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90
294화. 붕괴(2)
* * *
삐빅, 삐빅.
어디선가 전자시계의 알람이 들려온다.
민구는 이것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아차렸다.
“…….”
아직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먼저 떠올렸다.
자신이 한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는 것 말이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흐릿한 형태지만 분명 얼마 전까지 실재했던 장면.
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무언가였다.
거대한 잿빛 실루엣, 기괴한 소리.
그리고 아주 끔찍한…….
“……!”
홱.
민구는 궤멸자의 모습을 재현해 내고서 즉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고, 그는 자신의 몸에 충분한 힘이 돌아왔음을 깨닫자마자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제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그러자.
삐빅, 삐빅, 삑.
전자시계의 알람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서 들려왔다.
이에 민구는 그리로 고개를 돌렸고, 곧 보게 됐다.
시계를 찬 마차 관리자 전태천의 몸뚱어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중인 박정우를 말이다.
“이게 무슨…….”
민구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순간, 정우에게 끌려가던 전태천의 뒤통수가 땅바닥의 돌부리에 걸렸다.
퍼억!
두개골이 깨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으나 전태천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고, 정우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쯤 와서야 민구는 깨달았다.
마차를 돌보던 남자가 죽었음을.
퍽.
전태천의 머리가 또 한 번 크게 들썩인다.
그러더니 정우가 손잡이처럼 사용하던 전태천의 발목에서 손을 뗐다.
다음엔 주변을 슬쩍 돌아보곤 다시 민구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저벅, 저벅.
“……?”
아직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건가?
민구는 정우의 발치를 보고서 눈을 껌뻑였다.
아들놈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그곳에서 푸른 파문 같은 게 일었기 때문이다.
8일 차 선두 특혜 탓에 민구는 정우의 정수량을 읽을 수 없었고, 따라서 자신이 의식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냐? 아까 그 괴물은?”
민구가 궤멸자를 떠올리며 정우에게 묻자 상대가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라졌죠.”
“사라져?”
조금 모호한 대답에 민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안심이 됐다.
적어도 박정우가 여전히 존대를 해 오고 있었으니까.
‘그냥 기분 탓이었나?’
왜인지 몰라도 눈앞의 사내가 이전의 박정우와는 또 다른 존재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도 일단 이쪽에게 존대를 해 오는 걸 보면…….
슥.
그사이 정우가 또 한 걸음을 내디뎠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땅바닥에서 푸른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정우의 눈동자 안에서 푸르스름한 이채가 맴돌았다.
정수 활성화로 인한 안광과는 또 다른 무언가였다.
“……!”
민구는 이를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원초적, 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아주 깊고 짙은 위화감.
“넌…… 누구지?”
“…….”
“정우가 완전히 변해 버린 거냐? 아니면 다른 놈이 내 아들 행세를 하는 중인 거냐? 내 아들은 어디에 있지?”
민구의 질문을 받은 정우는 잠시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전 구원자입니다.”
그러곤 곧이어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박정우이기도 하죠. 당신이 원한다면.”
* * *
오전 9시 4분.
민구는 황색 들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므라가 시체들을 끌어다가 적절한 위치에 놓아두는 걸 보면서 말이다.
저건 정우의 지시였다.
이전처럼 시체들을 정수로 지우지 않고 썩어서 양분이라도 되도록 바닥에 놔두겠다는 거다.
덕분에 민구는 전태천과 위양거, 그리고 미처 통성명조차 하지 못한 의사 2인방의 몸뚱어리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걸 봐야만 했다.
“눈이라도 감겨 주지그래.”
위양거의 눈꺼풀이 열려 있는 걸 본 민구가 한마디 하자 수십 미터 밖에서 이를 용케 들은 아므라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후두둑.
그가 양손으로 나눠서 쥐고 있던 시체의 발목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마치 매듭이 풀린 그물처럼 말이다.
“…….”
민구는 아므라가 시체들 사이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위양거의 얼굴을 찾아내는 걸 지켜봤다.
“……고생했소.”
아므라가 짤막한 작별 인사와 함께 위양거의 눈두덩에 손을 갖다 댄다.
그러곤 바닥에 흩어진 발목들을 다시 수습해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너무 허망한 죽음 아니냐? 넌 거의 무적이었잖아. 왜 저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거지?”
민구가 점점 멀어지는 아므라의 뒷모습에 시선을 붙인 채 혼잣말처럼 이야기하자 뒤편에서부터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거의, 무적이었기 때문이죠. 더 강했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도.”
다름 아닌 박정우였다.
“그래서 지금 그 꼴이 됐다는 거냐.”
비로소 민구가 뒤를 돌아본다.
아들이었던 존재, 박정우에게선 여전히 특유의 위화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 녀석이 서 있는 자리 근처에선 아주 기묘한 기운이 흐르기까지 했다.
이젠 진입로를 통해 넘어온 침입자들보다 정우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
“이 꼴이 된 덕분에 저는 이제 패배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요.”
“…….”
민구의 표정이 대번에 거북하게 바뀐다.
정우가 발음한 ‘아버지’란 단어가 일종의 립서비스라는 걸 아는 탓이었다.
“문제는.”
유력한 행성 구원자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궤멸자를 상대하지 못했다는 거죠. 앞으로 기회가 몇 번 없을 겁니다.”
“기회?”
“이곳의 모든 진입로를 닫을 때까지도 해답을 찾지 못하신다면 아버지를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남쪽에서부터 한 무리가 날쌘 기척을 내며 접근해 왔다.
파아아앗!
기차의 보안 담당자들인 류채원, 진소룡, 이태령이었다.
“일은 모두 마쳤나?”
정우가 기다렸다는 듯 묻자 1호 차 보안 담당 진소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모든 물품을 항목별로 정렬하고 사람들도…… 말씀하신 대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란 민간인 시체 더미를 의미한다.
지금 저 앞에 보이는 풍경처럼 들판에 시체들을 깔아 놨다는 의미다.
이에 정우가 5호 차 보안 담당 이태령에게 업혀 있는 3호 차 담당 류채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우와 기차에서 처음 조우했을 당시 다리를 꿰뚫려 사실상 앉은뱅이가 된 상태.
기차를 지키던 때야 다리를 쓰기 어려워도 제 기능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으나, 이동 수단이 차량으로 한정된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
류채원도 이를 모르지 않았기에 정우의 시선을 받고서 얼굴을 굳혔고, 이건 나머지 보안 담당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저희는 새 사람들을 찾아야겠군요.”
짧은 정적조차 큰 부담이었는지 1호 차 보안 담당 진소룡이 얼른 운을 뗐다.
꼬리 칸에서부터 1호 차 앞까지 뚫고 들어온 정우를 만났을 당시와는 전혀 다른 기세.
당시 그가 정우 앞에서 위축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아주 강력한 의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기차의 보안 담당자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차도 없고, 지켜야 할 대상도 없다. 버팀목을 다 잃어버린 상태.
그리고 이 말인즉슨…….
“안 됩니다. 저희마저 죽어 버리면 이 나라는 아예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배드 엔딩’을 직감한 5호 차 담당 이태령이 정우를 향해 사정하듯 말했다.
여전히 류채원을 업은 채로 말이다.
그러자 드디어 정우가 입을 열었다.
“이 지역에 사람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이곳에 성역을 사용하는 건 무의미해. 좀 더 인력이 보존된 곳에 투자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
“내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야. 네놈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됐군. 반드시 갚겠다.”
구원자가 ‘빚을 갚겠다.’라고 한다는 건 다른 의미가 아닐 것이다.
너희들을 양분으로 삼아서 이 행성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걸 과연 대의라고 할 수 있을까?
보안 담당자들은 이 상황을 납득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씨발, 네가 죽었으면…… 그때 네가 죽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끝내 ‘앉은뱅이’ 류채원이 눈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이를 드러냈다.
홧.
자신을 업은 이태령의 어깨 너머로 팔을 휘두르는 류채원.
“아……!”
동료가 도화선을 당겨 버렸다는 걸 직감한 태령과 소룡이 탄식을 흘렸고, 거의 동시에 일이 벌어졌다.
촤아아앗!
땅 밑에서부터 뭔가 솟는다 싶더니 순식간에 사위가 푸른 그물 같은 것으로 가득 차 버린 것이다.
“으, 으……?”
태령이 반사적으로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뺨을 일그러뜨린다.
자세히 보니 그가 그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밀조밀하게 맞물린 가시들이었다.
땅에서 솟은 자그마한 정수 기둥들에서부터 가시가 증식되어서 사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체감상 총알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기둥이 솟으며 가시를 흩뿌린 속도 말이다.
심지어.
‘마, 맙소사.’
태령 자신과 맞은편에 서 있던 소룡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적어도 이번 공격의 대상은.
“…….”
스르륵.
태령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류채원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그러더니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떨어져 나갔다.
스릇, 슷, 스슷.
태령의 등 뒤에서부터 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저게 대체 무슨 소린지 결코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상상이 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사위가 촘촘한 가시망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리로 떨어져 내린 채원의 시체가 어떻게 됐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파팟, 팟, 팟!
이윽고 채원이 품고 있던 정수가 구체 형태로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때맞춰 정우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
다시 찾아온 정적.
그러다 마침내 소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나라를 완전히 포기하실 겁니까? 꼭 성역이 없더라도 재건 의지가 있는 자를 남긴다면…….”
“아므라가 원한다면 그를 남길 생각이다.”
“아므라……?”
소룡의 시선이 어느덧 시체 처리를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인 몽골족 사내에게 닿는다.
“의무감이라면 기차를 지켜 온 저희가 더 강할 겁니다. 저희 대신 저 사람을 남기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에 정우가 아므라 쪽을 슬쩍 쳐다봤다.
“의무감은 저 녀석도 너희 못지않아. 차이가 있다면 너희의 정수량이 훨씬 많다는 점이겠지.”
그러자 이번엔 태령이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저희가 가진 정수는.”
“전량 박민구에게 먹일 거다. 그리고 궤멸자와 다시 싸우게 해야지. 오늘 안에 박민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놈도 죽인다.”
“…….”
본인의 아버지마저 죽일 예정이라는 말에 두 사내는 감히 목숨을 다시 구걸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 성역은.”
“성역은 미국에서 사용한다.”
“……그렇군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정우의 답변에 두 사내는 더 따질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많은 것들이 다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부터 유력한 행성 구원자였고, 과정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종’을 꺾은 자가 아닌가. 이쪽보단 무조건적으로 현명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사가 필요한 건 여전하지 않습니까? 오늘만이라도 사람을 더 수배해 보는 게 좋을 텐데요.”
5호 차 담당 이태령의 마지막 질문.
정우의 약점인 ‘약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에 정우는 해가 높이 뜨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봤다.
“진입로만을 쫓아다니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가능한 빠르게 이곳을 정리하고 파견지에서 의사를 수배할 거다.”
그리고 그 파견지는 높은 확률로 미국이 될 거다.
타 지역과 달리 각성자들이 빠르게 결집했다고 하니 생존 중인 민간인의 수도 훨씬 많을 터.
다만 문제라면 파견되는 지점을 예상할 수 없다는 점.
이미 궤멸자에게 말끔하게 정리된 지역에 떨어지게 된다면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이 없을 테니까.
“더 남길 말은 없나?”
정우가 ‘최후’를 예고하자 잠시 진정되었던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무의미한 대화를 더 나눠 봐야 행성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고생했다.”
꽉 닫힌 두 사내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본 정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직접 손을 뻗었다.
푸아아악……!
두 존재가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