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299
303화. 무질서(1)
* * *
오후 5시 42분.
러시아 중남부의 옴스크 외곽.
민구는 4평 남짓한 풀밭 위에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후우…….”
풀밭이 왜 ‘4평’이냐 하면 주변의 다른 땅은 전부 시커먼 이공간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저 위로 올라가는 게 가능은 할까?”
민구가 이렇게 묻자 그의 발치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냄새가 ‘저 위’인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릉.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워낙 지치기도 했지만 애초에 의견이라고 할 만한 걸 낼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중국의 북단에서 러시아로 직접 건너온 지도 어느덧 2시간이 지났으나, 민구와 냄새는 최초 계획과 달리 계속해서 서쪽으로 달려야만 했다.
그 이유는 오로지 땅이 없어서였다.
시베리아 방향인 북쪽으로 이어지는 땅 말이다.
중국, 몽골과의 접경지인 남단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 있고, 그 외의 모든 대지가 이공간으로 꽉 차 있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민구로선 북쪽으로의 진입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그나마 남아 있는 대지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벌써 2시간째 서쪽으로 내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달리는 것도 쉽지 않게 됐다.
언젠가부터 이공간의 비율이 점점 더 늘어나더니, 지금은 바다 위에 흩어진 난파선 조각처럼 대지가 드문드문 남아 있게 됐기 때문이다.
“씨팔, 뭐가 보여야 내가 어디쯤인지 짐작이라도 하지.”
민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중국에서 가져온 러시아 지도와 온통 이공간뿐인 주변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이내 포기를 하고서 지도를 대충 접어 배낭 안에 넣었다.
어차피 서쪽으로 계속 가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어서 가자.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
민구가 냄새의 이마를 툭 건들며 말하자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민구. 죽어. 정우!
조악한 어휘였지만 민구는 녀석의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냄새 자신도 잘 안다는 뜻인 거다. 민구가 이곳에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정우가 그를 죽이러 올 것이라는 걸.
정확히는 민구가 감당하지 못한 러시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러 오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면 민구는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후레자식.’
민구는 지금쯤 미국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을 게 뻔한 아들의 모습을 슬쩍 떠올렸다.
그러곤.
“엉……?”
여태 쭉 사라져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패스파인더의 정수 표식에 동공을 키웠다.
팟.
반경 10킬로 이내의 대상을 추적하는 정수 표식.
그러나 이 표식은 같은 방주에 탄 존재를 가리키지 않기에 러시아에 들어선 내내 민구의 패스파인더는 정수 표식이 비활성화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표식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누가 근처에 있어.”
대체 누굴까?
2평에서 4평 크기의 대지 조각이 수십 미터 간격으로 흩어져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지역을 또 누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인가?
팟.
“어.”
그새 또 표식이 비활성화됐다.
누군지 모를 대상이 탐지 범위 바깥으로 나간 거다.
“가자. 서둘러.”
민구는 상대가 누가 됐든 일단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에 냄새를 재촉했다.
그리고 냄새도 간만에 감지된 ‘산 것’에 흥분했는지 수염을 실룩이며 몸을 일으켰다.
스읏!
민구가 잽싼 동작으로 냄새의 등에 올라타자 녀석이 전신을 파랗게 태우며 시커먼 허공을 향해 도약을 했다.
쏴아아앗!
민구의 귓가에 파공음이 들릴 정도로 엄청난 속도.
눈 깜짝할 사이에 20여 미터를 건너뛴 냄새는 맞은편에 있던 자그마한 대지 조각에 안착했고, 곧이어 다시 뒷다리를 튕기며 또 한 번 수십 미터를 가로질렀다.
쏴아앗!
타앗, 쏴아앗!
그렇게 맹렬히 도약하기를 10여 분.
마침내 문제의 대상체가 민구의 시야에 들어왔다.
좌우로 뻗은 양팔을 휘적거리며 허공을 가르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
사람이었다.
‘오……!’
민구는 상대가 인간의 형상을 한 것만으로도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뭐가 됐든 대화가 통할 테니까.
이곳이 어디쯤이고, 어디로 가야 시베리아 쪽으로 진입할 수 있을지 물어는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기, 기다려!”
“……?”
민구의 외침에 뒤를 힐끗 돌아본 상대는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러시아인이긴커녕 동양인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태 봐 온 중국인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크릉!
민구가 별다른 지시를 주지 않았기에 냄새는 전력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좁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력을 다해 뜀뛰기 중인 상대를 뒤에서 덮칠 수 있게 됐다.
화앗!
“어억!”
땅 위에 발을 딛자마자 웬 호랑이가 뛰어드는 걸 보게 된 정체불명의 사내는 반격을 하는 대신에 전신을 감싼 보호막부터 강화했다.
8일 차 선두 특혜의 영향으로 서로의 정수량을 볼 수 없게 되어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반면 러시아에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알고 있던 민구는 바로 정수 칼을 뽑아 들었다.
스아아앗!
그러곤 망설임 없이 상대방을 향해 휘둘렀다.
“어어!”
그러자 거침없는 공격에 놀란 상대가 마찬가지로 칼을 뽑아 수비에 나섰고…….
콰츠츠츠츳!
두 칼날이 맞부딪치기 무섭게 사내의 것이 먼저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화력의 차이가 현저했던 것이다.
“자, 잠시만……!”
자신의 칼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본 사내는 뒤로 물러나려다 몸을 기우뚱했다.
발로 밟고 있던 땅덩어리가 워낙 작아서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는 탓이었다.
이에 민구는 놈을 한 번 더 공격하는 대신 칼날을 거두며 왼손을 내밀어 기다리란 제스처를 취했다.
어차피 칼날 따위를 쓰지 않아도 정수 실 하나면 상대를 동강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잠시 대화 좀 하고 싶은데, 우리 달리기 좀 잠시 멈추는 게 어때?”
민구가 이렇게 말하자 사내가 새까만 이공간으로 꽉 찬 뒤편을 흘깃 보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차피 잠시 뒤엔…… 죽이겠다는 소리 아니야?”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민구는 잠깐 고민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내가 달리기를 멈출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막상 저편의 대지 쪽으로 몸을 날리진 못한다.
자신이 호랑이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다는 걸 빠르게 깨달은 탓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 사연이라도 듣고 가는 게 낫지 않나?”
민구는 위축된 사내를 상대로 어설프게 정우 흉내를 내고 있었다.
놈이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걸 어깨 너머로 봤었으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상대가 제법 반응을 해 줬다.
“……사연?”
그러면서 민구를 태운 호랑이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8일 차, 그것도 벌써 오후 6시를 향해 가는 시점.
이때까지 생존에 성공한 실력자임에도 호랑이를 탄 중년 남자는 보기 드문 캐릭터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쪽에서 왔잖아? 뭐지, 넌?”
사내가 뒤늦게 민구가 접근해 온 방향을 쳐다본다.
이에 민구도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뭐?”
“난 네가 우리 앞에서 달리는 걸 보고 쫓아온 건데.”
“아냐, 난 동쪽으로 도망가다가 정수 표식이 회전하는 걸 보고서 다시 방향을 바꾼 참이었다.”
“도망?”
민구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내를 붙잡은 지금도 발치의 정수 표식이 계속 서쪽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남자보다 더 커다란 정수 덩어리가 서쪽에, 그것도 반경 10킬로 이내에 있다는 뜻.
“뭘 피해서 도망…….”
이렇게 물으려던 민구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굳이 답을 들을 것도 없이 웬 각성자 한 무리가 이리로 곧장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저놈들은 또 뭐야?”
민구의 질문에 사내가 우린 이제 다 죽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러시아의 구원자들.”
“그럼 넌 아니고?”
“보면 모르나? 난 이곳 태생이 아니야. 카자흐스탄에서 왔다고. 그런데 이리로 넘어오자마자 웬 러시아 놈들이 다짜고짜 공격하더군. 지구가 내가 올 걸 미리 경고했다고 하던데.”
“……미리 경고를 해?”
민구는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지구가 경고했다던 대상이 이 불쌍한 사내는 결코 아닐 거란 점.
그렇다면 누구의 방문을 경고했던 걸까?
‘아.’
민구는 발치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냄새를 바라봤다.
마침 배가 꽤 고플 때여서, 녀석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러시아의 구원자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우린가?”
민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카자흐스탄에서 온 구원자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이쪽 이야기인 것 같다고. 저놈들이 받은 경고라는 거.”
“뭣……? 당신이 누군데?”
이에 민구는 자신의 팔목에 새겨진 방주 각인을 쳐다봤다.
“정우 애비.”
* * *
같은 시각, 워싱턴 주의 애쉬포드.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약 120킬로 떨어진 작은 마을.
현시점 미국의 1위 구원자인 맥 테일러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본인의 이름을 박정우라고 소개한 8일 차 파견자가 궤멸자를 일격에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헬기에 탄 채로 말이다.
쿠아아아…….
방금 막 머리에 정수 창이 꽂힌 궤멸자는 신장만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몸뚱어리를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스사사사삿!
창에서부터 순식간에 증식하기 시작한 가시 줄기에 갈려 나갔다.
마치 믹서기 안에 들어간 과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사뭇 무거워진 장내의 분위기.
8일 차 침입자를 이렇게 간단히 박살 내는 존재가 미국에 왔다는 건 상당히 낙관적이었지만 동시에 이 존재가 미국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이 모두를 두렵게 했다.
“……이미 이곳엔 당신의 적수가 없잖아. 그런데 왜 우릴 계속 공격하려는 거지?”
이윽고 맥이 정우를 향해 질문을 던졌고, 이에 8일 차 파견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애초에 난 네놈을 꺾으러 온 게 아니다. 정수를 모으고 진입로를 닫기 위해 온 것뿐이야.”
“정말 그런 거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나.”
맥의 이 말은 ‘서면계약’에 대한 이야기였다.
맥은 이제 더 이상 정우를 공격할 수 없으며 동시에 자신이 파트너로 삼고 있던 두 민간인, 토드 파커와 샬롯 터너 중 하나가 사망할 경우 자신도 죽게 된다.
숱한 역경을 거치며 미 대륙의 1위에 오른 그로선 부당한 대우를 받는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정우가 그새 발목 부분까지 갈려 나간 궤멸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주에 빚을 졌어. 그걸 갚으려면 너희 중 대다수를 죽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우는 말을 잇다 말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래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타국에서 넘어온 파견자들이 미국의 각성자들을 정리했을 거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팟.
가벼운 기척과 함께 떠오른 한 줄의 문구가 정우의 모든 주의를 끌어당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의 가이드라인이 무려 ‘파견 예고’를 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고] 곧 다수의 파견자가 현재 구원자께서 체류 중인 지역으로 진입합니다.그러더니 짤막한 부연을 덧붙였다.
[비고] 브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