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수배 (1)
‘뭣……?’
평가관의 이야길 들은 정우는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수 발현 방식을 직접 고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놀란 게 아니다.
정수를 1만 개까지 모으는 과정이 고작 튜토리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설마 그럼 행운동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큰 진입로도 있는 건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다.
그러나 정수 1만 개가 튜토리얼로 취급될 수준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닫지 못할 진입로가 없을 정도로 강해지기 위해선 정수를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할까.
‘지금 이건 다 애들 장난 수준인 거네.’
하체 일부만 남은 수사자의 몸은 더 이상 파랗게 빛나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저만치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암사자들이 보였다.
이제 놈들의 눈엔 살기나 총기(聰氣) 같은 게 사라져 있었다.
우리 안에 도로 갇힌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
정우가 말없이 만년필로 조준점을 잡자 웅크리고 있던 녀석들이 천천히 일어났다.
인간에게 머리를 조아린 채로 죽지는 않겠다는 뜻이었을까.
다음엔 시퍼런 정수 파동이 복도를 휩쓸었다.
푸아아악!
“으음.”
정우의 뒤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웅은 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대법원에서의 용무는 얼추 마무리된 것 같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바로…….
“대, 대단하십니다!”
유일하게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고딩’ 홍예성.
녀석은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정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정우가 아래층으로 떨어진 정수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이야기했다.
선웅은 그의 기분이 썩 유쾌한 상태가 아님을 직감했지만, 예성이란 녀석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홱!
대뜸 정우의 앞에 넙죽 엎드린 걸 보면 말이다.
“저도 그런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시키는 일은 다 할 테니……!”
“……?”
비로소 정우의 고개가 뒤로 돌아간다.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네 친구들은 도망가서 살았으니, 너에게도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집으로 돌아가. 가서 부모님 얼굴이라도 봐라.”
홍예성이 지닌 정수는 고작 3개.
곧 1,121개짜리 정수 덩어리를 흡수할 예정인 정우에겐 파리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녀석이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돌아가면요? 결국 죽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도 보셨잖아요. 경찰도 도망가는 거.”
기껏해야 하루 종일 대법정 안에 갇혀 있었을 녀석이,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이리도 잘 아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놈의 눈에선 강해지고 싶다는 의지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필 오늘 아저씨를 만나게 된 건 운명일지도 몰라요.”
팍.
예성이 자신의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통을 더 수그렸다.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걸까.
여느 영웅물에선 주인공이 수제자를 받는 에피소드가 종종 나오지만, 정우는 영웅이 아니었다.
“사자를 상대로도 정수를 못 썼으면, 넌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슥.
정우가 반짝이는 예성의 두 눈 사이에 만년필을 갖다 대자 녀석이 표정을 굳혔다.
“자, 잠깐!”
다급하게 외치는 예성의 눈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스아아…….
그의 정수가 생존 본능으로 인해 활성화된 것이다.
‘우스운 일이네.’
정우는 상대방의 푸른 눈동자를 내려다보면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미 소진했고, 정수까지 활성화해 버렸다. 살려 둔다면 어떤 변수가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정우가 수그러들었던 살의를 다시 키우자 그의 동공이 예성과 마찬가지로 파랗게 물들었다.
* * *
오후 8시 42분.
두 사람은 강남역으로 향하는 서초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대법원을 떠나온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나가는 시점이고, 아침에 ‘성명문’이 등장한 뒤로부터는 13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다.
13시간…….
이 시간 동안 다른 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일단 휴대폰은 여전히 잘 작동했다.
통화 신호가 뜨는 건 물론이고 인터넷도 된다.
강남 일대 기지국과 와이파이 공유기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터넷에 접속해 보면 떡하니 네이버가 떴다.
이건 네이버의 서버가 모셔져 있는 춘천 데이터 센터가 아직 안전하다는 의미.
만에 하나 어느 날 인터넷을 켰는데 네이버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땐 춘천이 함락됐다고 여겨도 될 것이다.
‘역시 하루 만에 나라가 초토화될 것이라 예상한 건 좀 무리였나.’
정우는 사실 괴물보다는 사람들이 더 문제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진입로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래 봐야 아직은 ‘동’이나 ‘구’ 단위의 지역을 점거하는 수준.
그러나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이들이 정수를 모은답시고 서로를 공격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괴물과 사람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음.’
정우는 네이버 메인에 올라온 기사들을 하나씩 눌러 봤다.
그래도 오전 중엔 여러 사건 소식 사이에 일반적인 기사들이 섞여 있었다.
연예계 소식 일반이나 업체들의 보도 자료 같은 유형.
이런 기사들은 대개 예약 송고를 걸어 두기에, 매체 쪽에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게시된다.
그러다가 시간대가 오후로 바뀌면서부터 언론이 긴장한 티를 팍 냈다.
잡음이 싹 사라지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종말적 사태에 대해서만 다뤘다.
괴물 출현, 범법 행위 폭증, 능력자 또는 각성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등장…….
신기한 건, 이 와중에도 칼럼 수준의 기획 기사가 올라온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이때까진 일부 언론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다음엔 오후 5시.
이때를 기점으로, 각지의 소식을 전해 주던 기사가 끊기고 정부발 보도 자료가 줄을 이었다.
‘미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각자 타이틀만 다르지, 모든 보도 자료의 요지가 ‘구원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형식적으로라도 국민들에게 권하던 ‘안전 수칙’ 같은 건 이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네이버 메인 전체를 구원자 수배 용도로만 쓰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도 연락을 안 한 건 아닐 테고.’
문자를 통한 정부의 구원자 수배가 시작된 게 오늘 오후 2시 30분이다.
벌써 여섯 시간이나 더 지났으니, 중하위권 구원자 중에서 누군가 연락을 했을 법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구원자를 찾고 있다는 건, 정부가 원하던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일 터.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은 폐쇄 권능을 가지고 있어도 진입로를 닫을 수가 없는데.’
모든 이가 ‘구원자=해법’이라는 공식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구원자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잘 안다.
지금 이 세계에선 구원자와 조우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다.
대다수 구원자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는 상황이니까.
|박정우 님의 소속 지역 내 순위는 ‘2’입니다.
|폐쇄 권능 보유자.
현재 정수는 사자들과 예성에게서 흡수한 것을 포함해 6,843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2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강남역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살인…… 그리고 의사 수배.
“일행이 하나 더 늘어도 괜찮겠죠?”
정우가 대뜸 묻자 조용히 걷기만 하던 선웅이 뒤를 돌아봤다.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의사를 한 명 구해서 데리고 다닐까 싶어요. 마땅한 사람이 여태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렇군요.”
선웅은 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가능할까?
이 피 칠갑을 한 방주에 의사를 태운다는 것이.
‘의사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존재인데, 정우 씨와 양립을 하려 들지…….’
물론 또 모르는 일이다.
의사 이전에 사람이 아니던가. 인간의 생존 욕구는 어마어마하다.
선웅 자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긴 어딘데, 불을 켜 두고 있을까요.”
한동안 말없이 걷던 정우가 저 멀리 우측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다.
수십 층에 이르는 대형 빌딩이었는데, 건물 전체에서 조명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 안에 실제로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자신감인 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근처 다른 건물들은 사람이 있어도 없는 척하기 위해 불을 전부 꺼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우의 물음에 선웅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음…… 대성전자 사옥 같은데요. 최근에 건물을 팔았다고 듣긴 했는데, 아직 대성 쪽에서 쓰고 있을 겁니다. 이것저것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아.”
정우가 대충 이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
여기가 망하면 우리나라도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위용이 대단한 기업이다.
그리고 우린 아직 건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사옥에 불을 켜 두고 있다.
덕분에 이 지역에도 진입로가 나타난다면 청소부들의 첫 번째 타깃은 저 건물이 될 것이다.
좀 더 가까이 가자 말끔한 로비가 나타났다.
무려 안내 직원과 정장 차림의 경호 인력까지 배치되어 있었고 말이다.
‘강남이면 온갖 부류의 사람이 다 모여 있지 않았을까? 여기가 다른 곳보다 더하면 모를까, 덜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여태 거쳐 온 지역인 중앙동, 행운동 그리고 대법원 근방.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딜 가든 살인자들이 돌아다녔다.
유동 인구가 어마어마한 강남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등대처럼 홀로 불을 켜 둔 건물이 멀쩡하게 남아 있다?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정수 욕심이 있는 자들이 이런 곳에 와 보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한 블록만 더 가면 강남역이야……. 뚜껑을 열어 보면 알 수 있겠지.’
발치의 패스파인더는 여전히 강남역 방향에 대량의 정수가 모여 있다고 알려 오고 있었다.
정우는 대성전자 사옥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강남역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에 선웅이 물었다.
“저긴 가 보시지 않고요?”
그 역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건물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정우의 최우선 목표는 ‘정수 수집’이었다.
“저 건물보다 강남역 쪽에 정수가 더 많아요. 다른 녀석이 선수를 치기 전에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구원자들이 모여 있는 ‘최초의 채널’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부터 자꾸 눈에 밟히는 채팅이 올라온 탓이었다.
[39] 무장: 혹시 강남역 근처에 계신 분 있으십니까?벌써 세 번째 물어 오는 중이다.
그러자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던 채널이 차츰 조용해졌다.
일반적으로 구원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밝히지 않는다.
자칫하면 채팅을 보고 찾아온 경쟁자에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4] 빛: 무슨 일이신데요.평소 채널 점유율이 꽤 높던 24위 ‘빛’이 되물었고, 이어진 ‘무장’의 대답엔 정우마저 놀랐다.
[39] 무장: 죽여야 할 놈들이 있는데, 제가 삼키기엔 좀 버거워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