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93
297화. 절대자 강림(1)
“저희가 좀 지각했나 보군요.”
히스패닉계의 덩치, 로이 헤르난데즈가 운전석 옆 유리로 바깥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시애틀 도심부로 진입하는 도로 외곽에 차량 여럿이 주차되어 있는 탓이었다.
앞서 여길 지나간 요원들이 시애틀의 통제에 따라 차량을 놔두고 도보 이동을 한 흔적.
이에 보조석의 또 다른 사내가 손목시계를 힐끗 봤다.
깡마른 몸에 진회색 머리칼, 짐승처럼 사나운 눈빛.
오리건 주 치안국 ‘가디언’의 서열 2위 제레미 킹이었다.
“어차피 다음 파견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약속 시간이라는 건 의미 없지.”
현재 시각, 오후 3시 16분.
그리고 연합 측에서 오리건 주의 요원들에게 권고한 집결 시간은 오후 3시였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지각을 한 것은 맞는 거다.
“……그렇긴 합니다만.”
로이는 평소 룰을 중요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제레미의 말에 마지못해 응했다.
그러곤 핸들을 쥔 손의 검지로 전방을 가리켰다.
“검문소입니다.”
이 말에 제레미의 고개가 파트너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자 곧 그의 시야에 노란 색깔의 플라스틱 바리케이드와 경광봉을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여긴 머리가 좀 있는 놈들이 운영하는군.”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검문소를 본 제레미가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적어도 시애틀은 허례허식과 거리가 먼 도시라는 걸 바로 알아챈 탓이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오는 각성자들은 각 주에서 파견자 사냥을 위해 선별한 수준급 요원이다.
검문소를 지나려 하는 방문자 각각이 도시 하나 정돈 간단히 박살 낼 수 있는 괴물들이라는 의미.
그러니 검문소에 아무리 인력을 배치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이 지점부터는 차량 이동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바리케이드와 방향 안내를 해 줄 최소한의 인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요원님들, 잠시 신분증 좀 확인하겠습니다.”
로이가 검문소 옆쪽으로 천천히 차를 대자 검문소 근무자가 경광봉을 늘어뜨리며 다가왔다.
“총 2인. 오리건에서 왔소.”
“예, 남부 도로는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고생 좀 하셨겠군요.”
근무자가 꽤 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떤다.
이미 이곳을 지나간 요원의 숫자가 적지 않음이 엿보이는 순간.
“그렇더군요. 더 확인할 건 없습니까?”
무려 8일 차 파견자와의 조우를 앞둔 날이다.
로이는 검문소 근무자 따위와 근황이나 주고받고 싶진 않았기에 건조한 어투로 대화를 끊었다.
그러자 상대가 고개를 살짝 틀어 보조석의 제레미를 잠깐 훑더니 이내 뒤로 물러났다.
“예, 이대로 쭉 직진하신 뒤에 첫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십시오. 그러면 랜드마크를 하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차량 진입을 제한하고 있어서 이곳에서부턴 도보로 이동하셔야 하고요.”
덜컥.
근무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레미가 차 문을 밀어내며 아스팔트 도로 위에 발을 디뎠다.
“자리를 빨리 비켜 주는 게 좋겠군. 보아하니 지각생이 우리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이 말과 함께 검문소 맞은편 도로의 끝자락에서부터 차량 엔진음이 들려왔다.
다른 도시의 요원들이 앞다퉈 ‘체크메이트’ 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는 거다.
이를 본 로이는 운전석에서 내리며 검문소 근무자에게 물었다.
“지금 현장에 몇 명이나 와 있습니까?”
“저분들을 제외하고 물으시는 거지요?”
근무자가 그새 50여 미터까지 다가온 차량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그렇소.”
“아, 그럼 26명입니다.”
“스물여섯?”
마지막의 다소 흥분한 음성은 놀랍게도 제레미가 낸 것이었다.
“이미 저 안쪽에 26명이나 모여 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아, 26명은 검문소 명부에 적힌 인원만 말씀을 드린 것이고 시애틀 요원까지 포함하면 좀 더 많아질 겁니다.”
근무자의 대답에 두 요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26이란 숫자는 여길 먼저 지나간 인원만 센 것이고, 실제론 지금도 저 뒤쪽에 차량들이 줄을 서고 있지 않은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요원이 모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연합의 지침보다 더 많은 요원을 파견한 주가 있을 것이다.
‘낭패군. 파견자가 도착할 때쯤이면 3, 40명쯤 모여 있게 되겠어.’
가디언 본부로부터 특명을 받고 온 제레미는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두 차례 참여해 본 ‘파견자 사냥’의 경우 참가자 총원은 보통 20명이 채 안 됐다.
게다가 실제로 파견자 추격에 성공해 전투에 임하게 되는 건 대개 3, 4인.
하지만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정말로 8일 차 파견자가 표식 밑에서 나타난다면 수십 명에 달하는 각 주의 수준급 요원들이 전부 경쟁자가 되는 것이다.
“가시죠.”
어느새 검문소 뒤편의 도로로 넘어간 로이가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이에 제레미는 등 뒤의 차량 대열을 흘깃 본 뒤 빠르게 걸음을 뗐다.
* * *
고오오오…….
높게 솟은 고층 빌딩들 사이로 바람이 몸을 비트는 소리가 제법 웅장하게 난다.
로이는 예상보다 훨씬 멀쩡해 보이는 시애틀 중심부의 전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곳에서의 사냥에도 참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4일 차 파견자였다면 상당히 강했을 텐데 건물 손상이 전혀 없어 보이는군요.”
“여기서 파견자를 사냥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겠지. 놈들과 요원들이 맞닥뜨리는 건 대부분 소환 지점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곳이야.”
그리고 그런 곳은 대개 처참한 모습으로 초토화된다.
제레미는 불과 이틀 전에 참여했던 파견자 사냥을 떠올렸다.
캘리포니아 주의 새크라멘토 서부.
이번과 마찬가지로 도심지에 소환됐던 그 녀석은 운이 나쁘게도 도시 외곽에 닿기도 전에 새크라멘토를 담당하던 요원과 맞닥뜨렸다.
하지만 즉시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
요원이 선제공격을 했음에도 파견자가 반격 없이 도주부터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든 생각이지만 민간인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놈은 사력을 다해 캘리포니아 북부로 도망쳤고, 덕분에 제보를 받고 캘리포니아 방향으로 남하하던 오리건 주의 요원들과 마주쳤다.
이윽고 벌어진 4 대 1의 혈투.
제레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다. 넷이나 되는 상대로 기세가 전혀 죽지 않던 그 파견자의 모습 말이다.
실제로도 놈이 보유한 화력은 막강했고, 요원의 머릿수가 하나만 더 적었더라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어떻게 보면 놈이 죽고 이쪽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운.
만약 당시 현장에 있던 요원이 셋뿐이어서 살아남은 쪽이 파견자가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새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습격을 받게 된 파견자는 전에 없이 격분한 상태였을 거고, 마침 4인이나 되는 정예 요원의 힘까지 흡수했으니 눈에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지워 나갔을 거다.
살아 있는 재앙이 되는 셈.
‘파견자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녀석들이야. 아군으로 들일 게 아닌 이상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제레미가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옆에서 걷던 로이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저게 랜드마크군요.”
이에 제레미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곧 수십 층에 이르는 육중한 건물, 쉐라톤 호텔을 보게 됐다.
“파견 기념물을 하나 남겨 놓고 갔었군.”
제레미가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호텔 건물이 사선으로 잘려 나가서 사실상 반 토막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저건 전투의 흔적이 아니라 ‘힘의 과시’였다. 말 그대로 이곳에 강자가 왔다 갔음을 모두에게 보이려고 기념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에 나타났던 파견자는 새크라멘토의 그 녀석과 달리 꽤 오만한 성격이었는 듯.
“4일 차에 저 정도였다는 건 대체…….”
로이는 감탄한 눈빛으로 호텔 건물을 바라봤다.
물론 이곳에 왔던 파견자는 결국 죽었고, 따라서 저건 놈의 마지막 유산인 셈이었다.
“인상적이야. 만약 저 녀석이 사냥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 있었겠지. 다른 파견자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제레미는 이렇게 감상을 남긴 뒤 ‘랜드마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오늘 도착하는 녀석은 저런 기념물조차 남길 수 없을 거다.”
“그렇겠죠.”
저벅, 저벅.
2, 3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토막 난 쉐라톤 호텔의 로비 전경이 시야에 들어올 때쯤 호텔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던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표식’이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새하얀 표식이 지상에서부터 약 20미터 떨어진 지점에 홀로 떠 있었던 것이다.
“…….”
두 사람 모두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서 표식을 멍하니 바라봤다.
연합의 추측에 따르면 저건 지구가 내려 준 경고 또는 특혜.
게다가 표식이 나타난 자리도 공교롭게 지난 4일 차의 파견자가 최초 등장했던 곳이 아닌가.
저 표식이 어떤 의미이든 간에 이곳에 8일 차 파견자가 나타나리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군요.”
로이가 겁이 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애써 씩 웃는 순간.
파아아앗!
전방에서부터 어떤 여성이 시퍼런 빛을 뿜어내며 빠르게 접근해 왔다.
“……!”
이에 로이가 눈을 파랗게 밝히며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자 제레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그만둬. 아군이다.”
아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다른 요원들은 잠재적 적군이란 이야기도 될 것이다.
파앗.
제레미의 말을 들은 로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투기를 거뒀고, 곧이어 제레미가 아군이라고 일컬은 여자가 두 사람의 앞에 우뚝 섰다.
스아아앗…….
신체 강화로 인해 파랗게 빛나는 피부,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안광.
얼마나 많은 정수를 담고 있는지 여자가 고개를 살짝 움직일 때마다 시퍼런 잔광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제레미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여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이긴요. 이틀 전에 보고선.”
이 여자의 이름은 엠마 화이트, 37세.
오리건 주 치안국 ‘가디언’ 서열 3위.
이틀 전에 발동된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의 파견자 사냥에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소방관 출신이라 체격이 상당히 좋은 탓에 정수로 인한 빛을 뿜고 있는 지금은 덩치깨나 하는 로이보다도 더 위압감이 있었다.
“이쪽은?”
이어서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로이에게 닿았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가디언 요원이긴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로이의 순위가 엠마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디언 넘버 6, 로이 헤르난데즈입니다.”
하급자인 로이가 먼저 풀네임을 밝혔으나, 엠마는 이에 화답하지 않고 표식 밑에 한가득 모여 있는 다른 요원들을 가리켰다.
“괜찮겠어요? 오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닌데.”
서열 6위가 이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였다.
“…….”
평소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할 멘트였겠으나 적어도 오늘은 달랐다.
“죄송합니다. 급파가 가능한 대상을 추리다 보니 제가…….”
그러자 엠마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푸른 안광을 거뒀다.
“농담이에요. 그래도 넘버 6이면 보호막 정도는 튼튼히 유지할 수 있겠죠.”
“보호막이라니요?”
“전혀 모르고 오진 않았을 텐데? 파견자의 목이 떨어지면 바로 보호막을 펼쳐서 우리 셋을 보호해야죠. 언제 어디서 뭐가 날아들지 몰라. 우리 숫자가 제일 적거든요.”
“……맙소사.”
로이는 비로소 자신이 조금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을 보고서 정수 쟁탈전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전면전을 위해 투입됐던 것이다.
“파견자가 죽으면 내가 그 자리로 뛰어들 거야. 엄호는 엠마가 해 줄 거고, 자넨 보호막만 잘 유지하고 있으면 돼. 그리고 나머지 일은…….”
신의 뜻에 달렸다, 라는 제레미의 뒷말은 생략됐다.
그가 대사를 미처 맺기도 전에 저편 허공에 떠오른 표식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아아아앗……!
“저거, 설마.”
동공이 있는 대로 확장된 로이가 나머지 두 상급자를 번갈아 봤고, 이에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왔네. 8일 차 파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