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301
305화. 무질서(3)
*오후 7시 11분.
정우가 시애틀을 포함한 워싱턴 주 일대의 진입로 두 개를 찾아내는 동안 미 대륙에도 두 가지 큰 변화가 발생했다.
첫째는 구원자 채널을 통해 보고된 새로운 표식이었다.
8일 차의 첫 번째 파견자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십 미터 상공에 나타난 기묘한 형태의 표식.
다만 이번엔 그 색이 붉은 기운을 띠었고, 표식이 나타난 자리 또한 남달랐다.
여태 단 한 번도 파견자가 등장한 적이 없는 시카고였기 때문이다.
사태 이전에도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지구 폐쇄 8일 차인 지금도 연합이 관리하는 도시 중에선 두 번째로 컸다.
민간인은 물론 각성자의 수도 상당한 도시라는 의미다.
게다가.
“이번 표식도 지구가 파견 지점을 미리 일러주는 거라면…… 어째서 두 번째 파견자 때는 표식을 내려주지 않았지?”
맥이 아는 한, 미니애폴리스에 나타났던 8일 차의 두 번째 파견자는 아무런 전조 없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널에서 새 파견자를 바로 인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침 그 도시에 당직 요원이 있어서였다.
만약 미니애폴리스에 근무 중인 요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두 번째 파견자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정우가 지적했다.
“네가 주장하는 두 번째 파견자라는 녀석은 지구가 짜놓은 시나리오에서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주장하는……?”
“오늘 이 땅에 떨어진 파견자가 날 포함해 둘뿐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너희는 운 좋게 감시망에 걸린 파견자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잖아.”
“…….”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맥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럼 세 번째…… 아니, 표식이 붙은 파견자는 대체 무슨 의미지?”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적어도 피라미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어쨌든 지구가 놈을 시카고에 떨어뜨렸다는 건 충분한 먹이를 주겠다는 의미야. 너희보단 새 파견자에게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거다.”
“아아…….”
맥이 끔찍하단 표정을 지었으나 정우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뭔가 석연찮아. 어째서 표식을 내린 거지? 이 땅에 내가 강림을 가진 채 체류 중이라는 걸 잊었을 리가 없는데.’
붉은 표식의 주인이 정말 새 유망주라면, 가급적 은밀히 투입해야 현명한 게 아닐까?
지금만 봐도 벌써 나라 세 개를 집어삼킨 구원자가 저격을 시도하려 들지 않는가 말이다.
또한.
‘날 위한 정수라고 가정해도 앞뒤가 안 맞아. 만약 그런 거라면 시애틀이나 근처 도시에 새 파견자를 내려줬으면 되는 일 아닌가? 이건 내 강림을 빼내기 위한 수작이다.’
견제.
또는 다른 유력한 구원자와의 형평성을 강제로 맞추기 위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권고] 동쪽으로 비행하십시오.정우는 시야에 박혀 있는 가이드라인의 권고 문구를 빤히 바라봤다.
어찌됐든 일개 구원자로선 가이드라인의 지침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워낙 넓은 지역이라 패스파인더에 의지해서 무언가를 해내기엔 무리가 있고, 붉은 표식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바로 등장할 가능성도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
발치의 진입로 표식은 더 이상 근처에 남은 진입로가 없다고 알려오고 있었다.
이제 헬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거나 강림을 이용해 시카고로 날아가야 한다.
“너희 쪽 요원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내가 왔을 때처럼 또 포위망을 만들고 있나?”
정우의 물음에 맥이 허공을 흘깃 봤다.
“물론이야. 시카고엔 민간인이 많기 때문에 대피 작전이 진행 중이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진 요원들이 시간이 벌어줄 거다.”
“대피? 근처에 다른 도시가 있나?”
“그럴 리가……. 일찍부터 주 단위로 치안국이 생기긴 했지만 도시들이 무너지는 건 막을 수 없었어. 시카고를 떠나면 아예 주 밖으로 나가야 하지.”
“그렇다면 무의미한 발악 중인 셈이군.”
“파견자와 요원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보단 낫겠지. 네가 끔찍한 전례를 만들어준 덕분이다.”
맥은 날 선 대사를 읊으면서도 차마 박정우를 노려보진 못했다.
단순히 정우의 힘에 압도되어서가 아니었다.
한때 이 대륙의 최강자였던 그는 규격 외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박정우에게 오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를테면.
‘제길. 우스운 생각이지만 정말이지 교과서 같군.’
상대를 보면 볼수록 소름이 돋으면서도 동시에 경외감이 느껴졌다.
지구가 정녕 원하던 존재가 어떤 형태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1일 차에 진행됐던 설문과 그것을 통해 얻은 구원자라는 역할.
그리고 곧바로 진행된 반강제적인 살인 경쟁과 서열 정리.
맥은 그 과정을 오롯이 겪어내면서도 끊임없이 자문하곤 했다.
대체 어떤 존재를 찾아내려고 이만한 시련을 겪게 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때로부터 8일 만에 ‘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대륙의 정예 요원 수십 명을 홀로 도륙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서.
“…….”
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헬기 바닥을 바라보고 있자, 박정우가 또 다시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시카고는 어떤 곳이지?”
“뭐?”
“진입로를 폐쇄한 자리에 새로 세운 정착지인가? 일단 성역일 리는 없겠지. 그랬다면 주민들을 대피시킬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네 말대로다. 만약 시카고가 성역이었다면 우리로선 표식이 나타난 걸 좋은 기회로 여겼을 거다.”
맥은 여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성역을 세울 수 있는 도시긴 해. 시카고 중심부엔 아직도 커다란 공터가 있다. 진입로가 생겨났던 흔적이지.”
정확히는 2일 차 진입로. 공명수의 안개가 잠식했던 지역임을 말하는 거였다.
“우린 시카고를 이제 ‘도넛’이라고 불러. 상공에서 보면 정말 도넛처럼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걸로 보이거든.”
“그렇군.”
답을 들은 정우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음에도 맥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성역 특혜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나? 시카고가 그 후보지고?”
맥은 현재 박정우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처지이지만, 본질적으론 미국 출신의 구원자이자 체계의 수호자였다.
따라서 누구에 의해서든 미국에 성역이 생긴다는 건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존재로서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성역의 존속 확률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주인’이 다른 자도 아닌 박정우이지 않은가?
현 시점 이 나라…… 아니, 이 행성의 최강자일지도 모르는 거대한 존재 말이다.
‘외국 자본 투입.’
맥은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엉뚱한 단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다시 박정우란 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정우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맥과 시선을 맞댔다.
“그래. 아직 성역을 가지고 있다. 본래라면 중국에 사용했어야 할 힘이지.”
“……!”
맥의 동공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저 말인즉슨, 현재 중국엔 성역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종의 쾌감과 아찔한 기분이 뒷덜미를 쑤시고 가는 듯해서 맥은 눈을 꾹 감았다가 도로 떴다.
다음엔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 시카고에 성역을 세워줘. 그렇게만 해준다면 네가 내리는 모든 지시를 따르겠다.”
*오후 7시 32분.
일명 ‘도넛’이라고 불리는 일리노이 주의 대도시 시카고 전역에 어느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전원 복귀! 표식 밑으로 집합하십시오!」
“뭐?”
“지금 무슨 소리야?”
“표식 밑으로 집합하라고?”
“저게 뭔…….”
앞다퉈 시카고를 빠져나가고 있던 대피 그룹의 민간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차나 말 따위를 멈춰 세웠다.
방금 들려온 음성의 주인이 일리노이 주의 수호자 서열 3위 베네딕 톰슨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요원들에 대한 시카고 주민들의 신뢰는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자신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시카고의 최고 위협 지대인 붉은 표식 밑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제 와서 복귀, 아니 그것도 표식 밑으로 집합하라니…….
“씨팔, 말도 안 돼. 갑자기 돌아버린 거 아니야?”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결국 극도로 초조한 상태였던 주민 일부가 톰슨의 명령을 무시하고서 다시 액셀을 밟았다.
촤아아앗!
그러자 놀랍게도 대피 그룹을 호위하기 위해 도시 외곽까지 나와 있던 다른 요원들이 일제히 정수 파동을 뿜어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경고 사격이었지만, 다음번엔 그저 경고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이탈자들이 내달리던 도로 근처의 건물이 쓸려나갔기 때문이다.
“맙소사.”
이를 본 몇몇 눈치 빠른 주민은 바로 알아챘다.
정예급 요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구원자 채널’이란 곳에서 이미 많은 것들이 정해졌다는 사실 말이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즉시 표식 근처로 복귀하십시오. 여러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현 시간부로 도시를 벗어나는 인원은 즉결 처형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쏘아져 나온 두 번째 경고.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세한 설명도 없이 무력행사부터 하는 걸까.
상황이 전례 없이 험악하게 돌아가자, 이를 악문 채 액셀을 밟던 자들도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 도망가면 정말 죽인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대부분 톰슨이 요구한 것처럼 표식으로 복귀까진 하지 않았다.
저마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도시의 중앙부 방향을 바라볼 뿐.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으으읏…….
마치 도시가 통째로 커다란 회오리 안에 갇힌 것 같은 기척이 일더니 도시 중앙의 상공에 떠 있던 표식이 명멸하기 시작한 거다.
“어어…….”
“잠깐, 표식이.”
톰슨의 명령에 차 밖으로 나왔던 사람들도 은근슬쩍 다시 운전석에 몸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최초의 채널에 속해 있지 않은 하위 넘버의 요원들도 위축된 모습으로 표식을 바라봤다.
스아아악……!
이윽고 도시를 감싼 무형의 기척이 더욱 거세지더니 저마다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려야 할 정도로 강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그러곤.
파아아아앗!
마침내 하늘 안쪽에서부터 새빨간 빛줄기가 쏘아져 내려왔다.
붉은 표식을 정확히 관통하면서 말이다.
공식 기록상 8일 차의 세 번째 파견자가 시카고에 도착한 거다.
“이 씹…….”
빛이 내리 찍힌 지점에서 불과 이십여 미터 거리에 있던 일리노이의 넘버 3, 베네딕 톰슨은 시야가 벌겋게 물들자마자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현재 시각 오후 7시 34분.
다음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급하게 ‘채팅’을 쳤다.
[8] 강철 : 이봐, 바로 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미 놈이 도착했어! 이제 우린 메뉴얼에 따라 대응을 시작하겠다!그러자 거의 곧바로 상대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1] 정의 : 기다려. 지금…….미국의 1위 구원자, ‘정의’ 맥 테일러는 왜인지 말을 끝까지 맺지 않았고, 대신에 상공 끝자락에서 쏘아져 내려온 백색 빛줄기가 그새 희미해지기 시작한 붉은 표식을 수직으로 관통했다.
쏴아아아아앗!
“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
장내의 요원들은 뒤로 물러서면서도 혼란에 빠졌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