가 최소 20억 개씩 사라진다는 의미.
따라서 중국의 웬만한 순위권자들은 궤멸자와 한 합조차 겨룰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박민구는 정수를 81억 개나 가지고 있어. 정신만 멀쩡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정우는 여기까지 생각한 뒤 곧바로 뒤편을 바라봤다.
그러자 사색이 되어 바닥에 토를 쏟아 내고 있는 아므라와 이상하리만치 태연한 기색의 냄새가 눈에 들어왔다.
정수 1억 3천만 개를 품은 짐승.
녀석에겐 사람의 얼굴을 한 궤멸자의 모습이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달릴 수 있나?”
정우의 물음에 냄새가 수염을 실룩거리더니 낮게 울었다.
* 빨리!
뭔가 하려면 빨리 결정하라는 건지, 아니면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녀석은 당장이라도 마차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정우의 시선을 받자마자 당겨진 활시위처럼 몸을 납작 수그렸으니까.
“박민구를 태운 채 저 녀석 주변을 달려. 만약 네 등에서 떨어져 나가거든 쫓아가서 다시 태우고. 죽지만 않게 해라.”
마침내 정우의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들은 냄새는 눈을 시퍼렇게 빛내더니 순식간에 마차 바깥으로 쏘아져 나갔다.
촤아아앗!
문자 그대로 번개 같은 움직임.
‘냄새’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과 달리 녀석이 민구에게로 이어지는 들판을 가로지를 때 보인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고도의 신체 강화로 인해 푸르스름하게 변한 줄무늬 가죽에서부턴 묵직한 잔상이 길게 뻗어 나왔고, 두 눈에선 시퍼런 안광이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 굽이치며 흘렀다.
* 민구!
민구가 수 초에 걸쳐 가로지른 거리를 한 호흡만에 주파한 냄새는 상대의 응답이 없자 곧장 머리와 목을 수그렸다.
그러곤.
팍!
정신없이 궤멸자를 향해 달려가던 민구를 다소 거칠게 둘러업었다.
캬학!
민구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음을 바로 알아챈 냄새가 긴장한 숨소리를 낸다.
다음엔 지체 없이 궤멸자의 좌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간발의 차이로 궤멸자의 육중한 팔뚝이 냄새가 있던 자리를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콰직!
마치 쿠키처럼 간단히 바스러지는 대지.
‘저런 게 진입로 하나당 최소 한 마리……. 내일 정산은 처참하겠군.’
정우는 궤멸자의 시선이 냄새의 움직임 못지않게 신속히 돌아가는 걸 보고서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나마 이곳엔 백억 단위 각성자가 있어서 대응을 할 수라도 있지 제대로 된 구원자가 없는 지역은 그야말로 유린을 당하고 있지 않겠는가?
침식자가 행성의 대지를 줄이는 데 최적화된 존재라면 궤멸자는 정수를 회수하는 일에 특화된 존재인 것이다.
「이쪽이다!」
정우가 음성에 정수를 실어 보내며 오른팔에 고밀도의 정수 창을 빚자 눈으로 냄새와 민구를 좇던 궤멸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통이 가로로 잘려 코 밑쪽만 남게 된 어머니의 얼굴을 한 채로.
그러더니.
츠르르릅.
절단면 위로 새 살점을 쌓아 올리며 순식간에 머리를 복구했다.
‘……!’
놈과 시선을 맞대자마자 잠시 정체되어 있던 항상성 하락이 다시 시작됐다.
손발에 모종의 경련이 일어나고, 정수의 흐름이 불규칙해진다.
‘으읍……!’
정우는 역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역겨움을 느낀 대상은 어머니의 얼굴을 무단으로 도용 중인 궤멸자가 아니었다.
이 순간 그가 가장 경멸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겨우 어머니의 모습을 한 괴물을 마주한 것만으로 항상성을 잃고 있는 나약한 자신 말이다.
고작 이 정도 성능을 위해 그간 수많은 생명과 유능한 경쟁자들을 죽여 왔던가?
심지어 지구는 이쪽의 오만한 거래에 응했다가 징계를 받게 됐다.
쏴아아아아…….
조만간 큰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쓸어버리리란 예감이 든다.
더는 가이드라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우는 자신의 항상성이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극도의 위기감.
의식이 백지처럼 새하얀 무언가로 차오른다.
그다음엔.
팟.
정우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문구가 나타났다.
|박정우가 항상성을 빠르게 잃고 있습니다.
|박정우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합니다.
|박정우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간파가 다른 이도 아닌 정우 자신에 대한 보고를 해 오고 있었다.
‘……?’
그렇다면 박정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는 이쪽은 대체 누구인가.
‘아.’
정우의 사고는 여기에서 끊어졌다.
팔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두 손이 시퍼렇다 못해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곤.
휙.
전방을 향해 양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살짝 던지는 것처럼.
그러자 그사이 백여 미터까지 다가와 있던 궤멸자의 좌우측에 거대한 정수 장벽이 솟구쳤다.
쿠드드드드……!
정우가 저 장벽에서 가시를 뽑아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마치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둘씩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처럼 아주 깊이 묻혀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떠올랐다.
팟.
전방으로 휘둘렀던 손을 슬쩍 펼치자 궤멸자를 감싼 장벽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수천 개씩 솟아올랐다.
촤차차차찻!
명확한 적의를 가지고 솟구친 가시들은 가장 가까이 있던 궤멸자의 신체를 무참히 꿰뚫었고, 이어서 정우가 손을 비틀자 각각의 가시에서 또 다른 가시들이 뻗어 나왔다.
나무의 가지처럼, 다만 끝없이.
사삭, 사사삭, 사삭.
가시가 가시를 계속해서 낳으며 무수히 증식한다.
이미 넝마가 된 궤멸자의 시체가 흔적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사사삭, 삭, 사삭.
대상체를 꿰뚫으며 계속해서 뻗어 나가던 가시들은 그사이 직경 수백 미터의 공간 전부를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정수를 사용한 공격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방식에 정우의 명에 따라 궤멸자 주변을 돌던 냄새가 달리기를 멈추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더는 나아갈 공간이 없게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크릉.
여전히 등에 민구를 업은 냄새는 꼬리를 낮게 깔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사이 궤멸자의 몸뚱어리를 사정없이 헤집던 ‘가시나무’들이 도로 몸집을 줄이기 시작했다.
사사삿, 삿…….
임무를 마친 가시들은 빠르고 신속하게 공간에서 빠져나갔고, 마침내 모든 가시가 모습을 감췄을 땐 궤멸자의 존재 역시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같은 순간 정우의 시야엔.
|박정우가 소멸했습니다.
간파가 박정우에 대한 마지막 보고를 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