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92
296화. 붕괴(4)
* * *
「아버님? 아버님!」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왜인지 감이 멀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와닿지 않았다.
마치 벽 너머에서 간신히 새어 나온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날 왜 부르는 걸까.
민구는 의구심이 생겼으면서도 굳이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좀 쉬고 싶어서였다.
어마어마한 피로감이 온몸을…….
‘몸……?’
비로소 자신에게 ‘몸’이란 게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민구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아버님!”
아까 그 소리가 한층 크게 들려오면서 닫혀 있던 시야가 확 트였다.
“윽.”
이마 안쪽이 찌릿해질 정도의 강한 빛.
민구는 너무 눈이 부셔서 이내 눈꺼풀을 꽉 닫았다.
그럼에도 그가 보게 된 어둠은 조금 전 자신이 머물던 공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느낌이었다.
‘뭐였지? 의식을 잃었나?’
민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으면서도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여태 외부에서 들려온 소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았는가.
의식을 잃었던 게 아니다. 의식이 다른 곳에 격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민구가 눈을 뜬 것처럼 보이자 문제의 목소리가 조금 안도한 목소리를 냈다.
이에 민구는 소리가 흘러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 아므라의 얼굴을 보게 됐다.
인간, 35세 남성. 몽골족, 차가운 인상.
하지만 아무리 냉혈한이라고 해도 박정우에 비할 바는 못 된다.
“…….”
민구는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므라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정우는?”
“어…… 저쪽에 있습니다.”
슥.
아므라가 손가락을 들어 민구의 뒤편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때.
「소속 지역 내 모든 진입로가 폐쇄되었습니다!」
| 지금부터 중국의 폐쇄 권능자 15개체가 전이 결정을 합니다.
| 더는 본 지역에서 진입로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 더는 본 지역이 파견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지 않습니다.
“뭣……?”
민구를 포함한 지역 내 모두의 눈앞에 ‘클리어’ 안내 문구가 나타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민구가 경황없는 얼굴로 묻자 아므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조금 전 아버님께서 마지막 궤멸자를 쓰러뜨리셨습니다. 그사이 정우 씨가 진입로를 닫았고요.”
“내가 궤멸자를 쓰러뜨렸다고?”
“……예.”
“…….”
민구는 아므라의 말을 전해 듣고 나서야 허공의 어딘가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야 조금씩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어서였다.
갈가리 찢겨 나가던 궤멸자의 신체, 그리고 마찬가지로 산산이 조각나던 이쪽의 의식.
싸우는 내내 처참한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아까부터 목에 멍이 든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착각이 아니었던 거다.
“그러면.”
스윽.
이윽고 민구의 몸이 뒤편으로 돌아갔다.
아므라가 가리킨 방향, 박정우가 있다는 곳을 쳐다보기 위해서였다.
이때 마침 정우는 중국의 마지막 진입로가 남기고 간 ‘단말기’와 접촉 중이었다.
팟.
공중에 홀로 떠 있는 보랏빛 단말기에 그가 손을 올리자 무형의 파동이 일대를 쓸듯이 퍼져 나갔고, 곧 눈앞에 또 다른 문구가 나타났다.
[진입로를 폐쇄했습니다!]| 더는 이 지역에 진입로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방주 기능이 활성화됐습니다!]| 현재 241/320 개체를 탑승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241?’
정우는 방주의 좌석 현황을 보고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새 남양주의 성역 인구가 크게 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쪽이 계속해서 방주 좌석을 조달하자 새 인원을 들이고 있는 것일 터.
선웅, 용헌, 동훈, 중성……. 이름 몇 개가 얼핏 떠오른다.
‘그럼 남은 자리는 대략 80개인가?’
아직 성역 건설 횟수가 하나 남아 있다.
궤멸자에게 민간인을 다 잃은 탓에 이곳 중국에서 성역을 쓸 수 없게 돼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성역 건설 예정지는 미국.
타 지역에 비해 민간인 생존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인 이상, 방주 좌석이 더 줄어들면 곤란해질 여지가 있었다.
‘남양주의 좌석 사용을 금지해야 해. 저쪽에 메시지라도 전달할 방법이 없나?’
이건 평가관에게 던진 질문이었으나 매번 그렇듯 녀석은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에 대해선 답변조차 주지 않았다.
‘…….’
정우는 평가관의 기척에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성역이 아니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으니까.
팟.
정우가 본인의 의식 속에서 눈을 떼어 내자 곧바로 다음 문구가 시야에 나타났다.
「전이- 잔류와 파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십시오.」
|잔류
소속 지역에 잔류합니다. 잔류 기간 동안 지역 내 모든 정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 전이 재선택이 가능합니다.
|파견
진입로가 남은 타 지역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파견된 지역의 진입로가 모두 폐쇄되기 전까지는 전이 재선택이 불가능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전이 선택지.
잔류, 아니면 파견이다.
물론 이번의 경우 정우에게 잔류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만.
“전이……? 나는 그럼 러시아 파견을 선택하면 되는 거냐?”
저 멀리서 도움을 요청해 오고 있는 중년 사내의 경우는 좀 달랐다.
박민구, 64세 남성. 중국의 2위 구원자.
정수 보유량도 87억 개나 되어 사실상 ‘초월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박민구는 여전히 나약한 인간이다.
일반적인 초월자들과 달리 서서히 자신을 내려놓으며 성장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우가 민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오히려 그 옆에 서 있던 아므라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우라면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막상 정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는 그 누구의 예상과도 달랐다.
“아버지는 잔류를 선택하세요.”
“뭐? 저번엔…….”
“잔류를 선택하고, 이 녀석을 이용해서 러시아로 직접 넘어가십시오. 그럼 나중에 파견을 선택해도 무작위 이동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정우가 말한 ‘녀석’이란 다름 아닌 냄새였다.
호랑이 구원자 정수 총량 1억 3천만 개. 그러나 정수량이 부족해 중국의 순위권자엔 끝내 들지 못했다.
“아버지 혼자선 러시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넓은 지역이라 승용물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민구가 의식을 잃을 때면 저번처럼 냄새가 그를 엎고 전장을 이탈할 수 있을 거다.
정우로선 일종의 보험을 붙여 두려는 거였다.
“진심이냐? 그러니까, 파견 대신 잔류를 선택한 다음 냄새와 함께 러시아로 넘어가라고?”
민구 입장에선 홀로 러시아에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선택지.
그러나 러시아행이 이 행성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잘 알았기에 우려 또한 감출 수 없었다.
현재 위치는 중국의 북부 끝자락.
따라서 러시아로 진입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터였지만 그래도 시간 낭비가 발생하는 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예, 러시아로 빠르게 파견을 간다고 한들 정수를 그대로 헌납하게 된다면 의미가 없겠죠. 보조가 필요할 겁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자 아므라가 무거운 침을 삼키며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뭐지?”
“정우 씨, 그럼 저, 저는…… 어디로 갑니까?”
아므라. 정수 보유량 1억 2천만 개.
이제 더는 구원자가 정수을 읽어 낼 수 없다지만 그는 정우라면 자신의 정수 총량을 한 자리까지 다 외우고 있으리란 걸 잘 알았다.
즉, 러시아로 가는 민구에게 아므라의 정수를 여비로 줄 법도 하다는 거다.
이에 정우가 주변을 슥 훑어보더니 남쪽을 가리켰다.
“종이 사용하던 징주 철로가 있는 지역으로 가라. 기차에 타려다가 시간을 맞추지 못한 녀석들이 아직 생존 중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말씀인즉슨…….”
“가. 재주껏 살아남아라. 네가 만약 죽는다면 잔류를 선택한 다른 순위권자들에게 먹히는 경우겠지. 그렇게 된다면 언젠간 날 또다시 만나게 될 거다.”
물론 산 채가 아니라 정수가 되어 다시 만날 거란 이야기였다.
어쨌든 당장 이 자리에선 살려 보내겠다는 뜻이었기에 아므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 그럼 제가 공동체를 만들어서 정착지를 세워도 되는 겁니까?”
“그건 네 자유다. 이제 더는 내 시간을 빼앗지 마. 대화는 여기까지다.”
정우가 이 말과 함께 정말 대화를 끝맺고서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므라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쿵!
큰절을 하는 거였다.
“그간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타지에서도 꼭 평안하십시오!”
몽골족의 공격대 소속으로 박정우와 처음 마주치던 때부터 검은 바닷물, 관찰차, 탑과의 거래까지……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 역시 정우 못지않게 감정이 메말라 버린 자였으나, 가능하다면 눈물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격의 눈물 말이다.
이 행성의 유력한 구원자.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종의 범주를 벗어나 버린 존재.
그런 존재의 여정을 일부나마 함께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그런 자가 자신을 살려서 보내 주기까지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경이로웠다.
“…….”
그러나 정우는 눈앞의 정수 덩어리가 격렬하게 일렁이고 있음을 알면서도 다시는 그쪽으로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대신에.
“아버지는 제가 지시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전 이제 미국으로 갈 겁니다.”
민구에게 짤막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지금? 지금 바로 가겠다는 이야기냐?”
“예.”
실제로 정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의 민구를 뒤로하고서 파견 선택을 확정 중이었다.
‘파견 선택. 미국.’
|파견- 미국
진입로가 남은 타 지역 ‘미국’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파견된 지역의 진입로가 모두 폐쇄되기 전까지는 전이 재선택이 불가능합니다.
「확실합니까? 이 결정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 잔류를 선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차 확인하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에 정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 새로운 안내가 그의 최종 결정을 확인해 줬다.
「지역 ‘중국’의 1위 구원자 ‘박정우’님께서 파견을 선택했습니다.」
그러고는.
쏴아아아아앗!
새하얀 빛이 정우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엇?”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던 아므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다.
근방의 대지가 새하얗게 물들고 있어서였다.
중국을 평정한 최강자가 이 땅을 떠나는 장면.
“어…….”
이때만큼은 민구도 이게 아들과의 작별 순간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저게 파견이야?”
도저히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빛이 강해졌다.
민구는 어쩔 수 없이 양손으로 눈가를 가렸고, 곧이어 까마득한 하늘 저편 어딘가에서 굵직한 무언가가 쏘아져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쿠아아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아마도 정우를 감싼 것과 마찬가지로 빛줄기였을 거다.
“헉.”
눈이 부신 건 아므라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잠시 뒤 사위가 갑자기 고요해진 뒤에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스윽.
아까 그 빛 덩어리와 정체불명의 진동이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제 주변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평야였고, 심지어 바닥에 돋아나 있던 풀엔 눌린 자국조차 없었다.
“저, 정우 씨?”
그가 맥없는 목소리를 냈으나 텅 빈 공간에서 답변이 돌아올 리 없었다.
“…….”
민구도 조금 전까지 아들이 서 있던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녀석이 정말 가 버린 건가? 미국으로?”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아므라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맥없이 발음했다.
“예, 지금쯤 미국에 도착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